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자와 조롱은 종이 한 장 차이다. 그 종이 한 장의 경계 위를 '디거'는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웃음을 터뜨린다.
영화 '디거'는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는 3대째 석유 재벌 디거 록웰(톰 크루즈 분)의 이야기다. 그는 그린란드 빙하 시추 시설에서 발견된 작은 균열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가 전 세계를 뒤흔들 거대한 재난을 불러오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나선다. 그런데 록웰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관객의 예상을 완전히 비껴간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연출은 독특하다. 예고편부터 마치 무대 연출을 보는 듯한 화면에 '뮤지컬인가?' 궁금증을 부르는 순간들이 있었다. 영화를 직접 보면 그 이유가 하나씩 드러난다. 각 장면이 영화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아가는 과정 또한 재미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스포일러 없이 극장에 가길 바란다. 볼수록 씁쓸하고 볼수록 허를 찌르는데 영화를 미리 알고 가면 재미가 반감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안 된다고 말하면서도 어딘가에서는 은근히 바라고 있는 것, 혹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욕망을 영화가 정면으로 건드린다. 인물에 대한 반전도 있고 엔딩 크레딧 역시 예상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 막상 마주하면 묘하게 충격적이다.
이번 영화에서 가장 놀라운 건 톰 크루즈다. 액션을 내려놓은 것은 물론이고 톰 크루즈인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외모부터 달라졌다. 분장이려니 하고 보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 얼굴이 아니라 디거 록웰이라는 인물만 보인다.

'저게 정말 톰 크루즈인가?' 싶은 순간들이 이어지고 그 안에서 터져 나오는 연기의 밀도가 상당하다. 액션스타로 익숙했던 배우가 이런 방식으로 웃음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도 새삼 놀랍다. 이렇게까지 망가진 적이 있었나 싶다가도 한편으로는 이 순간을 위해 연기를 해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존 굿맨이 연기한 컴슨 대통령도 자꾸 눈길이 간다. 과장된 캐릭터처럼 보이면서도 어딘가 현실적인 구석이 있다. 웃긴데 마냥 웃을 수만은 없다. 영화 속 인물을 보고 있는데 묘하게 현실의 권력자들을 떠올리게 하는 순간들이 있다.

'추락의 해부', '존 오브 인터레스트'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산드라 휠러는 디거의 이복동생 엠마로 등장한다. 등장하는 순간부터 다른 배우들에게 밀리지 않는 무게감을 만들어낸다. 크게 감정을 드러내기보다 절제된 연기로 오히려 더 강한 인상을 남긴다.
제시 플레먼스가 연기한 인물은 이들을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는 듯한 위치에 있다. 무엇보다 그가 등장하는 순간 영화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많은 것을 설명하지 않아도 화면의 온도를 바꾸는 배우다.
산드라 휠러, 존 굿맨, 제시 플레먼스까지 쟁쟁한 배우들이 함께하지만 단연 톰 크루즈의 존재감이 압도적이다. 그럼에도 배우들이 따로 논다는 느낌은 없다

'디거'는 재난영화처럼 시작하지만 단순한 재난영화로 흘러가지 않는다. 웃기다가도 씁쓸하고, 황당하다가도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풍자인지 조롱인지, 어디까지가 웃음이고 어디부터가 불편함인지 자꾸 곱씹게 된다.
10월 3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러닝타임 129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