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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규 대기자의 '스타 메모리'] '가객' 故 김현식과의 추억②

[비즈엔터 홍성규 기자]

▲故 김현식(사진제공=슈퍼맨C&M)
▲故 김현식(사진제공=슈퍼맨C&M)

①에서 계속

동아기획 김영 사장을 통해 김현식의 인터뷰 요청을 했는데, 당연히 "회사 차원에서는 좋은데 당사자가 인터뷰 안 할 것 같다. 더구나 라이프 스토리 연재라니 힘들 것 같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되든 안 되든 본인과 직접 부딪히는 수밖에 없었다. 매니저에게 부탁해 김현식의 집 주소를 알아냈다. 매니저는 말렸다, "집으로 찾아가셔도 안 만나려고 할 텐데"라면서.

그다음 날 오후 나는 후배와 함께 무작정 김현식이 사는 동부이촌동으로 향했다. 김현식의 자택은 아파트 1층에 있었다. 주소를 확인하고, 초인종을 누르려고 하는데, 갑자기 현관문이 벌컥 열리며 김현식과 그의 아내가 나왔다. 김현식이 힐끗 쳐다봤다. 한 번 본 적이 있어서인지 내가 누군지는 아는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저~"하고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당신 나한테 한번 맞아야지"하고는 아내와 같이 주차장으로 갔다. 아내도 화난 표정이었는데, 김현식을 남겨 놓고 차를 타고 가버렸다.

김현식은 다시 나를 바라보고는 주먹을 불끈 쥐고 정말 한 대 때릴 기세였다. 그런데 주먹을 쥔 김현식의 팔뚝이 링거를 많이 맞아서인지 여기저기가 잔뜩 멍들어 있었다. 무척 안되어 보였다.

나는 "마음대로 기사 써서 미안하다. 건강 회복을 빈다"라며 일단 사과했고, 때릴 테면 때리라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유, 그냥"이라며 몇 차례 주먹을 허공에 날리던 김현식은 집까지 찾아온 용기가 가상하니 일단 집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그리고는 앉자마자 "뭐하러 왔냐. 인터뷰는 안 한다"라고 손을 내저었다. 나는 미리 준비해간 대사(?)를 읊기 시작했다. 김현식의 음악성에 대한 찬사 일색이었다. 사실 그 말은 꾸며댄 말이 아니어서 진정성이 있었다, 후배 기자도 옆에서 계속 추임새를 넣었다.

한참 후에 김현식이 말문을 열었다. "그러면 가서 술 좀 사와."

의외의 말이었다. "소주 사 오면 술 한잔하면서 이야기할게"였다. 나는 "몸도 안 좋은데 술 마시면 안 된다"라고 했다. 김현식은 "그냥 몇 잔 먹는 거 상관없다. 안 그러면 입을 안 열겠다. 돌아가라"라고 했다.

나와 후배 기자는 하는 수 없이 아파트 근처 슈퍼마켓으로 갔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김현식 집에서 온 거 아니냐"라면서 소주를 팔지 않았다. 아니라고 해도 가게 주인들이 다 눈치를 채는 것 같았다. 오죽했으면 그랬겠나 싶다.

결국, 빈손으로 김현식 집으로 돌아왔고 우리는 아이디어를 하나 냈다. 가능하면 멀리 떨어진 중국 음식점에 음식 시키면서, 고량주를 함께 주문하자는 것이었다. 김현식도 "역시 기자들이라 머리 좋네"라며 동의했다. 중국집에서 술과 함께 팔보채, 탕수육, 양장피 등 기름진 안주들이 도착했다.

나는 김현식에게 "나는 원래 기자 되기 전부터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대학 다닐 때 밴드도 했다. 우리 친형도 치과의사인데, 들국화와 같이 밴드 활동을 벌였다"라고 약간은 과대 포장해서 내 소개를 했다. '당신이 거부하는 기자들이지만, 남 좀 다르다. 당신 편이니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자'라는 의도였다.

김현식의 표정이 차츰 너그러워지면서 "치과 의사하며 기타를 친다는 당신 형도 본 적 있는 것 같다. 당신들은 좋은 사람들인 것 같다"라고 했다.

그리고는 하나둘씩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비장의 무기라며 우드스톡 페스티벌(1969년 8월 15일부터 18일까지 4일간 미국 뉴욕주에서 있었던 전설적인 록 페스티벌) 비디오를 꺼내 틀었다.

"아무한테 안 보여주는 비디오다. 우리 편에게만 보여 준다"라고 했다. 김현식은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빙빙 휘둘러 대며, 요절한 전설의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가 기타를 부수는 장면에 감격했고, 조 카커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나는 나중에 꼭 우드스톡 같은 세계적 음악 페스티벌 무대에 서고 싶다"라고 했다. 나와 후배는 "당연히 그렇게 될 것"이라고 박수를 쳤다.

그런 가운데 갑자기 현관문이 열리며, 외출했던 그의 아내가 들이닥쳤다. 간경화 환자인 남편이 기자들과 함께 술판을 벌이고 있는 광경에 아내는 입이 딱 벌어졌다. 당황한 우리는 "죄송합니다. 술은 우리만 먹고 있습니다"라고 둘러댔다.

김현식은 불콰한 얼굴로 "걱정하지 마. 난 조금만 마셨어. 알고 보니 좋은 사람들이야"라고 했다. 아내는 한참 우리를 쏘아보더니 주방에서 과일을 깎고 안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안주라도 잘 먹어야지요"라고 했다.

김현식은 대화를 계속하다가, 피곤한지 잠이 들었다. 우리는 그렇게 김현식과의 첫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섰다. 그의 아내가 문밖까지 따라 나오면서 눈물까지 지으며 많이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마음이 아팠다.

이후 후배 기자는 김현식 라이프 스토리를 잘 연재해나갔다. 물론 몸도 안 좋은 데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그의 인터뷰를 하며, 엄청 고생했다.

김현식은 상태가 안 좋아지면 동부이촌동 집 근처 병원에 가끔 입원하곤 했는데, 문병도 한번 갔었다. 그는 병상에서도 링거를 맞으며 통기타를 치고 있었다.

"국악과 팝을 결합한 가요를 부르고 싶다"라고 했다. 그의 말은 현실이 됐다. 그의 유작 앨범 상당수는 국악적인 느낌이 많다.

그 후 김현식은 건강이 안 좋은 가운데서도 우리에게 신뢰감을 많이 보여, 우리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고마웠다. 김현식이 건강을 회복해서, 기자를 떠나 좋은 친구가 되고 싶은 마음이었다.

당시 일간스포츠는 '렛츠 고 팝스'라는 전국 투어 콘서트를 기획해 진행 중이었는데, 부산 KBS홀에서 열렸던 '비 오는 날 수채화' 콘서트 현장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다행히 김현식은 그 당시 치료도 잘 받고 술을 멀리해서 어느 정도 건강이 회복된 모습이었다. 무대에서 리허설 하던 김현식은 나를 보자 습관처럼 "당신은 후배한테 인터뷰 미뤄놓고 나타나지도 않느냐. 나한테 몇 대 맞아야지"하고는 또 때리려고 시늉했다.

나는 스태프들을 위해 미리 준비해간 캔맥주 한 박스를 건네주며, "술로 때려 달라"라고 했다. 김현식은 "역시 당신은 좋은 기자야"하며 엄지를 추켜세웠다. 함께 공연하던 강인원이 "이 인간은 술만 사주면 다 좋은 사람이야"라고 놀려 댔다.

그해 가을 김현식은 할 수 있는 건 다하겠다며 후속 울산 '렛츠 고 팝스' 전국 투어 콘서트에도 출연하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한 무대라도 더 서겠다는 마지막 열망이었다.

울산 공연이 있던 날 아침. 김현식 일행은 울산으로 가기 위해 김포공항으로 가기로 되어있었다. 김현식에 대해 불안했던 나는 후배 기자에게 취재를 겸해 함께 동행하라고 했다.

그런데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 "선배, 큰일 났습니다. 현식이 형이 좀 힘들어해서 공항 근처 목욕탕에 와서 잠시 쉬고 있는데 어찌 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는 다시 다급한 전화가 왔다.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요. 지금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김현식은 결국 울산 콘서트 무대에 서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모르는 사이에 병세가 다시 악화되고 있었다.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김현식 집으로 자주 전화를 했다. 어머니가 전화를 자주 받으셨다. "우리 현식이 착한 아이예요. 잘 대해주셔서 감사해요"하고 늘 인사를 하셨다.

나는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전화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는 어느 날 김현식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기자님, 우리 현식이 방금 하늘나라 갔어요"라고 하셨다. 나는 "잘 알겠습니다. 찾아뵙겠습니다"하고는 떨리는 손으로 부고 기사를 써내려갔다.

김현식은 당시 가요계에 허스키 보이스의 매력에 대해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김현식 초기의 '사랑했어요'를 들어보면, 그는 원래 미성이었다. 그런데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내 사랑 내 곁에'를 들어보면 짙은 허스키의 음색을 넘어, 목소리가 심하게 갈라지고 몇 부분은 음 이탈 현상까지도 나타난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간경화 말기로 정상적이지 않은 최악의 몸 상태에서 나온 목소리였다. 그런데도 수많은 팬들은 이 노래를 사랑한다.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듯한 김현식의 열정과 진정성 때문이다.

그즈음 가수들은 미성이라도 목을 쉬게 해서 허스키한 음색으로 노래했다. 허스키 보이스가 아니면 가수도 아니었다.

나도 김현식과의 추억 때문에 지금도 김현식 노래를 가장 많이 즐겨 부른다. 언젠가 KBS 출입기자 송년회에서 '기자 가요제'를 열었는데, '내 사랑 내 곁에'를 불렀다. 나는 이 노래로 그날 대상을 받았다.

김현식은 세상을 떠나고 1년 후인 1991년 '내 사랑 내 곁에'로 일간스포츠 골든디스크상을 수상했다. 아들 완제가 고인 대신 그 상을 받으며, 보는 이들의 가슴을 울렸다.

그런데 이날 해프닝이 있었다. 당시 대상 축하공연으로 노래를 부르기로 한 가수가 연락도 없이 펑크를 냈다. 진행을 맡았던 한국일보 사업국과 생방송 연출을 맡았던 MBC 제작팀에 비상이 걸렸다. 섭외를 맡았던 나한테 화살이 돌아왔다. 매니저도 갑자기 연락이 안된다며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엄청 당황해했다.

대신 자고 있던 장필순을 깨워서 급히 모셔 왔다. 리허설도 없이 노래했다. 다행히 장필순은 너무나 감동적으로 잘 불렀다. 언더그라운드 실력파 가수 장필순의 매력에 감탄한 날이기도 했다.

지난 2013년에는 동아기획 김영 사장이 보관해오던 미발표곡 9곡 포함 21곡을 담은 추모 음반 '김현식 2013년 10월'이 발매됐다.

나는 김현식과의 생전 인연으로 이 음반의 홍보를 맡아 진행했고, 오랜만에 김영 사장을 만나, 김현식에 대한 추억을 나눴다.

홍성규 기자 skhong@bizent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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