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엔터 김소연 기자]
까칠한 말투, 도도한 눈빛 '맨몸의 소방관' 한진아는 없었다. 얼굴을 마주한 정인선(26)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털털한 입담을 뽐내는, 화면 보다 더 예쁜 외모를 가진 배우였다.
KBS2 '맨몸의 소방관' 종영 후 정인선을 만났다. 올해 데뷔 22년차 정인선은 "그동안 계속 연기를 해왔지만 '맨몸의 소방관'은 저에게도 도전이 된 작품"이라는 말로 남다른 애착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맨몸의 소방관'을 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되는데,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셔서 새해 복을 미리 받은 느낌"이라며 "앞으로도 이렇게 재미난 작품으로 인사할 수 있는 배우고 되고 싶다"는 포부를 드러냈다.
◆정인선, 한진아가 되다
'맨몸의 소방관'은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했던 작품의 표본이다. 4부작 드라마 대부분이 그렇듯, '맨몸의 소방관'은 방송을 시작할 때까지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한류스타가 나오는 화려한 캐스팅도 아니었고, 이미 진작에 편성이 정해졌음에도 "후속작 제작의 시간을 벌어줄 '땜방'이 아니냐"는 말로 평가절하됐다. 하다못해 전작의 후광조차 없었다.
그렇지만 베일을 벗은 '맨몸의 소방관'은 탄탄한 구성, 빠른 전개가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웰메이드"라는 찬사를 받았다. 특히 극중 10년 전 화재 사건으로 부모를 잃고, 방화범을 찾아 나선 상속녀 한진아를 연기한 정인선은 '맨몸의 소방관'이 방송되는 내내 화제를 모으며 높은 관심을 받았다.
"대본을 본 순간 한진아가 어떤 인물로 표현되야 할 지 머리에 그려지더라고요. 그래서 주변엔 티를 내지 않았지만 열심히 준비했던 것 같아요. 말투부터 걸음걸이까지 바꾸려 노력했어요. 첫방과 막방을 연출자인 박진석 PD님과 이준혁 오빠, 유정희 작가님과 함께 봤는데요. '이 선머슴, 이 털털함이 어디에 갔냐'고 신기해 하시더라고요. 전 '제가 이만큼이나 노력했다고요'라고 말해줬어요."(웃음)
외적인 부분만큼이나 정인선이 한진아를 표현하기 위해 노력한 부분은 내적인 날카로움이었다. 한진아는 10년 전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고, 복수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외로운 캐릭터인 만큼 이를 연기적으로 끌어내려 고심했다.
"이렇게 예쁜 옷을 입고, 예쁜 머리스타일을 하고, 현대극을 하는 캐릭터는 처음이었어요. 대본을 봤을때 부터 딱 느껴지는 한진아의 날카로운 이미지가 있는데, 거기에 제가 부합했으면 했어요. 상속녀가 갖고 있는 트라우마, 분위기가 뿜어져 나오길 바랐죠. 그래서 더 스스로 준비했던 것 같아요."
◆"잘 자랐다는 말, 감사한 칭찬"
정인선은 1996년 SBS '당신'으로 데뷔한 이후 꾸준히 활동해왔다. 그동안 KBS2 '매직키드 마수리', 영화 '살인의 추억' 등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던 정인선은 매 작품마다 색다른 변신을 선보이며 화제가 되고 있다. "잘자란 아역"이란 칭찬이 따라붙는 이유다.
정인선은 "사실 잘 자란 아역이란 말은 10대 후반부터 듣고 있다"며 "어디까지 자라야 하냐"고 장난스럽게 말하면서 웃었다. 그러면서도 "저를 보며 놀라시는 분들에게 감사하고, 기쁘다"고 말했다.
아역이라는 꼬리표에 대해서도 덤덤했다. 빨리 성인 연기자로 자리매김하겠다는 조급함도 없었다. 차근차근 성장하며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왔기에 가질 수 있는 당당함이었다.
"저에게 '마수리', '살인의 추억'만 있는 건 아니니까요. 저를 잊지 않고 기억해주는게 감사하고, 그때와 지금의 제가 명백하게 다르니까 부담감도 없어요. 제가 나올때 마다 '얘가 얘야?' 이런 반응을 보여주시는게 재밌어요."
물론 정인선이 이렇게 자신을 보듬을 수 있기까진 스스로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있었다. 특히 "중학교 2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4년 동안 학생 정인선으로 돌아가 생활하던 시간이 큰 도움이 됐다"고 회상했다.
"그땐 어렸고, 너무 어릴 때 일을 시작하다보니 사람들이 저를 바라보는 것과 제 스스로 느끼는 괴리감이 있었어요.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누구나 겪는 중2병, 사춘기 같아요.(웃음) 그 시간을 어머니가 잘 케어해 주셨는데, 덕분에 더 사람 냄새나는 매력있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싶어요. 저에겐 정말 필요했던 시간, 기억 같아요."
◆사람냄새 나는 인간 정인선
털털한 성격 덕분에 주변에 사람도 많은 편이다. 학교 선배인 유연석, 은사였던 이순재의 연극을 보러가지 못한 것에 대해 "제가 살뜰히 챙기지 못했다"면서 "의정부 공연엔 갈 것"이라는 의지를 내비치기도 했다.
술자리 역시 피하지 않는다. "술을 잘하진 않는다"고 하지만, 술자리 수다가 세기 때문. '맨몸의 소방관' 막방 모임에서도 "새벽까지 창 밖 바에 일렬로 앉아 눈 내리는 것을 보며 이야기를 나눴다"고 전하기도 했다.
"촬영 뒷이야기, 좋은 이야기, 작품 등에 대한 얘기를 하다보니 시간이 그렇게 간 것 같아요. PD님과는 12살, 이준혁 오빠와는 8살 차이가 나는데, 이렇게 대화가 통하는게 신기하다고도 하세요. 이준혁 오빠는 '네가 연기를 오래해서 내공이 세서 그렇다', '역시 선생님'이라고 놀리기도 하시지만요.(웃음) 제가 보기엔 저보다 더 꾼인데 저보고 자꾸 '선생님'이라고 하더라고요. 저도 반격하려 하지만 '선생님'을 이길 수 있는게 없어요."
◆연애도 연기 위해…"앞으로 계속 할 일"
연기에 호기심을 느낀 건, 아역배우였던 친오빠 영향이었다. 오빠가 배우는 연기에 호기심을 느껴 시작한 게 22년이란 시간까지 이어졌다. 처음은 우연이었지만, 몇 번이나 그만둘 수 있는 상황에서도 정인선은 "연기를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강조했다.
"저는 연기를 잠시 쉴 때에도 연기를 그만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제가 이 일을 하는 것에 대해 후회한 적도 없고요. 물론 제가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선 궁금도 하고,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하죠. 이 일을 하는 한 최대한 규칙적으로 살려 노력하겠지만, 아침에 출근하고, 밤에 퇴근하고 하는 생활은 힘드니까요. 그래도 계속 이렇게 연기를 하고 싶어요. 꽃길이 아니어도, 평탄하지 않아도, 웃으면서 돌아보자는 게 제 좌우명이에요"
연기에 대한 애정 만큼 경험에 대한 갈증도 크다. 스스로 "경험 열등감이 센 편"이라고 소개하면서 연기 외에 사진, 여행, 글쓰기 등 다양한 분야에도 도전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제가 보고, 느끼고, 하는 모든 것의 귀착점은 신기하게도 연기"라면서 어쩔 수 없는 연기자의 면모도 드러냈다.
"학창시절까지 연애를 해 본 적이 없어요. 대학에 입학해서 로맨스 연기를 하려고 하는데, 헤어질 때 절절함 이런 감정이 안나오고, 이해도 못하겠는 거에요. 그 당시 저는 '아닌 건 아니지, 왜 헤어지지 못하지'란 생각을 갖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안되겠다' 싶어서 연애를 본격적으로 고민했던 거 같아요.(웃음) 물론 그런 목적만 갖고 연애를 한 건 아니지만, 연기에 있어 경험은 참 중요한 부분이 된다고 생각해요."
새로운 경험을 갈구하는 성격처럼, 다음에 도전하고 싶은 장르도 직업군이 확실한 장르물이다. 그렇지만 이제까지 그랬듯 조급하게 결정하진 않을 계획이다.
"짧고 굵게 보다는 얇고 길게 가고 싶어요. 소신껏 가늘고 길게요. 급히 뭔가를 하고 싶진 않아요. 다행히 주변에서도 저의 이런 의견을 존중해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