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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우 칼럼] '아이 캔 스피크' 할머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이시우 여행작가]

※ 이 글에는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이 캔 스피크'를 보며 손수건이 흠뻑 젖도록 펑펑 울었다. 누군가 봤다면 슬픈 사연이라도 있는 아저씨로 여겼을 거다. 평일 낮인 덕에 관객이 많지 않아 다행이었다. 내 옆으로 몇 좌석 떨어져 앉은 또 다른 관객도 나처럼 영화 보는 내내 울어서 또 다행이었다.

주인공 옥분 할머니(나문희 분)가 민재(김제훈 분) 형제에게 저녁 밥상을 차려주는 장면에서부터 눈물이 터졌다. 옥분 할머니가 평생 가슴에 묻어둔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평범한 밥상이었다. 생선구이가 올라왔고 된장찌개가 끓고 있었다. 그 밥상을 보며 내 할머니의 만둣국이 떠올랐다. 매년 늦겨울이면 할머니는 만두를 빚었다. 적당하게 신맛이 나는 김치를 썰어 넣은 어른주먹만한 크기의 만두였다. 할머니는 그게 고향에서 먹던 음식이라고 했다. 내가 자라며 먹는 만두 개수가 늘 때마다 할머니는 손자의 성장을 대견해하며 기뻐하셨다.

할머니의 가족사랑은 깊고 애틋했다. 해방 후 가족과 떨어져 홀로 남쪽으로 내려온 할머니는 서울에서 할아버지를 만났다. 가족이 생긴 것도 잠시, 젖먹이 딸과 아들을 두고 참전한 남편은 전사하고 만다. 이때부터 생계를 책임졌기 때문일까. 할머니는 여장부 소리를 들을 정도로 성격이 호탕했다. 어긋난 일을 보면 때로 불같이 화를 내기도 했다. 할머니의 그런 면을 잘 알기에 아버지조차 어려워했지만 손자인 내게만큼은 예외였다. 언제나 넉넉했고 푸근했다.

'아이 캔 스피크'의 옥분 할머니 별명은 '도깨비 할매'다. 지금까지 구청에 접수한 민원이 8000건이 넘어 붙은 별명이다. 옥분 할머니가 민원실에 나타나면 직원들은 모두 긴장한다. 할머니 앞에서 긴장하는 건 공무원뿐만이 아니다. 옥분 할머니가 장사를 하는 시장 골목 상인들도 마찬가지. 바른 말만 하는 할머니는 이웃들과도 언성을 높이기 일쑤다. 이렇게 바쁜 옥분 할머니의 소원은 영어로 유창하게 말하는 것. 어릴 적 미국으로 입양 간 할머니의 유일한 가족인 남동생과 전화통화를 하고 싶어서다. 위안부였던 누이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동생의 마음은 알지 못한 채.

영화 속 옥분 할머니가 영어공부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치매를 앓아 하루가 다르게 기억을 잃어가는 친구 정심 할머니를 대신해 미국 의회에서 위안부 피해자 자격으로 증언하기 위해서였다. 평생 숨겨온 과거를 세상에 밝히기로 결심한 옥분 할머니는 미국으로 가기 전 어머니의 산소를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엄마, 그때 왜 나한테 욕봤다고 말해주지 않았어?” 그렇게도 듣고 싶었을 고생했다, 애썼다는 한 마디. 옥분 할머니는 엄마를 원망하며 울음을 쏟아낸다.

언젠가 내 할머니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만약 할아버지가 살아 돌아온다면 어떻게 하겠냐고. 별 생각 없이 던진 질문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할머니가 대답했다.

“시원하게 뺨을 한 대 쳐줄 거야!”

예상과 다른 답에 놀라 할머니를 바라보니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수십 년 세월이 할머니 가슴에 원망으로 남았다는 사실을 그때야 처음 알았다.

내가 중학생이 되던 해, 할머니는 암 투병을 시작했다. 작은 체구였지만 건강했던 할머니의 모습은 바람 부는 날 모래알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루가 다르게 할머니 머리카락도 한 움큼씩 빠져나갔다. 할머니는 거울에 비친 당신의 모습을 낯설어했다.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본인은 그때 알았을까. 할머니는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과 이별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후회했다. ‘고생하셨어요’라고 말해 드리지 못해서. 할아버지 뺨을 쳐주겠다는 말에 맞장구쳐드리지 못해서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추석날 찾아온 민재 형제에게 동태전을 부쳐준 옥분 할머니처럼 내 할머니도 매년 명절이면 차례 음식을 준비하다가 건네주고는 했다. 차례 지내기도 전에 음식을 먹으면 안 된다는 아버지의 꾸지람 정도는 할머니가 방패가 되어 막아 주었다. 넙죽 받아먹는 손자를 보며 할머니는 보름달처럼 환하게 웃었다. 유독 길었던 추석 연휴였다. 덕분에 할머니 생각이 더욱 간절했던 며칠이었다.

이시우 여행작가 shu9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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