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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라②] 김성수 감독 “승리의 횟수보다, 어떤 종류의 싸움을 했느냐가 중요”

[비즈엔터 정시우 기자]

▲김성수 감독(사진=윤예진 기자 yoooon@)
▲김성수 감독(사진=윤예진 기자 yoooon@)

Q. 담배, 태워도 된다.
김성수:
끊었다. 건강해져서 영화에 매진하려고. 2005년 8월 16일에 끊었으니, 꽤 오래 됐다. 그때가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교수할 때였다.

Q. 교수로서의 김성수는 어땠나.
김성수:
교수하면 안 되겠다고 느꼈다.(웃음) 영화가 말을 거는 방식이나 화법은 ‘당대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시대의 언어에 밀착돼 있는 젊고 재기발랄한 친구들에게, 과거의 시간을 건너온 사람이 우리가 사용했던 언어를 사용해서 영화를 해 보라고 하는 건 웃기는 일이라 생각했다.

Q. 당대의 언어라는 게, 젊은 층의 언어는 아니지 않나,
김성수:
젊은 층의 언어는 아니지만, 어쨌든 영화라는 게 상상과 꿈의 요소가 있기 때문에, 같은 이야기를 같은 언어로 반복하면 관객들이 관심을 안 가진다. 내가 어릴 때 형이 즐겨듣던 음악을 좋아했는데, ‘태양은 없다’(1998)에 수록된 음악이 그때 듣던 음악이다. 그런데 중학교에 들어가니까 그 노래가 전처럼 재미가 없더라. 그때는 바로 위의 누나가 듣던 팝송들이 좋았다. 그러다가 대학생이 되니까 또 음악 취향이 바뀌었다. 결국 음악-영화 같은 대중예술은 그 시대에 맞는 리듬으로 변주해냈을 때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지 않나 싶다.

Q. 생각해보니 ‘비트’(1997)가 그 시대 젊은이들에게 그렇게 폭발적이었던 것도, ‘당대의 언어’를 정확하게 찔렀기 때문인 것 같다. ‘태양은 없다’도 마찬가지고.
김성수:
그런데 평가는 안 좋았다.(웃음)

Q. 안 그래도 인터뷰 오기 전에 찾아보니, 개봉 당시에는 평이 상당히 박했더라.
김성수:
맞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좋아졌다.

Q. 작품이 시간을 견뎌서 재평가 받은 셈이다.
김성수:
오래 살아남는 영화들이 있는 것 같다. 관객 수로 그 영화에 대한 평가가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영화들은 더 오래 살아서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특히 영화감독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영화들이 있다. 그런 영화를 만드는 것이 감독들의 진짜 꿈이다. 쉽게 휘발되지 않고, 오랜 잔상을 남기는 영화. 그런 영화들은 감독들에게 전염되고, 작업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하게 만든다.

Q. 당신에게 영향을 끼친 감독의 영화는 뭔가.
김성수:
샘 페킨파의 거의 모든 영화.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들. 나에게 크게 각인된 작품들이다. 하나만 꼽으라면,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공포의 보수’(1953)라는 영화다. 이브 몽땅이 주연한. ‘아수라’ 후반 작업하면서 다시 꺼내 봤는데 그런 영화를 만들 수 있으면 더 없는 영광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Q. ‘아수라’를 향한 평가가 극과 극으로 치닫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이 영화도 시간이 지날수록 사랑받을 거라 확신한다.
김성수:
그렇게 되면 너무 좋지. ‘아수라’는 성공 여부를 떠나, 개인적으로는 내 꿈을 이룬 작품이다. 이건 내 인생영화이기 때문에. 기존 작품들과 다르게 이번엔 내가 작품 속에 너무 깊게 녹아들어 버렸다. 나를 온전히 투사한 영화다. 이 영화가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이 되기를 바라면서 찍었다. 사람들을 흔들고 싶었고, 좋은 의미로 불편하게 만들고 싶었다.

Q. 좋은 의미로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었다는 건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가.
김성수:
익숙한 것들이 다르게 전달됐으면 했다.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이게 왜 이런 거지?’ ‘아, 이래서 이런 거구나’하는 연쇄작용을 일으켰으면 했다. 사실, 나 스스로도 이런 이야기를 쓸 때는 용기가 조금 필요했다. ‘이렇게까지 해도 되나?’ 싶었다. 지금의 배우들이 캐스팅 됐을 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랬다. “시나리오 다시 써서 재미있는 영화로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라고. 순간적으로 ‘맞아, 정말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 사나이픽처스 한재덕 대표가 그랬었거든. “감독님, 이 영화를 정말 찍고 싶으세요? 생각하신대로 가고 싶으세요? 그러면 유명한 배우들이 와서 감독님 주변에서 쉴드를 쳐 줘야 해요. 그래야 투자가 돼서 작품이 세상에 나올 수 있어요.”라고. 꿈의 배우들이 캐스팅 됐을 때는 또 그랬다. “끝까지 가는 작품을 찍으려고 배우들을 끌어 모았는데, 감독님 흔들리지 마세요. 진짜 가고 싶은 대로 가세요.”라고. 이런 제작자를 만나다니. 행복한 작업이 아닐 수 없었다.

Q. 이야기를 들으니, 혹평에 대해서도 충분히 예상 했던 것 같다.
김성수:
예상 정도가 아니라, 당연히 그런 평가를 들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분들은 시간과 돈을 들여 온 분들이니까, 그렇게 말한 자격이 있다. 그리고 내가 그 비판에도 그렇게 기분 나쁘지 않은 것은, 적어도 쾌감과 즐거움과 흥행을 위해 이 배우들을 소진하지 않았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값진 이야기를 만드는데, 이 배우들의 도움이 필요했고 함께 치열하게 만들었다.

Q. A급 배우들이 나락을 향해 거침없이 질주하는 영화를 만난다는 건 충무로에서 일견 보기 드문 흥미로운 경험이기도 하다.
김성수:
배우들에게 너무 고맙다. 나보다 더 작업을 즐겨줬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팀워크’가 생겼다.

Q. ‘무뢰한’ 오승욱 감독과의 대담에서 당신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 “오승욱식 누아르에서는 결정적 사건 자체보다는 사건의 파장으로 생기는 인물들의 정서적인 흔들림에 주목한다”고. 그 때의 말을 변용해서 질문하자면 ‘김성수식 느와르는 결정적인 사건 자체보다는, 인물들의 먹고 먹히는 관계에서 파생되는 파열음에 주목’한 것 같다.
김성수:
맞다. ‘아수라’는 스토리가 없는 영화다. 이 영화에 나오는 모든 대사는 다 넣어도 되고 다 빼도 무방하다. 영화 속 어느 인물도 진실을 이야기 하지 않으니까. 에둘러 이야기 하고, 농담이나 하고, 의성어 의태어만 할 때도 있으니까. 하지만 ‘인물과 인물’ 사이에서 피어나는 어떠한 기운들은 중요했다. 폭력의 주종관계든 협박관계든 거래관계든 인물들 사이의 기운을 찍는 게 이 영화의 핵심이었다. 그 기운을 담아내기 위해 인물들이 끊임없이 충돌해야 했고, 그 동선이 굉장히 중요했다. 한도경(정우성)이 박성배(황정민)와 장례식장에서 마주 앉아 컵을 씹는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큰 정복과 음모가 벌어지는 신이기에 굳이 많은 움직임이 필요 없었다. 그 장면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서 인물들은 움직여야 했다. 그 움직임을 이모개 촬영 감독은 캐릭터의 동선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다각다로 찍어냈고, 조명 감독은 인물에게 빛에 닿는 순간 등을 세분화시키며 미장센을 설계했다.

▲김성수 감독(사진=윤예진 기자 yoooon@)
▲김성수 감독(사진=윤예진 기자 yoooon@)

Q. 배우들에게 꼼꼼한 리허설이 필요했겠다.
김성수:
작품 들어가기 전에 배우들에게 부탁했다. “한 시간 먼저 와서 나와 리허설을 해 줄 수 있겠느냐”고. 그랬더니 황정민 씨가 “배우가 일찍 와서 리허설을 하는 건 당연하다. 연극은 한 장면 때문에 몇 달을 하는데, 좋다” 하더라. 곽도원-정만식 씨는 원래 연극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고. 정우성은 당연히 오케이! 주지훈도 막내로서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처음에는 정말 배우들이 한 시간 일찍 와서 연습을 했는데, 촬영을 해 나갈수록 그 시간이 30분으로 줄어들었고, 나중에는 연습이 거의 필요 없었다. 배우들이 나보다 이 인물을 더 잘 보니까, 굳이 내 디렉팅이 필요하지 않더라. 감독으로서 매우 신기한 경험이었다.

Q. 정우성은 많은 이들이 인정하는 젠틀한 이미지의 배우다. 그런 정우성을 악의 끝까지 몰아세우는 영화다. 배우 개인에게도, 그를 가장 잘 아는 감독 입장에서는 기존 이미지를 비틀어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을 것 같다.
김성수: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괴물이라면, 한도경은 그나마 ‘반인반수’ 같은 존재다. 유일하게 반성하고 고뇌하지 않나. 그 이미지에 잘 어울리겠다싶었다. 그렇다면 한도경은 어떻게 나락으로 걸어 들어가는가. 거대한 악인들 앞에서 주인공이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을 소멸시키면서 방아쇠를 당기는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악의 세계에서 악당들은 전멸시킬 수 없으니까.

Q. 악당은 전멸시킬 수 없다라.
김성수:
어떻게 악을! 지금 우리 주위를 둘러봐라. 악 앞에서 별 힘을 못 쓰지 않나. 시대가 악에 물들면 그 시대 사람들도 전염되는 것 같다. 최근 OOO대 사건을 보면서도 다시금 느꼈다. 교수들이 학생들을 외면하는 걸 보고 ‘이젠 교수도 그냥 직업인이구나. 직업에 해가 가해지면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는구나’ 싶어 안타까웠다.

Q. 본성이 선한 사람이라면 환경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김성수:
나는 인간이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선과 악 사이를 오가며 번민하며 사는 게 인간이다. 다만 선함이 통용되고 존경받는 시대에는 아이들도 더 착한 아이가 되기 위해 노력을 할 것이고, 남을 짓밟아야 승리하고 판매왕이 되는 사회에서는 사람도 악한 쪽으로 간다고 생각한다. “너 바보같이 왜 뺏기니? 이겨야 해. 그래야 나머지 99명이 너의 개-돼지가 되는 거야”라고 가르치는 사회에서 애들이 무엇을 보고 느끼겠나.

Q. ‘아수라’는 여러 가지가 흥미로운 영화인데, 좁게 사용한 공간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인물들을 좁은 공간에 가두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김성수:
그게 이번 영화의 메인 컨셉이었다. 엄밀히 말해 ‘아수라’는 장례식장에 악인 다섯 명을 가두는 영화다. 장례식으로 가기까지의 여정이다. 처음에는 넓은 공간을 조망하지만 점점 비좁고 밀폐된 공간으로 들어간다. 한도경이 병실에서 걸어 내려와서 좁은 탑차 안으로 들어간 후부터 영화는 좁은 공간으로만 들어간다. 비좁고 음침하고 끝을 알 수 없는 곳으로 가다보면 장례식장과 마주하는 구조인 거다. 그리고 처음 안남이라는 가상의 도시에는 낮과 밤이 공존한다. 그런데 갈수록 점점 낮의 빈도수가 줄어준다. 밤과 낮의 경계가 사라지다가 카 액션 다음에는 밤으로만 이루어진다. 갈수록 창문도 계속 닫힌다. 창밖은 무의미한 공간이 되고, 장례식장으로 오면 창문이 완전히 사라지지.

Q. 닫힌 문으로 향하는 영화인 셈이다. 카메라 앵글도 그렇고, 미술 조명 편집 모든 것들이 작정하고 관객들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김성수:
그렇게 세상 끝까지 가야 주인공이 자기 주인을 무니까. 관객들이 한번쯤은 지옥을 경험해 보셨으면 했다. 그래서 배우들이 그러더라. “이건 약간 정신병에 걸리게 만드는 영화 같다”고.(웃음)

Q. ‘아수라’의 폭력이 강하게 다가오는 건, 그 수위보다는 폭력을 전시하는 길이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인물들을 담아내는 그림도 색다르고.
김성수:
편집 포인트를 다르게 갔다. 많은 액션 영화에서의 폭력은 관객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쪽 위주로 찍는다. 그러기 위해 주인공의 정의감은 표현하지만 맞는 악당의 표정이나 고통을 인격적으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룰과 관습에 따라 찍어야 쾌감이 넘치는데, 그런 지점들을 다 피해갔다. 이 영화는 선한 폭력이 나쁜 폭력을 이기는 게 아니라 폭력의 세계에 봉인된 인간들이 폭력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괴멸하는 이야기니까. 허명행 무술감독과 이모개 촬영감독에게 그 느낌이 잘 전달되는 방식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이모개 감독이 신경 쓴 건 카메라 위치다. 가령 한도경이 짝대기(김원해)의 얼굴을 때릴 때의 앵글은 사실 잘 안 쓰는 각도다. 타격을 받는 사람 뿐 아니라, 때리는 사람의 순간 반응까지 모두 찍으니까 좀 강하게 보이는 면이 있을 거다. 정우성이 김원해를 가격하는 것은 진짜다. 원해 씨 얼굴에 보호 장비 등을 채워서 찍고, 이후에 그걸 컴퓨터 그래픽으로 지웠다. 사운드도 섬뜩하게 느껴지는 쪽으로만 골라서 넣었다.

Q. 이런 지독한 장면들이 나온 데에는 이유가 다 있는 것 같다. 회의도 많았겠다.
김성수:
많았다. 비를 뿌리고 찍은 카액션의 경우 컷을 나눠 찍지 않았다. 편집 포인트를 넘어서서, 감정이 폭주하는 그 순간까지 담아내려 했다. 어떻게 찍을까를 두고 회의를 엄청 했다. 난관이 너무 많으니까 어느 순간엔 ‘이렇게까지 하는 게 맞나’ 싶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스태프들이 “감독님, 이게 우리 콘셉트인데 하셔야죠!” 했다. 또 누군가가 “감독님 그냥 컷 나눠서 가시죠!” 하면, 그땐 내가 “아니야 그래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자” 하면서 여기까지 온 거다. 그런 악의에 찬 우리들의 의도를 다 살려서 관객들을 마지막 장례식장까지 밀어붙이고 싶었다. 우리의 의도가 모두에게 전달될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어떤 충격을 주고 싶었고, 그 의미를 언젠가 알아주지 않을까 했다.

Q. 최근 ‘비트’를 다시 봤다. 새삼 20년 전 영화인데도 액션이 상당히 세다고 느꼈다.
김성수:
재미있게 찍은 영화다. 정두홍이 무술감독을 한 영화이기도 하다.

Q. 그런 정두홍 감독의 제자들과 ‘아수라’를 찍었으니.(웃음)
김성수:
정두홍이라는 사람을 빼면 한국 영화의 계보가 존재하지 않는 거지.(웃음)

Q. ‘비트’는 정우성의 청춘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지만, 김성수의 청춘이 담긴 영화이기도 하다.
김성수:
그때 내가 서른여섯이었을 거다. 데뷔 후 두 번째 영화니까, 내 청춘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있을 때가 맞다. 지금은 너무 오래된 기억들이지만, 그때는 스스로도 젊다고 생각했다.

Q. 박광수 감독 연출부 출신으로 안다. 그때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김성수:
흔히 한국영화 뉴웨이브 1세대로 꼽히는 세 분이 박광수-장선우-이명세 감독님이다. 그분들의 자식들이 퍼져서 영화를 만들고 있는 셈인데, 나는 박광수 감독님 제자였다. 박 감독님 제자도 조금 나뉘는데, 나와 동문수학한 사람은 이현승-여균동이다. 저희 다음 세대가 허진호 오승욱 박흥식 이창동 장문일 감독 등이고. 박 감독님이 제자들을 잘 챙기셨다. 자주 모여서 술 마시며 이야기 한 기억이 난다. 지금도 박 감독님은 제자들 영화 현장에 꼭 오신다.

Q. 박광수-장선우-이명세 파(?) 들의 특징이 있을 것 같다. 대중은 캐치하기 힘든.
김성수:
영화 스타일은 조금씩 다 다른데, 한 분에게서 배우다 보니 작업방식 등에 있어 유사성이 있다. 우리끼리 모이면 그런다. “야, 너 감독님이랑 포즈가 똑같다!” “에이, 형도 똑같네!”(웃음).

Q. 2003년 ‘영어 완전 정복’부터 2013년 ‘감기’까지 연출 공백기가 꽤 길었다.
김성수:
그 기간, 제작도 하고, 중국에서 중국영화도 했다.

Q. 따지고 보면, 당신은 진정한 중국 진출 1세대다.
김성수:
그건 1세대지.(웃음) 1999년도에 중국에 영화 찍으러 간다고 했을 때 다들 반대했다. 미친 짓이라고 했다. 내가 보기에도 척박하긴 했다. 그래도 그때는 젊은 패기가 있어서 한다면 끝까지 했다. 그해 11월인가? 와이프에게 “여보, 나 중국 갈 건데 언제 나올지 모르겠어” 하고는 조감독-제작부 데리고 중국에 가서 방을 얻어 살았다. 그렇게 2000년 여름, ‘무사’를 중국에서 찍었다.

Q. 중국의 어떤 면에 그렇게 끌린 건가.
김성수:
일단 음식이 너무 맛있다.(웃음) 두 번째는, 내가 어렸을 때 동네에서 봤던 아저씨, 형님-누님 같은 분들이 거기에 살고 있더라. 사회주의 사회가 단점이 많지만 장점도 많다. 사람들이 겸소하고, 서열이 없다. 자본주의 욕망에 덜 찌든 거지. 내가 주로 지방 도시들을 헌팅 다녀서인지, 그런 분위기를 더 크게 감지했던 것 같다. 그리고 중국은 우리가 어릴 때 고전으로 읽었던 ‘삼국지’ ‘도덕경’ 이런 곳들의 본고장이지 않나. 원류가 있는 곳이니까. 참 좋았다. ‘무사’ 찍고 한국에 와서 ‘한예종’ 영상원에 교수로 들어갔는데, 그때 한국학생들과 중국학생들이 교류하는 게 있었다. 그걸 계기로 다시 중국을 오가다가 중국에 아예 회사를 만들었다. 장샤라고 당시 함께 했던 여자 대표는 이번에 ‘밀정’ 중국 프로듀서도 했더라.

Q. 중국에 차린 제작사(북경 나비픽쳐스)는…
김성수:
초토화됐다. 준비했던 프로젝트들이 잘 안 됐다. 쫄딱 망해서 문을 닫았다.(웃음) 눈물, 많이 흘렸다. 최근 한중프로젝트들이 성행하면서 여러 연락들이 오기는 하는데, 다 거절했다. 애증인 거다. 감독으로서가 아니라면 다시 북경에 가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실패는 했어도 근사한 시간이라 생각한다. 내 젊음의 한 시기를 거기에 묻었고, 추억이 남았으니.

▲김성수 감독(사진=윤예진 기자 yoooon@)
▲김성수 감독(사진=윤예진 기자 yoooon@)

Q. 그때의 추억이 남기는 의미들이 있을 거다.
김성수:
그럼.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기자님! 저, 성공도 해보고 실패도 해 봤는데 성공은 달콤하지만 별 쓸모가 없다. 실패하면 아무도 왜 실패했냐고 물어보지도 않고 마이크도 대지 않지만, 대신 많은 걸 배우게 된다. 코미디언 김국진이 이전에 그런 이야기를 했더라. 성공하면 ‘조금’ 알게 된다고. 많은 사람이 와서 어떻게 성공했냐고 묻는다고. 반면 실패를 하면 ‘다’ 알게 된다고. 그런데 그땐 아무도 안 물어 본다고.(일동 탄식) 사람이 깨달음의 단계로 가는 건 ‘실패의 계단’을 밟아서인 것 같다.

Q. 처음부터 완성돼 있는 인간은 별로 없으니까.
김성수:
타고난 이들은 있기는 할 거다. 그런 천재들 말고 나머지 사람들은 어떤 경험을 하며 걸어가느냐가 관건인 것 같다. 유비와 조조의 성장담이기도 한 ‘삼국지’를 보면 두 사람이 끊임없이 전쟁을 한다. 그런데 두 사람이 전쟁에서 이긴 횟수가 얼마 안 된다. 패배의 경험이 오히려 많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생각했다. 승리해야지만 패권을 차지하는 게 아니라는 걸. 멋지게 잘 지는 놈이 진짜 센 놈이라는 걸. 그러니까 승리의 횟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종류의 싸움을 하느냐가 그 사람의 ‘지금’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흥행한 작품에 출연한 배우가 아니라, 좋은 작품에서 이전투구 한 배우들을 우리가 인정하지 않나.

Q. 어떤 마음으로 ‘아수라’를 만들었는지, 느낌이 딱 온다.
김성수:
남들에게 칭찬받고 흥행하는 영화를 찍으려고 한 적도 있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되니까, 그 허무함은 보상받을 길이 없더라. ‘다음 영화는 내가 후회하지 않는 영화’를 찍고 싶었다. 그게 ‘아수라’다. ‘아수라’는 내가 나 스스로에게 창피하지 않길 바라며 찍은 영화다.

Q. 긴 시간 영화와 함께 해왔다. 환경이 변해도 연출자로서 지키고 싶은 게 있다면.
김성수:
너무 많은 유혹과 쓸데없는 욕망에 시간을 탕진하면서 세월을 보내왔다. 감독으로서 내게 남은 생명과 기회가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내가 아는 음정으로 이야기를 만드는데 시간을 쏟고 싶다.

☞ [아수라ⓛ] 그래서, 이 영화의 무엇이 관객을 찌르는가

정시우 기자 siwoorain@e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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