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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後] ‘밤의 해변에서 혼자’ 오! 민희

[비즈엔터 정시우 기자]

(사진=(주)영화제작 전원사)
(사진=(주)영화제작 전원사)

카메라가 ‘컷’ 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 슬그머니 떠오른 생각. 스크린 속에 남은 영희(김민희)는 ‘밤의 해변에서 혼자’ 무엇을 할까. 밤의 해변에서 혼자 공허한 눈물을 흘릴까, 밤의 해변에서 혼자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부를까, 밤의 해변에서 혼자 무엇을……. 확실한 건, 영희는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한 후 어떤 식으로든 살아갈 것이란 점이다. 어떤 일이 벌어지든.

매해, 꼬박 꼬박, 두어 편.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충무로에서 가장 부지런한 창작열을 보여 주고 있는 홍상수 감독의 19번째 작품이다. 영화는 두 개의 챕터로 이뤄졌다. 1부는 함부르크, 2부는 강릉이 배경이다. 많은 홍상수 영화들이 그렇듯, 공간이 다른 두 챕터 사이의 시간은 불분명하다. 누군가에겐 1·2부가 시간 순서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겐 1부가 시네마테크에 간 2부의 영희가 바라 본 영화로, 누군가에겐 1부 마지막에 납치당하는 영희의 모습이 2부 영희의 다음 행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홍상수는 눈으로 보이지 않는 시간 사이로 관객 스스로가 들어가 음미하길 바랄 뿐일 테다. 각자가 욕망하는 대로.

홍상수는 거대한 사건을 다루는 감독이 아니다.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이 쌓여 삶의 한 단면을 노출시키는데 일가견이 있는 감독이고, 그러한 드믄 능력 덕분에 귀하게 여겨지는 감독이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 역시 그렇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여배우 영희가 유부남 영화감독 상원(문성근)과 사랑에 빠지면서 번민해가는 과정이 전부다. 홍상수 영화는 이번에도 기승전결로 뻗어가지 않는다. 영희의 발길이 머무는 공간에 다양한 인간 군상을 끌어들이고, 이를 통해 영희의 욕망과 속마음을 들출 뿐이다. 이렇다 할 사건은 없지만, 한 여인의 다채로운 감정이 알알이 박혀 있다.

그리고 김민희다. “사랑하는 사이”라고 고백한 감독-여배우의 관계를 떠올리지 않고 이 영화를 보기란, 사실상 힘들다. 영화와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연출가로 받아들여져 온 홍상수의 이력이, 영화 속 홍상수와 김민희 흔적 찾기를 더욱 부추긴다. 홍상수 감독 스스로는 자전적 이야기임을 부인하지만, 창작자가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느낀 충만함·미안함·행복 등의 복합적인 감정이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 실린 것은 확실해 보인다.

남녀관계를 낭만적으로 그려오지 않았던 홍상수지만 이번은 사뭇 낭만적이다. 자신들의 과거를 묻는 영희에게 상원은 직접적인 대답 대신 안톤 체홉의 ‘사랑에 관하여’를 낭독해 준다.

“사랑할 때, 그리고 그 사랑에 대해서 생각할 때는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행복이나 불행, 선한 행동인가 악한 행동인가라는 분별보다 더 고상한 것, 더 중요한 것에서 출발해야 하며, 아니라면 차라리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됐습니다.”

한 여인을 향한 한 남자의 이토록 절절한 고백을, 홍상수 작품에서 본 기억이 없다. 그것이 홍상수 개인의 반성인지 고백인지 또 다른 무엇인지는 단언하기 힘들지만, 적어도 한 여인을 만나며 느낀 진심이 담긴 말임을 짐작할 수 있다. 완전하지 못한 인간의 결함을 껴안으려는 마음이 이 영화엔 있다.

““너무 매력 있다” 극중 선배 준희(송선미)가 영희에게 하는 이 이야기는 영화 밖 배우 김민희를 향하는 말이기도 하다. 전작 ‘아가씨’가 숨소리부터 미세한 음성까지 ‘배우 김민희’의 모든 것을 담아낸 영화라면,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침묵부터 내밀한 사색까지 ‘인간 김민희’의 모든 것을 읽어낸 영화다. (홍상수 감독의 전작들을 살짝 빌려 ‘우리 민희’ ‘민희의 영화’ ‘오! 민희’라 해도 무방해 보일 정도다.) ‘아가씨’를 보며 김민희가 당분간 히데코를 능가하는 캐릭터를 만나기 쉽지 않을 것이라 단언했었는데, 오판이었다. 김민희는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세계를 이물감 없이 열어젖힌다. 물론 여기서 다시 홍상수다. 홍상수라는 창작자의 토양 위에서 김민희라는 또 다른 창작 열매가 맺었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여러 비판의 목소리가 크다는 건 알지만, 지금 현재 ‘감독 홍상수’-‘배우 김민희’의 세계를 가장 충만하게 하는 건 서로임을 인정하지 않기란 힘들다.

정시우 기자 siwoorain@e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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