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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모 칼럼] '버닝'이 그린 상실과 허구의 시대

[유진모 칼럼니스트]

(사진=파인하우스필름)
(사진=파인하우스필름)

세계 3대 영화제로 손꼽히는 칸, 베니스,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했거나 극찬을 받은 영화는 국내에서 흥행에 크게 성공하지 못한다는 공식은 ‘버닝’(이창동)에서도 성립됐지만 그 여운과 울림은 길고 크다. 이미 다수의 관객에게 외면당했지만 언론과 평단과 마니아들은 여전히 리뷰 중이다.

할리우드가 좋아하는 봉준호나 박찬욱과 차별화된, 3대 영화제가 유독 주목하는 홍상수와 김기덕이 도덕성과 성추행 의혹으로 이미 눈 밖에 난 상태에서 이창동이 거의 유일에 가까운, 혹은 그들을 뛰어넘는 작가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환갑을 넘긴 감독이 20~30대 젊은이에게 포커스를 맞춘 이유도 있을 것이다.

영화가 던지는 주제는 매우 명확하다. 나라는 세계의 중심에 있지만 정작 국가의 현재의 근간이자 미래의 리더인 젊은이들이 ‘N포세대’가 된 대한민국의 불균형을 상실과 거짓으로 규정한다. 도대체 진실은 뭔지, 행복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보람과 성취감은 있기나 한 건지에 대한 심오한 질문이다.

서울에서 택배 일을 하는 20대 중후반의 종수, 그의 집 경기도 파주의 옛 친구라는 길거리 댄서 해미, 해미와 아프리카에서 만난 30대 초중반의 재벌 2세 벤은 한국 젊은이들의 양극단인 동시에 평균율이다. 어머니는 가출했고 아버지는 구속된 종수와 신용카드 빚 때문에 가족에게 외면당해 후암동 원룸에 사는 해미는 유사한 처지지만 반포의 으리으리한 빌라에 사는 벤은 완전히 다른 계층이다.

‘하는 일이 노는 것’이라는 벤은 포르셰를 타고 다니고 유사한 상류층 사람들과 어울려 와인 파티를 즐기면서 우아한 생활을 향유한다. 하지만 정작 그가 가장 좋아하는 취미는 남몰래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 계속 바꿔가며 수많은 여자들을 사귀지만 사랑도, 결혼도 관심이 없다. 그냥 인생 자체가 소비다.

서민들이 보면 ‘있는 것들이 더해’라고 허전하거나 허무한 그의 인생관을 비난할지 모르지만 어쩌면 그는 타고났기에 더 외로울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목적의식이 있겠지만 그의 인생엔 목표가 없다. 다 갖고 태어났기에 뭘 얻고자 혹은 남의 것을 빼앗고자 할 이유가 없는 것.

이것도 상실이라면 상실이다. 갖췄기에 더 이상 추구할 게 없다는 아이러니. 익스트림은커녕 최소한의 액티비티도 없는 청춘은 청춘이 아니라는 것일까? 해미는 이 시대의 허구와 거짓이다. 배달을 하던 종수는 개업 상점 앞에서 춤을 추던 해미가 먼저 아는 척을 함으로써 옛 기억을 되살린다. 해미는 계속 옛 추억을 꺼내들지만 종수는 긴가민가 기억이 안 난다. 먼저 외모다.

해미는 “어릴 때 네가 나한테 못생겼다고 말했잖아”라며 성형수술을 했음을 암시하지만 이게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애매모호하다. 해미라는 존재 자체가 허구였을 수도 있다. 또 “우물에 빠진 날 네가 구해줬잖아”라고 하지만 종수는 기억이 안 나고 동네 이장 및 해미 엄마로부터 우물은 없었다는 답을 듣는다. 해미는 아프리카 여행을 떠나며 고양이를 돌봐달라고 부탁하지만 종수의 눈에는 당최 안 보인다.

해미의 실종은 거짓 혹은 허구의 절정이다. 종수는 벤을 강력하게 의심하지만 그 어떤 증거도 없고, 그럴 만한 정황도 발견하지 못한다. 행사 도우미라는 쉽지 않은 ‘알바’로 번 돈으로 부채 500만 원을 갚고 가족과 재회하는 게 아니라 아무렇지도 않게 아프리카 여행을 다녀온 해미의 성향으로 봤을 때 그녀의 돌발행동일 수도 있다.

종수는 해미를 사랑하지만 믿진 않는다. 오히려 연적으로서 적대적 관계인 벤에 대해 묘한 호기심과 연대감을 품는 듯하다. 그럼에도 그가 기댈 유일한 사람은 해미다. 어렸을 때 집을 나간 어머니가 오랜만에 연락해 큰 빚 때문에 곤경에 처했다고 하소연을 하자 선뜻 갚아주겠다고 하는 건 가족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무의식적인 리액션이다. 해미가 사라진 현재의 그에게 돈 몇 푼쯤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그만큼 그에게 해미는 존재의 이유다.

해미가 아프리카 여행을 다녀온 건 영화의 큰 메타포다. 인류의 발원지 아프리카. 그녀가 하고많은 데를 놔두고 치안이 불안한 아프리카를 선택한 건 이토록 지겹게 사는 삶, 혹은 탄생의 의미를 찾고자 했음이다. 그녀는 그냥 배고픈 리틀 헝거와 삶의 의미에 굶주린 그레이트 헝거를 거론했다. 그 헝거들의 춤을 재연한 것이나 홀연히 사라진 건 ‘우리는 누구고, 어디에서 왔으며, 삶이란 뭔가’라는 철학의 영원한 숙제의 답을 찾았을지도 모른다는 메타포가 아닐까? 영화 자체가 메타포긴 하다.

‘늙은 젊은이’ 이창동의 젊은이에 대한 애정은 데뷔작 ‘초록 물고기’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초록 물고기’에선 군대를 갓 제대한 막둥이의 소박한 꿈을 소재로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가족이 해체된 젊은이를, ‘박하사탕’에선 국가, 제도, 조직 때문에 청춘과 꿈과 희망을 빼앗긴 중년을 각각 그렸다면 ‘버닝’은 절박하지만 손에는 모래만 쥐어지는 빈자와 풍족하지만 허허로운 부자를 통해 상실과 허구의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의 니힐리즘에 ‘지포 라이터’를 들이댄다.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유진모 칼럼니스트 ybacchu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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