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비즈엔터

[인터뷰] 이정재 “아는 만큼의 여유가 생긴 지금이, 오히려 더 어렵죠”

[비즈엔터 김예슬 기자]

▲배우 이정재(사진=이십세기폭스코리아)
▲배우 이정재(사진=이십세기폭스코리아)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소년 같은 눈빛을 가진, 이정재는 두말할 필요 없는 좋은 배우다. 도둑, 귀족, 반역자, 갑부, 위장경찰…폭넓은 스펙트럼으로 자신이 맡은 배역을 완벽히 소화해 온 그가 이번 영화 ‘대립군’을 통해서는 천민으로 분했다. 무게감 있는 목소리는 좀 더 날것의 느낌으로, 귀티 나는 외모는 흙칠로서 거친 느낌을 냈다. 진중한 눈빛은 대립군의 수장인 토우 캐릭터를 실감나게 살렸다.

수많은 산을 타는 ‘대립군’은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실로 고생스러운 영화다. 그럼에도 이정재는 수많은 자신의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대립군’을 ‘중요한 영화’라고 칭했다. 25년차 배우로서 가진 두려움과 어려움에 대해서도 그는 솔직하게, 정면으로 마주했다. 안주하기 보다는 도전하는, 더 쉬운 길을 찾기 보다는 작품과 인물에 집중할 줄 아는 배우 이정재는 그 자체로도 너른 진폭을 갖고 있다.

Q. 꽤 상기된 모습이다. 언론시사회 때도 떨렸다고 했었는데, 영화를 막상 보니 어땠나.
이정재:
난 재밌게 봤다. 의도했던 부분이 잘 담겼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내가 기대한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연기 이후로는 우리 손을 떠나있어서 그런지 괜스레 떨렸다.

Q. 촬영이 고됐던 게 눈에 보였다.
이정재:
힘들었다. 국립공원부터 관광명소, 명산들을 모두 돌아다녔는데 대부분 자연훼손 문제 때문에 차량 진입이 어려웠다. 쉴 수 있는 공간이 많이 마련돼 있지도 않았고, 그렇다보니 촬영을 위한 시작점이 깊숙한 산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힘들다 하면 힘들 수 있는 그런 부분이었다. 아, 밥차의 진입도 어려웠다(웃음). 도시락도 포장 용기가 많다 보니 먹고나서 그걸 치우는 것도 일이었다.

Q. 사실, 대본을 보면 이런 고생길이 어느 정도 보였을 텐데.
이정재:
그렇지. 하지만 이런 영화가 근래에 없었기도 하거니와, 잘 찍어낸다면 새로운 사극 영화가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결정적인 이유인 건 아니지만.

Q. 결정적인 이유라 함은…
이정재:
동시대적인 요소지. 개인적으로 내 필모그래피에서 중요한 영화 중 하나가 될 것 같았거든. 배경이 조선시대임에도 잘 이해되는 부분이 많았다. 그런 게 시나리오에서부터 눈에 띄었고.

▲배우 이정재(사진=이십세기폭스코리아)
▲배우 이정재(사진=이십세기폭스코리아)

Q. 보통 ‘이정재’ 하면 ‘럭셔리’한 느낌이 강하다. 그럼에도 이번엔 비천한 용병을 택했다.
이정재:
서사가 좋았다. 용병이라 할 수 있는 대립군이 어떻게 하다가 여기까지 오게된 건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주된 이유가 가난인 거고. 가난했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는데도 피난은커녕 가족을 위해 ‘대립질’이라도 해야 하는 그 생활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정기군도 아닌 그들의 처지가.

Q. (※스포일러가 포함된 질문입니다) 그런 ‘처지’가 잘 드러난 게 이름인 것 같다. 광해에게 결국 끝까지 이름을 알려주지 않지 않나.
이정재:
촬영장 때도 그 얘기를 많이 했다. 마지막에 이르러 광해와 헤어질 때 “내 이름은 토우입니다!”하고 소리라도 지를까 싶었고(웃음). 그래도 주인공 이름인데 한 번 쯤은 제대로 나와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대신, 캐릭터가 그만큼 더 살았다. 이름을 알려주는 대신 “강건하십쇼”라고 말하는 모습이 토우라는 인물을 가장 잘 보여준 것 같다. ‘성군이 되십쇼’, ‘꼭 살아남으셔야 합니다’와 같은 후보도 있었지만 광해에게 건네는 마지막 말로써는 ‘강건하십쇼’가 가장 좋았다고 생각한다.

Q. 토우는 여러 감정이 보이는 캐릭터기도 했다. 두려움과 정의감, 희망이 얽혀 있었으니까.
이정재:
연기하는 나로써 가장 앞서있던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대립군’이 말하고자 하는 가장 큰 주제는 ‘리더’다. 리더가 무엇이고 누가 리더를 만드는지가 가장 주된 시사점이지만, 그보다 앞서 많은 이들에게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공감 받고 싶었다. 나도 사실은 어떠한 배역을 하기 직전에 두려움이 있거든. 개봉을 앞둔 상황에선 또 다른 두려움이 오고, 연기자로서 다양한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끼니까. 그런 감정에 대한 공감이 이뤄지면 좋겠다 싶었다.

Q. 의외다. 배우로선 누구보다도 베테랑일 텐데.
이정재:
나를 포함한 모든 배우들은 언제가 은퇴 지점인지를 모른다. 뒤늦게 아는 거지. 이를테면 ‘아, 내 은퇴가 작년이었구나!’ 하는 것처럼(웃음). 정말 늦게 알게 된다. 배우에게 누군가가 먼저 나서서 해고라고 하지는 않으니까.

Q. 당신에게도, 그런 시기가 있었나.
이정재:
슬럼프는 좀 있었다. 내가 자초한 거긴 하다. 시나리오를 너무 까다롭게 골랐거든. 남성적이면서도 액션이 가미된 영화가 하고 싶어서 계속 기다렸다. 하지만 그 당시가 외환위기였어서 그런 큰 예산이 들어가는 영화가 나올 환경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런 시나리오를 찾다 보니, ‘하녀’ 전까지는 자연스럽게 영화에 출연할 기회가 많이 없었다. 그건 내가 내 스스로 만든 슬럼프나 마찬가지다.

Q. 본인도 모르는 잠정적인 은퇴점에 대한 고민이 있을 것 같다. 베테랑이고 톱이지만, 그래도 ‘배우’니까.
이정재:
아무래도 그렇다. 한 작품을 통해 인지도가 올라갈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고, 그런 편차가 참 심한 직업이다. 안 좋은 케이스로 흘러간다면 그런 두려움이 커지기도 하는 거고. 큰 성공이 아닐지라도, 그런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생긴다. 하지만 바꿔 생각하면 두려움이 에너지가 되기도 한다. 두려움 없이는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소중함과 감사함이 덜하기 마련이거든.

▲배우 이정재(사진=이십세기폭스코리아)
▲배우 이정재(사진=이십세기폭스코리아)

Q. 최근 시대극을 많이 한 것 같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까.
이정재:
의식하고 선택한 건 아니다. 하지만 시대극의 ‘사실’이 가진 힘이 있다. 그 이야기에 수반되는 캐릭터 내에서도 그 힘이 확실히 있다. 그런 이유가 있는 것 같다.

Q. 목소리도 어느 순간부터 굵어지지 않았나. 극을 위해 의도한 부분이 있을 것 같은데.
이정재:
내가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하기 보다는 목소리가 캐릭터의 색깔에 잘 어울릴지가 가장 중요했다. 사실 그런 부분은 일부러 과잉되게 표현하고자 한다면 어려운 거거든. 성대근육을 잘 사용하기 위해 발성 연습을 계속 하고 있다.

Q. 2000년대 초반의 이정재는 부드러운 이미지가 강했다. 요즘은 강한 이미지가 있지만, 멜로에 대한 그리움이 있진 않나.
이정재:
있지. 하지만 요샌 특히나 멜로 성향의 이야기가 없다. 제안을 받는데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시나리오 자체가 거의 없는 거다. 한국형 멜로 영화를 봤던 것도 오래된 일 같다. 그런 부분이 문제라고 말하기엔 뭐하지만, 아쉽긴 하다. ‘시월애’나 ‘정사’를 찍었을 때보다 시간이 참 많이 흘렀지 않나. 지금 환경과 지금 직업군을 가진 분들이 지금의 생활에서 느낄 수 있는 새로운 멜로가 또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그런 프로젝트가 와주길 기다리고 있는 거고.

Q. 세월이 지나고 영화판도 변했다. 20대, 30대, 40대를 거친 이정재는 어떻게 변했다고 보고 있나.
이정재:
여유가 좀 생긴 것 같다. ‘이 영화가 이런 거구나’라는 걸 조금은 알게 되는, 그런 여유. 아는 만큼의 여유가 생긴 거지. 돌이켜 보니 뭘 모른다면 여유가 나올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또 돌이켜 생각하면, 그동안 내가 가진 감성과 여러 가지의 것들을 많이 보여줬으니 어떤 식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보여줄지가 고민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지금 내가 연기해야 할 인물을 계속 더 파고들게 되는데, 이제는 내 안에 있는 무언가로 캐릭터를 만들기 보다 그 캐릭터를 통해 내 안의 에너지가 쌓이고 있다. 그래서 난, 오히려 지금이 더 어려운 것 같다. 앞으로도 더 어려워질 것 같고.

Q. 그렇다면 마흔의 나이가 이정재에게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은 없는 건가.
이정재:
그렇지는 않다. 성공 여부에 대한 기준과 행복감이 다른 지점에 있다는 걸 느끼기 시작한 게 마흔이 되면서부터다. 그런 생각도 하곤 한다. 슬럼프는 언젠가 또 올 수도 있는 거고, 사는 데 있어 그런 경험은 누구나 다 하지 않나. 실패했을 때 회복성이 조금 빠른 편인데,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면 그걸로 좋다는 생각을 해서인 것 같다. 성공을 했다와 하지 못했다는 기준과 내가 느끼는 행복감은 다르니까. 어렴풋이 갖고 있던 생각이었지만 마흔이 되다 보니 그런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배우 이정재(사진=이십세기폭스코리아)
▲배우 이정재(사진=이십세기폭스코리아)

Q. ‘대립군’을 통해 여진구와 처음으로 호흡을 맞춰봤다. 아역 출신의 나이 어린 후배, 어떤 느낌이었을까.
이정재:
그 친구는 나이만 적지 연륜과 경험치, 인성은 친구나 다름없다(웃음). 같은 배우다보니 어리더라도 내가 배울 면을 발견하게 된다. 뭐랄까, 본인 캐릭터의 감정을 잃지 않으려고 계속 자기감정을 잡고 가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부분은 오히려 내가 배워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다.

Q. 어찌 보면 꽤 중요한 질문인데, 이정재는 후배 배우에게 좋은 선배라 생각하나(웃음).
이정재:
이번에 밥을 정말 많이 샀다(웃음). 입은 다물되 지갑을 열심히 열었다. 어른과 꼰대의 차이는 상대방을 나와 얼마만큼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느냐에 달렸다. 그런 면에서 난 후배들을 존중한다. 연기에 있어서도 현장에서만큼은 후배들에 직접적인 조언을 하지 않는 편이다. 감독님과 이야기를 하면 감독님이 당사자와 상의를 하는데, 고치고 안 고치고는 결국 본인 몫이다.

Q. 후배 얘기가 나오니 친구 얘기도 궁금해진다. 정우성과 영화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나누는 편인가.
이정재:
어떠하게 봤다는 이야기는 나누지만 단점은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성이도 오랜 기간 영화를 해왔던 사람인지라, 단점은 본인이 봐도 알 테니 자기가 또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대신 격려를 잘 해주는 편이다.

Q. 연기를 한 당사자인 당신은 ‘대립군’ 속 자신의 연기를 어떻게 느끼고 있나.
이정재:
기존에 했던 연기들 중에서는 다르게 하려 한 노력이 조금은 보인 것 같다. 그냥 그 정도.

Q. 사실, 대중에겐 ‘관상’ 속 수양대군의 인상이 너무도 강렬하게 박혀있다. 그런 모습을 또 좋아하기도 하고.
이정재:
그런 것 같다. 하지만 ‘대립군’에서는 생존본능이 강한 ‘날 것’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영화 중간마다 토우가 굉장히 불안해하며 공포감을 느끼는 모습도 필요했고. 토우가 겉으로 보면 강하고 거친 인솔자로 보이지만,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내가 살아있나, 우리가 과연 살 수 있을까 하는 원초적인 고민이 드러나야 했으니까.

Q. (※스포일러가 포함된 질문입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명장면이 있다면.
이정재:
개인적으로는 마지막 후반부에서 토우가 광해에게 호패를 떼어주고 가는 장면이 참 기억에 많이 남는다. 한 쪽에선 동료가 왜군과 싸우고 있으니 그들에게 가야만 하니, 리더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여기까지밖에 함께 할 수 없다는 걸 본인이 정하는 그런 순간이니까.

▲배우 이정재(사진=이십세기폭스코리아)
▲배우 이정재(사진=이십세기폭스코리아)

Q. 인터뷰를 하면서 느낀 건데, 데뷔한지 20년이 넘었어도 뜨거움이 있는 것 같다. 생각과 고민, 도전을 하는 데 주저함이 없어 보이고.
이정재:
배우로서 준비하는 것뿐이다. 내가 어떤 배우가 되고 싶냐는 질문을 간혹 받는 편인데, 난 열심히 하는 배우라고 답한다. ‘열심히’가 아닌 ‘잘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씀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열심히’를 해야 잘할 수 있는 거니까. 난, 배우로서 어떤 역할이 올지를 모르기 때문에 나를 어떤 역할이 오더라도 잘 맞을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으려 한다. 운동도 일주일에 두세 번은 꼭 하려고 하고 있고.

Q. 겉으로만 봤을 때 당신은 멋있게 사는 사람으로만 보인다. 평소에 ‘사는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이정재:
그렇게 생각한다. 시간을 잘 쓰는 사람이 잘 사는 거라고. 그 시간을 일하는 데에 주로 쓸 것인지, 내 가족들과 더 많이 쓸 것인지 혹은 내 취미생활에 잘 쓸 것인지는 본인의 선택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는 다 행복 하고 싶어 한다. 그 시간을 어디다 써야 행복한지 본인은 알 거고. 결국은 그 시간을 잘 쓰는 사람이 잘 사는 거다.

Q. 요새는 아티스트 컴퍼니에 많은 시간을 쏟고 있을 텐데. 어떤가, 잘 성장하는 것 같나(웃음).
이정재:
성장이라…… 사실, 이런 질문 처음 받아봤다. 갑자기 두려움이 확 몰려온다(웃음). 주변에서 성원도 많이 해주고 이목도 있고 하니까 더 열심히 하게 되는 것 같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좋은 회사가 되고 싶다고 하기 보다는 좋은 모임이 되고 싶다. 사실은 연기자도 큰 범주에서는 아티스트다. 물론 극의 내용을 창작해내진 않지만 캐릭터를 창작해야하는 면은 분명히 있다. 그런 면에서 회사 이름에도 ‘아티스트’가 들어간 거고. 그런 사람들의 좋은 모임이면 괜찮지 않을까 싶다.

Q. 그럼 다시 배우로 돌아와 보자. ‘대립군’을 통해 관객들이 당신의 어떤 모습 봐줬으면 하나.
이정재:
“노력 좀 했네.” 그 정도면 난 감사드린다.

김예슬 기자 yeye@etoday.co.kr
저작권자 © 비즈엔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 보도자료 및 기사제보 press@bizenter.co.kr

실시간 관심기사

댓글

많이 본 기사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