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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後] ‘여배우는 오늘도’, 연기하고 달리고 마신다

[비즈엔터 라효진 기자]

(사진=영화 ‘여배우는 오늘도’ 포스터)
(사진=영화 ‘여배우는 오늘도’ 포스터)

‘여배우’ 문소리는 오늘도 만취 상태다. 술에도 삶에도 취해 있다. 18년차 중견 여배우의 모습일 때도 자연인일 때도 인생이란 제정신으로는 버텨내기가 힘든 탓이다. 그럼에도 문소리는 연기하고, 달리고, 마신다. 삶은 그에게 괴로움을 줬지만, 괴로움을 이길 위로도 선물했기 때문이다.

문소리는 감독 데뷔작 ‘여배우는 오늘도’로 버텨내는 삶을 살아 온 스스로를 어루만지고, 보는 이들도 위로한다. 문소리 자신을 주연으로 등장시킨 이 영화는 실제 그가 겪은 에피소드들을 중심으로 엮은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실감난다.

‘감독’ 문소리의 단편 3부작을 71분의 장편으로 연결해 만든 이 영화에서 느껴지는 실감은 곧 공감으로 이어진다. 극 중 문소리가 ‘베니스의 여신’이라는 화장을 지운 민낯으로 가장 보통의 자신을 드러낸 덕이다.

먼저 1막에서는 ‘한국의 메릴 스트립’이라 불리며 트로피와 명성을 늘려 가던 그가 출산과 육아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영화 현장과 멀어졌을 때의 자존감 하락을 유쾌하게 그린다. 등산을 가서도 누가 알아볼라 치면 급하게 화장을 하고, 무례한 남자들도 웃어 넘겨야 하는 그는 ‘예쁘다’는 말에 집착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천하의 문소리가’라고 추어 올릴 지언정 조건 없이 예쁘다는 말은 해 주지 않는다.

문소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예쁘다는 칭찬을 듣지 못하면 존재감을 잃을 것 같은 두려움 속에 사는 여배우를 그렸다. 그래서 그는 카메라 앞이 아니더라도 황급히 민낯을 가리고, 조신한 척 연기를 하는 것이다. 동시에 여배우들을 그렇게 만든 사회에 따가운 일침도 가한다. “여배우랑 술 한 잔 하자” “하나도 안 고쳤죠? 자기 관리를 이렇게 안 하시나” 따위의 말을 주워 섬기는 남성 캐릭터들을 등장시키며 세태를 우회적으로 꼬집는다.

(사진=영화사 연두 제공)
(사진=영화사 연두 제공)

이어지는 2막에서는 문소리가 달린다. 여전히 민낯을 가릴 선글라스를 찾지 못해 신경질이 난 상태다. 괜히 TV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화도 낸다. 화려할 것만 같은 여배우의 일상과 마이너스 통장을 뚫고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는 주부의 생활, 그 간극은 스스로에게 더 크게 느껴질 터다. 후배들은 VIP 시사회에 참석하러 미용실을 찾았지만 문소리는 엄마가 다니는 치과 원장과 사진을 찍어 주기 위해 머리를 매만지고 전문가에게 화장을 받는다.

그래서 그는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거나,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며 달린다. 이 답답함의 해소법이 이해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소리는 한몸 진득히 희생(?)해 모두의 버티는 삶을 조명한다.

마지막 3막은 ‘마시는’ 문소리가 등장한다. 십수년 전 인연을 맺은 감독의 장례식장을 찾은 그는 정말 만나기 싫던 선배와 마주친다. 아무도 없는 상갓집에 처량히 앉아 자작을 하던 선배는 문소리를 불러 세워 근황토크를 시도한다. 못 이기는 척 자리한 문소리의 심기는 어김 없이 불편해졌다. 소주병을 연거푸 비우는 와중에 감독의 작품에 출연하기로 했다는 어린 배우가 나타나 이들 사이에 끼어 든다. 세 사람은 죽은 감독이 예술가냐, 아니냐로 열띤 토론을 나눈다. 아니, 토론이라기엔 그저 감정 섞인 말싸움이었지만.

세 사람이 상갓집에서 실컷 고인의 욕을 하고 있는 사이 감독의 아내가 나타나 젊은 배우의 머리채를 휘어 잡는다. 감독과의 불륜 사실을 들켰기 때문이었다. ‘세상 천지 별 일이 다 있다’는 감상만 남아도 좋았을 이 에피소드는 감독 문소리가 정말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를 전하며 끝을 맺는다. 감독이 생전에 찍어 둔 영상을 감독의 어린 아들과 함께 보며, 문소리는 문득 눈물을 쏟는다.

능력이 없어 평생 한 편의 작품 밖에 찍지 못했고, 막판에는 추문까지 남긴 사람이지만 그래도 영화가 남았다. 타인의 눈으로 바라 본 세상은 어떤 모양이든 누군가에게는 애틋한 위로다. 인생의 부침과 희로애락 사이에서, 영화란 예술은 사람을 보듬어 왔다. ‘여배우는 오늘도’ 연기하고, 달리고, 마시지만, 영화가 있기에 버틸 수 있었다고 감독 문소리는 힘주어 말한다.

전부 지어낸 이야기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완급 조절을 성취한 연출은 배우 아닌 감독으로서 그의 미래까지 기대하게 했다. 특히 ‘여배우는 오늘도’의 백미는 ‘말맛’이다. 애드리브 0.1% 수준의 대본은 놀랄 만큼 치밀하게 짜여져 계산되지 않은 웃음을 터져 나오게 만든다.

라효진 기자 thebestsurplus@e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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