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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웅의 아무말이나] '로건' 트럼프 시대의 슈퍼히어로가 살아가는 법

[허남웅 영화평론가]

슈퍼히어로물은 미국의 현실을 첨예하게 반영하는 장르다. 슈퍼히어로가 등장해 나쁜 놈들을 처단하고 세계평화를 실현하는 이야기는 ‘옛날 옛적’이 된 지 오래다. 세계 경찰을 자처하던 미국이 정의 구현과는 먼 나라가 된 까닭이다. 지금 미국 사회의 가장 큰 이슈는 트럼프의 반(反)이민 정책이다.

반이민 정책은 미국에 테러 위협을 가할 수 있는 무슬림 7개 국가를 지정해 미국 비자 발급과 입국을 최소 90일간 정지하고, 난민입국프로그램을 120일간 중단하도록 한 조치다. 미국이 이민자들에 의해 건설되고 다양성으로 지탱해온 것을 고려하면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충격적인 조치다.

지금 같은 분위기라면 슈퍼히어로의 위상 역시 변화할 수밖에 없다. 특히 다양성의 가치를 훼손하는 트럼프 시대에 가장 고통받을 슈퍼히어로라면 단연 ‘엑스맨’이다. 엑스맨 들은 능력이 남다르다는 이유로 돌연변이 취급을 받으며 주류에서 배척당한 채 소수자로서 힘든 삶을 유지하던 터다.

‘로건’은 그와 비슷한 배경을 바탕으로 울버린, 즉 로건(휴 잭맨)의 최후를 다룬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20년 후. 평생 건장하고 건강할 것만 같던 로건도 늙었다. 머리는 새치 천지이고 수염은 덥수룩한 게 날카로운 맛이 사라졌다. 얼굴에 주름살은 왜 또 그리 많은지 곧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는 몰골이다.

텍사스 엘 파소의 버려진 석유 창고에서 은신하던 로건은 돌연변이 소녀 로라(다프네 킨)를 만난다. 함께 숨어지내던 찰스 자비에(패트릭 스튜어트)는 그녀를 보호해야 한다며 로라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로건을 다그친다. 그렇게 옥신각신하던 중 정체불명의 집단이 찾아오면서 로건과 자비에와 로라는 이들을 피해 도주한다.

‘로건’의 이미지 중 나의 눈길을 끈 건 한국 팬들의 메시지로 구성한 포스터이었다. 이 포스터 속 로건은 에이브러햄 링컨을 닮았다. 실제로 극 중 로건이 도주 중 어느 흑인 가족 집에서 묵을 때 아들의 방에는 링컨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은 남북전쟁을 통해 흑인 노예를 해방한 것으로 유명하다. 로건 또한, ‘엑스맨’ 시리즈에서 자비에 교수를 도와 주류 사회에서 버림받고 방황하는 소수자 돌연변이들이 엇나가지 않게 도움을 준 인물이었다. 로건은 링컨과 같은 영웅적 존재인 셈이다.

스포일러를 밝히자면, 로라는 엑스맨 돌연변이의 DNA를 활용해 아이들을 인간병기로 만드는 실험 중 탈출한 케이스다. 이 실험에 동원된 아이들은 아시아와 흑인과 스패니쉬 등 미국 사회에서 소수에 속하는 유색인종이 다수다. 실험을 주도하는 의사는 간호사에게 이들을 사람이 아닌 상품으로 취급하라며 주의를 줄 정도다. 남북전쟁 당시의 흑인 노예나 상품 취급을 받는 아이들이나 처지는 매한가지다.

▲국내 팬들의 메시지가 담긴 모자이크 포스터
▲국내 팬들의 메시지가 담긴 모자이크 포스터

로라를 비롯하여 실험실에서 탈출한 이들은 ‘에덴’으로 불리는 북쪽 산악 지역에서 캐나다 국경을 넘기 위해 대기 중인 상태다. 이들 중 한 명의 손에는 울버린 피규어가 들려 있다. 미국의 많은 어린이가 링컨의 전기를 읽고 대통령의 꿈을 키웠듯 에덴의 아이들은 엑스맨 코믹북과 피규어를 보며 울버린과 같은 영웅을 꿈꾼다. 미래의 엑스맨들에게 울버린은 코믹북에만 존재하는 캐릭터가 아닌 현실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물인 셈이다. 그러니까, ‘울버린’ 대신 ‘로건’이라는 인간적인 이름을 내세운 제목에는 현실 반영의 의도가 담겨 있다.

‘로건’에서 미국의 현실을 읽을 수 있는 중요한 기호는 텍사스 엘 파소다. 멕시코와 국경을 마주하는 이곳은 현재 세계의 관심이 쏠린 곳이다. 트럼프는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부터 미국과 멕시코 국경 사이에 장벽을 세우겠다고 공언해왔다. 미국으로 넘어오는 멕시코의 불법 이민자를 막겠다는 의도다. 더 크게는 이를 본보기 삼아 유색인종들이 위대한 백인 미국의 가치를 훼손하는 걸 방관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로건’이 그 많은 아이 중에서 멕시코 출신으로 보이는 로라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유를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요컨대, 로건의 역할은 링컨이 노예 해방을 이룬 것처럼 백인 일색인 실험 주체들로부터 억압받는 아이들을 해방하는 데 있다. 서부극의 상징적인 공간인 텍사스 엘 파소는 척박한 서부에 젖과 꿀이 흐르는 문명을 이뤘던 미국의 신화적인 공간이었다. 지금은 상품으로 부르는 실험용 아이들을 인간병기로 부리고 쓸모없어지면 폐기하는 디스토피아의 세계로 전락했다. 그 자신이 소수자의 설움을 경험했던 로건은 로라를 북쪽의 에덴으로 데려가 아이들을 한 데 규합, 캐나다로 넘어가 인간적인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

근데 로건의 처지가 말이 아니다. 자신 한 몸 건사하기 힘들 정도로 약해진 상태다. 곧, 죽을 운명에 처했다. 운전기사로 위장해 국경 사이를 넘나드는 사람들을 태워 나르는 그의 차는 검은 리무진이다. 꼭 운구차를 닮았다. 울버린의 트레이드마크인 흰 러닝셔츠와 진 대신 검은 양복과 넥타이를 착용한 모습은 죽음을 향해 천천히 나아가는 사신을 연상시킨다.

울버린과 같은 ‘다양한’ 슈퍼히어로들이 활약했던 시대는 이제 시효를 다했다. 백인이 아니고서 슈퍼히어로로 활약하기에 미국은 이제 안전한 곳이 아니다. 미국이 아닌 또 다른 ‘에덴’에서 소수자 슈퍼히어로들은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휴 잭맨의 울버린을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로건’은 징후적인 작품이다. 여전히 슈퍼히어로물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건재하고 DC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도전이 뜨거운 상황이다. 이와 별개로 ‘로건’ 이후 이어질 관련 작품만큼은 트럼프 시대에 다양성을 인정받기 위해 투쟁하는 소수자 슈퍼히어로의 사연을 다룰 가능성이 높다. 로라가 계속해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것으로 보이는 이 시리즈가 슈퍼히어로물의 새로운 시대를 선도할지 궁금해진다.

허남웅(영화평론가)/ edwoong@hanmail.net

허남웅 영화평론가 edwo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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