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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규 대기자의 '스타 메모리'] 故 김성재의 믿기지 않는 죽음과 영원히 남기고 싶은 그의 어린시절②

[비즈엔터 홍성규 기자]

▲故 김성재( 사진=이현도 인스타그램  )
▲故 김성재( 사진=이현도 인스타그램 )

①에서 계속

19일(일요일) 오후 5시가 되어, '생방송 TV가요 20(現 생방송 인기가요)'를 보기 위해 TV 앞에 앉았다. 마치 내가 가수가 되어 무대에 서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김성재의 컴백 무대를 소개하는 성우(이 분도 얼마 전 지병으로 별세했다)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무대는 시작됐다.

김성재와 댄스팀이 무대를 꽉 채웠다. 파격적인 의상만큼 랩과 율동이 폭발적이었다. 김성재의 포스를 볼 때 당분간 가요계를 싹쓸이할 것 같았다.

그동안 취약점으로 생각했던 가창력도 문제가 되어 보이지 않았다. 노래와 율동, 비주얼 모든 것의 합이 환상의 조화를 이뤘다.

성공적인 그랜드 오픈이었다. 이젠 김성재의 컴백 무대 성공 기사를 준비해야 했다.

방송 직후 매니저로부터 전화가 와서 김성재와 통화를 했다.

"방송 보셨지요. 어떠셨어요"하는 잔뜩 흥분된 김성재의 물음에 "너무 좋았지. 수고했다. 이제 매일 연락하고 매일 기사 써야 되겠네"하고 답했다.

“형님 너무 감사드립니다. 내일 또 연락드릴게요.”

이게 이 세상에서 김성재에게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매니저는 집으로 가지 않고, 홍은동 S호텔에 마련된 숙소에 가서 간단하게 데뷔 무대 성공의 자축파티를 열고, 쉬기로 했다고 전했다.

나는 내심 김성재 일행들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참았다. 기자가 가면 눈치 보느라 제대로 쉬지도 놀지도 못할 것 같아서였다.

▲故 김성재(사진=이현도 인스타그램)
▲故 김성재(사진=이현도 인스타그램)

그리고 운명의 그다음 날이 밝았다. 20일(월요일) 오전이었다. 나는 아침 일찍 출근해서, 오후 판에 나올 스트레이트면 기사(시의성 있는 사건 사고 기사나 단신)를 한창 쓰고 있었다.

그런데 듀스의 기획사 사장 김동구가 전화를 걸어왔다.

"형, 동군데요. 성재가 하늘나라로 갔어요."

나는 김동구가 너무 방송이 잘 되어서, 하늘로 날아 올라갈 것처럼 성재 기분이 좋다는 뜻으로 들었다. "아 그래. 방송 너무 좋았어"하고 찬사를 보냈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자연사래요."

나는 다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그런 농담하는 거 아니야."

김동구 사장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자다가 심장마비로 죽었대요. 저 지금 여의도 성모병원 장례식장에 와있습니다. 제일 먼저 연락드리는 겁니다. 오실 거죠. 경황이 없어서 나중에 전화 다시 드릴게요"라며 황망하게 전화를 끊었다.

이 사실을 편집국장에게 보고하니, 난리가 났다. 유명가수가 죽었다는 사실도 그렇지만, '김성재 컴백 단독 인터뷰' 기사가 오후 판에 인쇄가 다 되어 막 나오기로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요즘은 디지털 기사이기 때문에 필요하면 아무 때나 수정이나 삭제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지면 시대이기 때문에 이 사건은 큰 사고였다. 부랴부랴 윤전기를 중지시키고 기사를 들어내 다른 기사로 대체해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편집부의 누군가가 "'컴백 첫 인터뷰'를 '마지막 인터뷰'로 제목만 바꿔, 그대로 내보내면 어떠냐. 더 귀한 기사다. 역대급 기획 특종"이라고 했다. 데스크와 편집국장이 좋은 아이디어라며 그렇게 진행이 됐다. 충격적이고 슬픈 비보였지만, 신문사는 보도를 위해서는 참 잔인할 정도로 냉정할 때가 많다. 잔인한 '특종'이었다.

나는 타이핑하는 손이 떨리는 가운데서도 김성재의 사망 기사를 써서 올리고, 장례식장으로 달려갔다. 김성재 부고 기사는 그가 죽었다는 말 밖에 팩트가 없어 두세 줄 이상 쓸 말도 없었다.

여의도 성모병원 장례식장에는 어떻게 알고 왔는지 듀스의 팬들로 가득 차 있었고, "성재 오빠"를 연호하며 흐느끼고 있었다.

빈소로 급히 달려가 보니, 김동구 사장과 매니저들이 나를 맞았다. 모두들 얼이 빠져있는 듯했다. 사건의 경과를 물었지만, 그 누구도 입이 얼어붙은 듯 말을 못했다.

나중에 이현도가 급거 미국에서 귀국해 달려왔다. 큰 목소리로 대성통곡했다. 모두가 함께 울었다.

▲필자가 김성재의 유년시절에 대해 쓴 기사(사진=홍성규 대기자)
▲필자가 김성재의 유년시절에 대해 쓴 기사(사진=홍성규 대기자)

영원히 남기고 싶은 김성재의 어린시절

아마도 김성재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그의 가족 외에는 기자인 내가 가장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김성재는 5살 때 음악만 나오면 무조건 흔들어댔다고 했다. 한편으론 그 당시 유행했던 인기 포크 듀오 어니언즈의 '편지'를 기막히게 따라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지금은 대기업이 된 당시 공기업의 임원으로 영국지사장, 일본지사장을 지내셔서 그 가족들이 자연스럽게 해외 문물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김성재의 앞서가는 비주얼 감각이 이 시절부터 비롯된 것 같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고1까지는 일본에서 살았고, 일본인 학교에 다녔다. 이때 한국인이라고 괴롭히던 일본 아이들을 두들겨 패는 터프가이였고, 체육행사, 달리기, 높이뛰기, 멀리뛰기 등 체육행사만 있으면 우승을 도맡았다.

미술 솜씨도 좋아서 미래에 아빠 엄마와 같이 살집이라고 그려서 어머니에게 선물하곤 했는데, 그냥 집 모양만 그린 것이 아니라, 집 내부의 계단, 방, 가구며 오밀조밀하게 다 그려 어머니를 감동케 했다.

김성재는 정말 효자였다. 듀스 활동 중단한 이유 중 하나가 "엄마 친구들과 같이 해외여행 모시고 가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김성재 어머니는 그 생때같은 아들을 아직도 보낼 수가 없다. 팬들도 그와 인연을 맺었던 지인들도 영원히 그를 보내지 못할 것 같다.

이현도는 김성재의 최종 판결이 무죄로 결론 나면서, 가수로서는 아예 활동을 접었다. 작곡가 프로듀서로서 활동은 하지만, 아직도 팬들 앞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동갑내기 김성재, 이현도는 각자 성격도 다르고, 스타일도 정반대이지만, 텔레파시가 늘 통한다고 했다. 요즘 말로 '소울 메이트'였다.

그래서 듀스로 활동하던 시절,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야, 이 병신아"하는 '애칭(?)'을 동시에 외치며, 우정을 확인했다.

듀스가 데뷔한 이듬해 김성재와 이현도의 인생 스토리를 연재하며, 이들의 꿈과 희망을 육성으로 들을 수 있었다.

그랬던 그가 그 꿈을 이루며 지금 살아있다면? 1972년 4월생이니, 우리 나이로 50세. K팝, K-힙합을 쥐락펴락하는 월드클래스 가수가 되었을 것은 물론, 케이팝 스타들을 키워내는 상장사 엔터테인먼트 기업 대표로 활동하고 있을 텐데.

가끔은 노(老)기자와 가을 저녁 한잔 술 나누며 옛이야기하고 있을 텐데 하는 진한 아쉬움과 그리움이 몰려온다.

홍성규 기자 skhong@bizent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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