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엔터 정시우 기자]

▲류준열(사진=윤예진 기자 yoooon@)

결정적인 도약대. 스타의 길에 들어서기 위한, 대중의 시선을 훅 잡아끌기 위한 절호의 기회. 류준열은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하 ‘응팔’)을 통과하며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의미의 ‘증명서’는 아니다. 호들갑스러운 환호의 시간이 지나고 주위가 잠잠해지면, 이제 자신의 진짜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냉정한 시간이 온다. 그 문을 활짝 열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느냐, 문 앞에 가로막혀 출발선으로 거꾸로 돌아가느냐. 그 지점에서 급작스럽게 비상한 배우의 운명은 갈린다. 류준열에게 ‘응팔’이 도약대라면, 영화 ‘더 킹’은 다음을 위해 통과해야 할 문이다. 그래서 그는 문을 열었을까.

솔직해져보자. 류준열이 대한민국 ‘외모 킹’으로 불리는 정우성-조인성과 ‘더 킹’에 나란히 캐스팅 됐다고 했을 때, 하물며 조인성의 친구 역할을 맡는다고 했을 때, 그의 승부기질에 고개를 끄덕인 이가 얼마나 될까. “이건 무리수”라는 이야기가 많았던 게 사실이고, 기자 역시 그의 도전을 과소평가했음을 인정한다. 그래서였다. ‘더 킹’을 보는 순간, 살짝 미안해진 건.

‘더 킹’에서 류준열이 연기한 들개파 2인자 최두일은 출연 분량이 그리 많은 인물은 아니다. 그럼에도 두일은 비중과 상관없이 그 크기가 상당히 크게 다가온다. 그건 두일이라는 캐릭터가, 자신이 등장하지 않는 신에서도 연신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며 흐름을 조율하는, 즉 변수를 쥐고 있는 인물이어서다. 그리고 그런 인물을 류준열이라는 배우가 너무 격양되지도, 너무 쳐지지도 않는, 알맞은 온도로 묵직하게 연기해 낸 덕이다. 류준열은 이미 문을 활짝 열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Q. ‘더 킹’을 보면서 류준열이라는 배우를 다소 과소평가했구나 생각했어요. 당신의 인기. 솔직히 말하면 ‘응팔’ 후광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스크린에서 꽉 찬 느낌이 들더군요. 인터뷰에 앞서 사과하고 싶네요.
류준열: 아우, 아니에요.(웃음) 작품을 통해 바라봐주시니, 저는 오히려 좋은 것 같아요. 전문적으로 영화를 보시는 분들이 이런 이야기를 해 주시면 신이 나요. 관객 분들 목소리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 있습니다. 감사해요.

▲류준열(사진=윤예진 기자 yoooon@)

Q. 드라마 ‘응팔’ 이후 ‘로봇, 소리’(이호재), ‘섬. 사라진 사람들’(이지승) ‘글로리데이’(최정열), ‘계춘할망’(창), ‘양치기들’(김진황) 등 많은 출연작이 쏟아졌습니다. 이 영화들은 ‘응팔’ 이전에 촬영한 작품들이었죠. 그런 의미에서 ‘더 킹’은 ‘응팔’ 이후 선택한 첫 작품인 셈인데요.
류준열: 네. 그런데 선택 과정에서 특별히 다른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습니다. 여러 생각을 했다면 오히려 이 작품을 못했을 수도 있어요. 제가 추구하는 바를 잃지 않으려고, 그리고 주변 이야기를 많이 듣지 않으려고 애썼을 뿐입니다. 사실 ‘응팔’도 꼭 ‘응답하라’ 시리즈여서 오디션을 본 건 아니었거든요. 수많은 오디션 중 하나였는데 운 좋게 합류하게 됐고, 그게 또 훌륭한 결과물로 나와서 좋은 평가를 받은 거죠. 그래서 뿌듯하고요.

Q. 주변 이야기를 많이 안 들으려했다는 말이 인상적이군요. 이런 저런 스피커들이 쏟아졌을 텐데, 휩쓸리지 않으려 했다는 의미인가요.
류준열: 주위에서 “지금은 네가 어떻게 가야한다” “저렇게 가야한다” 다양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주셨어요. 그 목소리들이 동일하다면 저도 거기로 갔을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다 다른 이야기들이거든요. 물론 모두 진심어린 충고들이에요. 하지만 그런 주위 시선에 맞춰서 가는 건 저와는 안 맞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원초적인 것들에 더 집중했던 것 같아요. 제가 추구하는 것들에 말입니다.

Q. 류준열이 추구하는 원초적인 것들은 무엇인가요.
류준열: 재밌는 이야기들. 내가 관객이라면 듣고 보고 싶은 것들. 무엇보다 시나리오를 봤을 때 쭉쭉 읽히는 것들에 끌립니다. 흥미가 일단 가야 마음도 열 수 있으니까요.

Q. ‘더 킹’은 어떻게 읽혔나요.
류준열: 순식간에 읽혔습니다. 시나리오가 길었는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빨리 읽혔어요. 제가 또 한재림 감독님 팬이어서 더 설레는 마음으로 시나리오를 읽었어요. 이야기 자체의 힘이 좋아서 더 욕심이 났던 것 같아요. 하고 싶다고 어필을 했는데, 기회가 주어졌죠.

Q. 두일은 영화에서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인물입니다. 여러 캐릭터들이 블랙코미디/풍자를 향하는 가운데, 두일만은 의리의 상징으로 태도를 견지하죠. 비중과 상관없이 남자배우라면 욕심날만한 캐릭터라고 생각했어요.
류준열: 캐릭터가 멋있고 안 멋있고는 저에게 중요 포인트가 아닌 것 같아요. 지금 찍고 있는 ‘침묵’(가제)에서의 역할도 멋있음과는 거리가 있죠. 저에겐 공감이 중요합니다. 그런다보니, 제가 처한 상황에 맞춰서 캐릭터를 선택하는 면이 없지 않아요. 저에게서 캐릭터의 모습을 많이 찾는 편이고요. ‘더 킹’ 당시엔 사람들 사이에서 느끼는 외로움이 컸어요. 그게 크게 작용했죠.

▲(왼쪽부터)정우성, 배성우, 조인성, 류준열(사진=윤예진 기자 yoooon@)

Q. 군중 속의 외로움인가요?
류준열: 음…표현하기가 어려운데, 그게 연예인으로서의 삶 때문은 아니에요. 그냥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더라고요. 그래서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을 찾아보려고도 했고요. 그때 두일을 만났는데 굉장히 외로운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검사들 사이에서 홀로 넘치지 않게 아슬아슬하게 서 있잖아요? 그 외로움이 마음에 와 닿았죠. 그리고 최근에 알아 챈 건데, 제가 좋아하는 인물 유형들은 표현을 잘 안 하더라고요. 연기했던 캐릭터들도 그렇고요.

Q. 아, 그렇네요. ‘응팔’의 정환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죠.
류준열: 네. 필요 이상의 표현을 잘 안 했죠.(웃음)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인간들이 살아가면서 자기감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순간이 많지 않더라고요. 그런 말도 있잖아요? ‘인간이 살면서 통틀어 웃는 시간이 하루도 채 안 된다’고. 가령 지하철이나 군중 틈에서 사람들을 보면 다들 표정이 없어요. 고민도 있고, 좋은 일도, 슬픈 일도 있을 텐데 겉으로 드러내지 않죠. 그랬을 때 연기라는 것이 결국 인간 군상을 표현하는 일이잖아요? 배우로서 그 모습에 더 가깝게 다가가는 게 제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Q. 표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두일의 페이소스는 그런 측면에서의 접근이기도 했겠군요.
류준열: 네. 그래서 영화에서의 두일이 마음에 들었어요. 나름 잘 표현된 것 같아요. 두일의 감정이 명확하게 보이지 않잖아요? 가만히 보고 있으면 이도 저도 아닌 느낌이 있는데, 저는 그게 오히려 좋았어요.

Q.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자기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사는 게 건강한 삶일까, 아니면 타인을 위해 감정을 누르고 사는 게 좋은 삶일까 하는.
류준열: 아~ 생각해 볼 문제네요. 정답은 없는 것 같은데, 확실한 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어려움은 있죠. 피해라는 것도 상대적이 거니까. 가만히 있는 걸 피해라고 느끼는 사람이 있고, 너무 많이 웃는 걸 피해라고 하는 사람도 있죠. 모두를 맞추기란 불가능 한 것 같아요. 스스로가 양심껏, 도의적인 차원 안에서 표현할 수밖에요.

Q. 류준열도 표현에 인색한 편인가요.
류준열: 표현을 잘 안 하는 것 같아요. 고민도 남들에게 잘 이야기 안 하고요.

Q. 그래서 혼자만의 공간을 찾아 헤매고 있군요.
류준열: 네. 울든 웃든, 혼자 있는 공간에서는 상관이 없으니까요.

▲류준열(사진=윤예진 기자 yoooon@)

Q. 점점 류준열을 알아보는 사람은 많아질 테고, 그렇게 되면 갈 수 있는 공간도 점점 제약이 될 텐데, 이 상황이 당신에겐 슬픈 걸까요.
류준열: 슬프지는 않아요. 적응의 과정이 필요했을 뿐. 이젠 적응이 많이 돼서 타인의 시선을 크게 의식하지 않아요. 최대한 편하게 다니고 있죠. 그게 또 서로 편하더라고요. 굳이 숨어 살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Q. 외로움에도 종류가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없어서 느끼는 외로움.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서 오히려 더 크게 다가오는 외로움. 대중의 사랑 속에서 느끼는 외로움.
류준열: 아, 그런 게 있죠.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외로움은 인간 자체가 지니는 숙명적인 외로움인 것 같아요. 왜 외로운 순간들이 있잖아요? 그걸 어떻게 해결하고 어떻게 좋은 방향으로 끌고 가느냐의 문제인 것 같아요.

Q. ‘더 킹’으로 만난 정우성과 조인성은 어땠나요? 생각과는 달랐던 지점도 있었을 텐데요.
류준열: 편견이라는 건 정말 무서운 것 같아요. 저도 대중의 한 사람으로서 두 분에 대한 편견이 있었거든요. 전 두 선배가 과묵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굉장히 위트 있으시고, 인간적이세요. 우성 선배는 또 굉장히 해박하시죠. 어떤 주제가 나와도 막힘없이 풀어내세요. 이번 현장을 함께 하면서, 보이는 게 다가 아니구나를 다시금 느꼈습니다.

Q. 대중이 류준열에게 지니는 편견도 있겠죠?
류준열: 있겠죠.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각자의 잣대 안에서 생각하는 게 있으시겠죠. 그런 게 있는 것 같아요. 보이는 걸 믿는 게 아니라, 믿고 싶은 걸 보려는 경향이요.

Q. 많은 이들이 그렇죠.
류준열: 네. 색안경을 끼는 순간부터는 이미 ‘이 사람’은 ‘이 사람’ 자체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나를 통한 ‘이 사람’ 이어서 굉장히 어려운 것 같아요. 그래서 그 편견을 걷어내려는 노력이 필요하고요. 그건 단순히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차원은 아니라고 봐요. 자신을 투과해서 상대를 보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가 중요한 문제죠.

▲'더 킹' 두일 역의 류준열

Q. ‘그 사람’은 결국 내가 보는 ‘그 사람’이다…흥미로운 이야기에요.
류준열: 좋기만 한 사람도, 안 좋기만 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자신이 정말 좋은 사람이면 상대의 좋은 것을 보려고 할 테고, 안 좋은 사람이면 안 좋은 것을 볼 테죠. 그런데 좋은 걸 보다보면 ‘그 사람’이 정말 좋아져요.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게 티가 나면, ‘그 사람’도 나를 좋아하게 되고요. 그건 분명한 것 같아요. 내가 안 좋아하면 상대도 저를 안 좋아할 확률이 커요. 나 혼자 사는 게 인생이라면 이런 게 상관없을 텐데, 삶이란 건 그렇지 않잖아요? 그러니 자기부터 바꿔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Q, 정말 많은 생각을 하면서 사는 것 같아요.
류준열: 요즘 고민들이 너~무 많아요.

Q.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고민인가요?
류준열: 이게…사람들을 많이 만나면서 느끼는 고민들인 것 같아요. 종종 저를 통해 힘을 얻는다는 팬을 만나면 생각이 더 많아져요. 나라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 하게 되죠.

Q. 주위 기자들이 ‘류준열은 이상주의자’ 같은 면모가 있다고 하던데, 아닌 것 같아요. 오늘 만나보니, ‘감성적인 현실주의자’가 아닐까란 생각이 들어요. 현실에 밀착해서 세상을 바라보는데, 대신 그 안에 감성적인 측면들이 있는 느낌이랄까요.
류준열: 오, 맞아요! 어떤 사건 앞에서 나름 침착 하려고 애 쓰는데, 그 와중에 또 감성적으로 들어가는 게 있어요. 그걸 조율하려고 애쓰는 중이고요. 어떨 때의 저는 굉장히 차갑고 냉정해요. 어떨 때의 저는 감성적이죠. 그래서 인터뷰가 어려워요. “이상형이 누구야” “좋아하는 게 뭐냐?”라는 질문을, 이성이 강할 때 답하는 것과 감정이 강할 때 답하는 게 다르거든요. 어떤 하나의 규정된 답을 하면 바로 그 사람이 돼 버리니까, 신중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어요.

▲류준열(사진=윤예진 기자 yoooon@)

Q. 인터뷰라는 게 또, 의도한 말과는 다른 뜻으로 전달될 여지가 있죠. 말로 직접 전달하는 것과 활자화 돼서 보는 건 또 다르고요.
류준열: 네. 워딩이 되게 중요하더라고요. 언제고 인터뷰 중에 ‘셀러브리티’란 단어를 썼는데, 기사엔 “셀럽으로 살 수 만은 없다!”로 나가서…(일동웃음) 그때 적잖이 당황했어요. 애정으로 써 주신 걸 알지만요.(웃음)

Q. 두일이 진짜 오르고자 하는 킹의 자리는 어디였을까요.
류준열: 자기 수준에 맞는 왕을 꿈꾼 인물이라고 봤어요. 진짜 왕은 한강식(정우성)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두일은 그 밑에서 자기가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를 아슬아슬하게 본 거고요. 스스로를 잘 파악하고 있는 인물인 거죠. 그런 의미에서 저와 비슷한 면이 있어요. 제가 재학 중에 유학을 가려고 했던 때가 있어요. 당시 제가 학교에서 그렇게 뛰어난 편이 아니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금 자리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데, 유학 가서 한들 의미가 있을까란 생각이요. 그래서 방향을 틀었어요. ‘지금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하자’ 쪽으로요. 두일도 아마 그런 인물이었던 것 같아요. 배우마다 추구하는 연기 방향이 다른데, 저의 경우엔 캐릭터를 만났을 때 그 안에 저를 완전히 죽일 수 없는 것 같아요. 항상 캐릭터 안에 제가 묻어나죠.

Q. ‘응팔’ 이후 쉬지 않고 달리고 있어요. 큰 사랑도 받고 있고요. 이 속도, 어떤가요. 부담스럽지는 않나요?
류준열: 부담스럽진 않지만 속도가 빠르긴 빨라요. 그건 확실한 것 같아요. 그래도 즐기면서 하려고 하고 있어요. 지켜 봐 주셨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