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모 칼럼니스트]
미스터리 스릴러 ‘서치’(아니쉬 차간티 감독)가 개봉 2주 만에 200만여 명의 관객을 모아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대기업의 장삿속으로 점철된 국내 배급 시스템에서 미국 독립영화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수준의 관객몰이를 한다는 게 매우 이례적이기에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꽤 진중하다.
그 장르에 흔히 수반되는 잔인한 고어적 비주얼이나 질펀한 성적 코드라곤 찾아볼 수 없다. 갑자기 사라진 여고생 딸을 찾는 아버지의 애끓는 부성애가 중심을 이루면서 훼손된 현대 가족의 구성이 아이들에게 어떤 나쁜 영향을 끼치는지 새삼스러운 깨우침을 준다는 점에서 더욱 전율케 하는 듯하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다. ‘나도 나를 잘 모르는데 네가 날 어찌 알랴’라는 말도 있다. 그만큼 인간이란 존재는 파악과 규정이 어렵다. 그러므로 대다수 부모의 자식을 제일 잘 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이 영화가 진행되면서 진실이 드러남으로써 공포가 배가되는 배경이다.
이 영화는 최초로 모든 스크린이 PC와 스마트폰 화면으로 대체된다. 그 점이 스마트 환경에 익숙한 청소년 등 젊은이들을 사로잡은 것으로 분석된다. 물론 그 한 가지만으론 흥행의 설명이 안 된다. 그게 가장 크다면 굳이 극장에 가서 볼 필요 없이 ‘스마트하게’ 서비스 받는 게 더 편하고 싸기 때문이다.
전술했다시피 영화는 붕괴된 현대 가정의 뒤안길을 그린다. 부모의 착각을 기초로 근친상간과 마약 등 흔하지만 옳지 않은 다양한 일탈에 부모의 자식을 향한 어긋난 사랑이 덧씌워진다. 그중 진실인 것도 있고 미스터리를 위한 맥거핀도 있지만 결국 결과가 충격적이라 크게 어필한 듯하다.
이렇듯 무너진 가족의 체계와 그로 인해 손실된 아이의 행복에 대한 사회문제는 심각하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여고생이 초등학생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하는 뉴스 등이 심심찮게 등장하는 이유에 대한 진지한 국가적, 사회적 고민이 필요한 이유다. 왜 아이들이 범죄를 저지르고, 그에 노출되는지.
‘서치’와 함께 ‘살아남은 아이’(신동석 감독)와 ‘죄 많은 소녀’(김의석 감독)가 동시에 극장에 내걸린 건 공교롭지만 이런 분위기가 반영된 결과다. 두 영화는 ‘서치’의 흥행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한국 영화의 다양성의 가능성과 확장성에 대한 희망이란 측면에선 그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고 있다.
그래서 한국 영화사에 기록될 확률은 매우 높고, 그만큼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매우 강렬하다. 공통적인 소재는 ‘왕따’다. 최근 피해 학생 부모가 심부름센터의 ‘삼촌’을 통해 가해 학생에게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더 이상의 가해를 막으려는 사례가 빈번해지고 있다는 뉴스가 사회면을 장식했다.
법적인 잣대로는 불법임이 확실한 건 맞지만 ‘왕따’ 혹은 학원폭력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된 지 한참 됐지만 오히려 더 악화됐다는 반증이다. 시쳇말로 ‘오죽했으면 그랬겠냐’는 댓글이 쇄도하는 건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살아남은 아이’의 주제는 죄책감으로부터의 해방과 치유의 용서다.
아무도 모르고 자신만 아는 비밀. 그건 진실을 왜곡한 자신의 거짓말과 그게 존재하는 원인이 된 범죄다. 그런데 그 죄인은 왜 소수의 친구를 ‘왕따’하고 거친 폭력을 행사했을까? 그의 어머니는 오래전 가출했고, 아버지는 새 여자가 생기자마자 ‘너 혼자 잘 살라’며 어린 아들을 버렸다.
그걸 이유라고 핑계 대는 건 비겁하지만 정서와 심리에 크게 악영향이 됐고, 그로 인해 아직 미완성인 인격이 어그러진 건 부인할 수 없다. ‘죄 많은 소녀’는 반어법이다. 사회와 군중이 무고한 한 소녀를 죄인으로 만들고, 억울함을 해결할 방법이 없는 소녀는 최악의 선택으로 엄청난 복수를 한다.
대부분의 어른(부모)이 아이(자식)에 대한 모든 현상과 형상에 자신의 잣대를 들이대는 ‘이기적 편향’의 성향을 보이는 시작부터 잘못됐다. 신중하게 아이의 생각과 가치관을 고려하지 않고 어른만의 기준으로 내린 결과를 강요할 때 아이의 불완전한 인성과 인격은 상처를 입거나 왜곡된 정보를 기억한다.
‘이게 다 너 잘되라고 하는 거야’라는 어른의 ‘가스등 효과’는 결국 독재적 억압이고 일방적 폭력이다. 잘못된 믿음의 ‘망상증’을 가진 어른도 많다. 조숙하거나 영악한 청소년이라면 그 위기를 잘 극복하겠지만 적지 않은 아이는 그 피해에 고스란히 노출돼 ‘반사회적 인격 장애’를 갖게 된다.
그런 아이의 ‘사회 불안 장애’나 ‘경계선 성격 장애’는 ‘적응기제’를 요구하기 마련인데 사회적 불만이 충만할 땐 주로 ‘공격기제’가 앞장서기 마련이다. 바로 학원폭력 가해자다. 그로 인한 피해자는 어른(사회)이 구해줘야 하지만 뉴스에서 보듯 무관심하거나(이기적인 사회), 무지하다(부모).
그런 나날이 반복되면 피해자가 꺼내들 수 있는 방어기제는 함무라비 법전식의 ‘눈-눈, 이-이’의 ‘공격기제’거나 그럴 용기가 없다면 극단적 선택을 하는 ‘도피기제’밖에 히든카드가 없다. 올바른 건 적당한 ‘방어기제’인데 그런 걸 발휘하기엔 모든 조건이 열악하고 경험도 부족하다.
‘트레드밀 위의 행복’이란 심리 이론이 있다. 쉽게 풀자면 ‘로또 1등 당첨자의 비극’이다. 사람의 행복은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것. 우리 청소년은 시험에 대한 압박이 엄청나다. 우리 교육은 토론이란 게 없이 일방적인 주입식이다. 유대인의 ‘마따 호쉐프(네 의견은 뭐니?)’가 없다.
지혜가 아닌 학식만, 사유가 아닌 복종만 강요되는 교육과, 정의로운 가치관과 고차원적 행복 추구가 아닌 돈만 존중하는, ‘공공선’이 아닌 사리사욕을 조장하는 이 사회에 고민이 절실한 이유다. 각기 다른 제작사를 통해 동시에 나온 세 영화의 메시지가 유사하다는 건 그만큼 위기 상황이란 얘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