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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규 대기자의 '스타 메모리'] 강인원, 화가의 꿈 접고 미술에 대한 열정을 음악으로 승화②

[비즈엔터 홍성규 기자]

▲가수 강인원
▲가수 강인원

①에서 계속

강인원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생사의 기로에 섰다. 1956년 1월 6일(네이버 등재) 서울에서 열 달을 다 채우지 못하고, 팔삭둥이로 태어나 몸이 약했다. 부모님이 어찌 될지 몰라, 출생신고를 2년 넘게 미뤘다. 그렇다 보니 주민등록증 나이는 1959년생으로 되어있다. 나중에 가수들 사이에서 형인지, 동생인지 오해를 사기도 했다.

강인원의 어린 시절 꿈은 화가였다. 가수가 되겠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미술에 재질이 있어서 5살 때부터 그림 속에서 살았다. 연필화, 수채화, 유화 등 다양하게 그렸는데, 그의 방은 늘 그림으로 가득했고, 중학교 때는 아예 서울예술고등학교 진학을 목표를 정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강인원의 그림을 보고는 '겨울에 왜 단풍을 그리냐'라고 갸우뚱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안과에서 검사를 받게 되고, 결국 '적록 색약' 판정을 받는다. 청천벽력이었다. 모든 분야에 개방적인 요즘은 큰 상관이 없지만, 고지식하던 당시에는 미술전공 희망자에게 색약은 결정적인 약점이었던 것 같다. 결국 강인원은 고이 키워오던 화가의 꿈을 접어야 했다.

그러나 어린 가슴에 절망과 좌절감이 깊었다. 예술고등학교가 아닌 인문 고등학교로 진학했지만, 일반 학과공부에는 좀처럼 관심이 가지 않았다. 학교를 가지 않고, 며칠씩 강원도 산과 바다를 헤매다니다가 돌아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강인원은 우연히 '참새를 태운 잠수함'이라는 창작 포크 모임에 갔다. 이것이 전환점이 됐다. 그때까지 여러 사람 앞에서 노래한 적이 전혀 없었던 강인원이었지만, 그 모임의 좌장이 노래를 불러보라 시켜 보고는, "어? 잘 하는데"하며 계속 모임에 나오라고 했다.

얼마 후에는 이 모임 추천으로 동숭동 대학로 성베다교회에서 열린 음악 오디션에 나가봤는데, 이날이 강인원이 가수가 되는 결정적 계기였다.

그는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불렀는데, 고음의 맑은 미성이 환상적으로 터져 나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노래 불러서 큰 박수를 받은 것 같았다. 가수가 되겠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종로, 무교동 쪽에 있던 라이브 카페에서 찾는 연락들이 많아졌다.

강인원은 당시 핫 플레이스였던 종로와 명륜동 다운타운 라이브 카페를 정신없이 오가며 겹치기 출연을 했다. 사이먼 가펑클, 존 덴버, 짐 크로치, 브레드의 소프트한 팝을 주로 노래해 '순수의 미'로 꽤 인기를 끌었다.

음악하는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됐고, 우연히 전인권, 이주원, 나동민을 만나서 함께 친분을 나누다가, 1년 후인 1979년 그룹 '따로 또 같이'를 결성한다. 이것이 강인원의 공식 가수 데뷔이다.

'따로 또 같이'의 데뷔곡 '맴도는 얼굴'은 해외 팝과 트로트 가요만이 존재했던 70년대 말 한국 대중음악 수준을 한 차원 높이는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2'
▲'비 오는 날의 수채화2'

나는 대학 시절, 치과대학 다니며 스쿨 밴드를 하던 우리 형(홍철규)에게 '따로 또 같이' 이야기를 처음 전해 듣고, 그 가운데 강인원이라는 뮤지션의 존재를 듣게 됐다. 당시 우리 형은 실력 있는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을 많이 알고 있었는데, '따로 또 같이'도 그중에 하나였다. (우리 형은 훗날 대학가요제에 입상했고, 전인권과는 같이 활동도 했다.)

강인원은 1985년 '제가 먼저 사랑할래요'로 솔로 데뷔했다. 이후 본인의 가수 활동보다는 민해경 기획사의 대표 프로듀서로서 '그대는 인형처럼 웃고 있지만', '그대 모습은 장미' 등으로 실력을 과시했다. 그러다가 강인원 본인이 직접 푸른기획을 설립한 이후에는 사업가로서도 본격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1990년 '비오는 날 수채화' 음반이 나올 무렵, 당대 최고의 싱어송라이터 강인원과 인터뷰를 위해 자주 만나게 됐다. 기존의 제도권 가수보다는 언더그라운드 실력파 가수들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강인원을 통해 김현식, 권인하, 신형원 등과도 만났다. 언더그라운드의 메카였던 동아기획과 언더가수들의 대부 조동진이 설립한 '하나 음악' 사람들을 열심히 취재했다.

당시에는 그저 피상적으로 '비오는 날 수채화'의 대박 성공에 대해서만 취재해서 기사를 썼다. 그런데 그 속에 내재되어있던 흑역사는 사실 수십 년이 지난 최근 알게 됐다.

'비오는 날 수채화'는 가만 들여다보면, 참 알쏭달쏭한 제목과 노랫말이다. 비오는 날 비 맞으며 수채화로 그린 그림이 어떻게 되겠는가. 아무리 그려도 빗물에 씻겨 다 지워지는 그림처럼 결국 허무한 인생 같다는 생각이다.

당시 강인원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가사에 반영된 것 같다. 강인원이 '비오는 날 수채화'를 접하기 직전, 친구처럼 지내던 음반제작자의 부탁으로 모 가수의 프로듀싱을 맡아 하게 되는데, 당초 약속을 지키지 않아, 결국 법적 소송까지 가는 사건을 겪는다. 이때의 실망감과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 충격으로 두문불출하고 있는데, 곽재용 감독으로부터 '비오는 날 수채화'라는 영화의 OST작업을 해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2
▲비 오는 날의 수채화2

당시 마음 상태가 혼란스러워서인지 음반 작업도 원활하지 않았다. 강인원이 작사, 작곡, 프로듀싱을 맡고, 권인하와 김현식의 듀엣곡으로 기획했는데, 김현식의 목소리 상태가 너무 거칠고 건강 상태가 안 좋아서, 하는 수 없이 강인원이 김현식 대신 일부 소절을 불렀다. (김현식은 1990년 11월 간질환으로 세상을 떠난다.)

멜로디 라인은 나왔는데, 녹음 당일까지 노래 가사가 나오지 않아서, 벽제 지구레코드 녹음실까지 가서 '가이드'로 생각하고, 즉석에서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린 노랫말이 그대로 가사가 됐다. 당시 공허한 감정이 오히려 진정성 있게 표출된 게 아닌가 싶다.

강인원은 '비오는 날 수채화'로 명성을 얻었지만, 당시 기획사와의 갈등으로 실익은 별로 없었다.

강인원은 이듬해 음반 제작사 '푸른기획'을 직접 설립하고, 제작자로 나선다. 그래서 전작 앨범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기획한 첫 앨범이 '비오는 날 수채화 2'였다.

이 작품은 당시 미스코리아 선으로 당선되어, 예능 프로 MC 등으로 급부상하던 고현정이 참여해 화제가 됐다. 꽤 완성도가 있었던 앨범이었다. 그런데 그때에도 마가 끼었다. 당시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모 제작자가 방송관계자들에게 부정적인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바람에 방송 PR이 하나도 되지 않았다.

'비오는 날 수채화2'가 또다시 세상에 대한 좌절감을 안긴 것이다. 강인원은 남을 밟아야 일어서는 약육강식, 적자생존 같은 삭막한 환경에 환멸을 느껴, 모든 걸 접고 연예계에서 떠날 생각까지 했다.

그가 다시 활동을 재개한 것은 드라마 OST였다. 강인원의 재능을 주시하던 드라마 감독이 연락이 와서 '금잔화', '모래위의 욕망', '바람의 아들' 등 OST를 작사, 작곡, 프로듀싱하며 다시 한번 성가를 올렸다. 이후 2000년대 초중반에는 대학 실용음악과 교수로 재직했다.

이제 '비오는 날 수채화 3'프로젝트는 강인원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종합 플랫폼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여러 번의 좌절이 있었지만, '일사 각오'로 임하는 이번에는 성공할 것으로 믿는다.

세상에는 '성공과 실패'가 있지만, 믿음의 사람에게는 '성공과 배움'이 있다. 강인원은 수십 년간 이어온 작사, 작곡, 편곡자의 재능과 어린 시절 포기했던 그림에 대한 열정을 다시 살려 음악과 미술의 컨버전스를 구현해 보려 한다.

강인원은 방학 때마다 만나는 늦둥이 아들에게,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려주며 오랫동안 잊혔던 미술에 대한 열정과 솜씨가 다시 살아나고 있음을 느낀다.

그가 가수가 된 결정적 계기가 된 노래가 '어메이징 그레이스'였다고 한다. 다시 한번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임재하기를 기원한다.

홍성규 기자 skhong@bizent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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