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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後] ‘브이아이피’, 영화라는 악마를 보았다

[비즈엔터 라효진 기자]* 이 기사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사진=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사진=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박훈정 감독의 신작 ‘브이아이피’가 공개됐습니다. 개봉 후 줄곧 박스오피스 1위를 지키고 있는 데다가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은 것 치고는 성적도 나쁘지 않은 편입니다. 역시 ‘신세계’의 박훈정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던 때문이겠지요. 게다가 장동건, 김명민, 이종석, 박희순 등 출연진 역시 예비 관객들의 구미를 당기게 합니다.

그런데 ‘브이아이피’를 보고 나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칭찬보다 비판이 거셉니다. 만듦새를 지적하는 이들도 적지 않지만, 특히 불쾌감을 표현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먼저 영화가 만들어진 모양을 봅시다. 언급했듯 박훈정 감독의 이름을 하나의 브랜드로 만든 작품이 ‘신세계’임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브이아이피’를 보러 가는 관객들이 ‘신세계’를 기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듯합니다.

감독과 배우들이 입을 모아 말했듯 ‘브이아이피’는 ‘신세계’와 다른 스타일을 표방합니다. ‘신세계’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이야기 위에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풀어 놓아 생동케 했다면 ‘브이아이피’는 기획 귀순이라는 소재 자체의 힘에 기대는 작품이죠.

지속적으로 사건 중심의 영화임을 강조했다면 적어도 이야기가 유기적으로 연결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브이아이피’는 내러티브 자체를 분절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포함한 5개의 챕터로 영화를 구성했지만 갈라 놓은 이야기가 한 줄기로 모이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립니다. ‘브이아이피’에 대한 정보가 없는 관객에게는 갈피를 잡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수도 있겠네요.

(사진=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사진=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나눠진 챕터처럼 주요 캐릭터들이 좀처럼 한 장면에서 만나지 않는다는 점도 결과적으로는 영화의 완성도를 해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건조함과 서늘함을 유지하기에는 캐릭터들이 몹시 과장돼 있습니다. 때문에 사건보다 캐릭터에 눈길이 갑니다. 이야기를 따라가는 방식도 감독의 의도와는 다르게 캐릭터를 좇게 돼 버리고 말죠. 게다가 챕터가 사건별로 나눠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개는 캐릭터의 사연을 풀어가며 진행되는 것이 함정이라면 함정입니다.

캐릭터가 어떻게 강하냐고요? 우선 박재혁(장동건 분)과 채이도(김명민 분), 리대범(박희순 분)은 결코 만나고 싶지 않은 상사입니다. 속마음이 어떻든 말 끝마다 욕설에 짜증을 내니 부하 직원들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될 지경입니다. 심지어 채이도는 폭력까지 서슴 없이 휘두르죠. 아무리 공권력에 대한 불신이 팽배하다고 해도 이들을 조직폭력배처럼 그리는 천편일률적 묘사는 이제 그만 할 때도 되지 않았나요. 김광일(이종석 분)이 처음 잡혔을 때 박재혁과 채이도를 필두로 뒤에 늘어선 부하들이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는 모습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장성택의 오른팔이자 평안도 당 서기 김모술의 아들인 김광일은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입니다. 이 인물을 그리는 상상력은 더욱 빈곤합니다. 하얗고 깨끗한 이미지의 이종석이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소설책을 넘깁니다. 그러다가 여자 그림자만 봐도 살의(殺意)를 드러내며 비릿한 미소를 짓습니다. 그와 얼굴만 다른 살인마 캐릭터들이 파노라마로 스쳐 지나갑니다. 그저 영화의 수위를 높이는 도구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평면적입니다.

(사진=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사진=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그래도 소재의 힘은 생각보다 강했습니다. 여느 고위층의 비리를 다룬 작품들과 다를 바 없는 전개 속에서도 실제 세계 정세를 응용한 설정이 살아남았습니다. 다만 채이도는 잡고, 경찰 간부는 매번 같은 이유로 그를 놓아 주라고 하는 대목이 반복되면서 늘어지는 느낌이 남긴 했지만요.

자, 이제 많은 이들이 공분했던 김광일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영화 초반 길에서 여고생을 발견한 김광일 무리의 눈빛 교환에서 설마하는 느낌이 듭니다. 설마가 사람을 잡아 이들은 여고생을 납치합니다. 강간도 모자라 별의별 몹쓸 짓을 하며 괴로워 하는 여자를 촬영합니다. 피칠갑을 한 여자가 이제 그만 죽여 달라는 표정을 할 때쯤 김광일이 이어폰과 책을 내려 놓고 다가옵니다. 그리고 낚싯줄로 여자의 목을 조릅니다. 그리고 이 납치 및 강간 및 살인 장면은 끔찍할 만큼 길고, 자세합니다. 스너프 필름을 스크린으로 보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영화 속에서도 스너프 필름으로 김광일의 덜미를 잡으니, 이걸 의도라고 해야 할까요.

(사진=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사진=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브이아이피’에서 설마는 사람을 두 번 잡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웃다가 참 많이도 얻어 맞은 김광일이 단 한 번 폭발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채이도한테 ‘고자’라고 불리는 부분이죠. 설마 했던 ‘고개 숙인 남자’의 패악이 김광일의 사이코패스 설정에 가미됐습니다. 이번에도 억압된 남성의 리비도가 여성을 희생시켰습니다. ‘네가 너무 예뻐서’, ‘네가 너무 야한 옷을 입어서’라며 강간을 합리화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성불구의 책임까지 여성에게 전가합니다. 병원행이라는 즉각적 해결책을 놔두고 여성을 성폭행하고 죽입니다. 캐릭터는 망가지고 불쾌감은 배가됐습니다.

‘남자 영화’라는 설명이 면죄부가 될 수 있을까요. 사실 남자 영화라 불리는 작품이 아니더라도 여성의 신체를 스펙터클화한다든가 여성 캐릭터를 도구화하는 경우가 낯설지는 않습니다. 아직은 관습적으로 남아 있는 설정입니다. 그러나 ‘브이아이피’는 도를 넘었습니다. 김광일이라는 캐릭터보다는 영화 자체에서 느껴지는 악마성이 더 큽니다. 비판은 ‘브이아이피’가 감내해야 할 몫입니다.

라효진 기자 thebestsurplus@e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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