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 달리자’는 원래 크라잉넛의 노래인데…. 우리가 이러려고 크라잉넛을 했는지 자괴감이 듭니다.” 지난 12일 열린 촛불 집회 현장. 밴드 크라잉넛이 무대에 올라 호기롭게 말했다. ‘비선실세’ 최순실 일가를 에둘러 저격한 것이다. 잠시 뒤 크라잉넛이 ‘말 달리자’ 연주를 시작하자, 시민들 사이에서 “닥쳐”를 외치는 ‘떼창’이 유쾌하게 피어올랐다.
저항이 있는 곳에 음악도 있다. 굳이 흑인 노예들의 삶과 블루스의 탄생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에서부터 2002년 효순·미선 추모 집회에서도 음악은 늘 흘러나왔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을 반대하는 촛불 집회에서는 김민기의 ‘아침이슬’이 널리 불렸고, 이화여자대학교 재학생들은 미래라이프 단과대학 신설을 반대하는 시위에서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합창했다.
최순실 일가의 국정농단 사태가 불거진 2016년, 음악인들의 움직임은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이다. 가수 전인권과 이승환, 정태춘, 조피디, 록 밴드 크라잉넛 등은 지난 12일 광화문 광장 한편에서 ‘하야 HEY 콘서트’를 열고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했다. 17일에는 갤럭시익스프레스, 킹스턴루디스카, 모노톤즈, MC메타 등이 ‘하야하롹(Rock)’ 콘서트를 진행했다. 공연은 주말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누군가를 ‘저격’하는 노래도 연달아 탄생하고 있다. 래퍼 조PD와 작곡가 윤일상은 신곡 ‘시대유감 2016’을 무료 배포했다. ‘길가에 버려지다’가 상처 입은 국민들을 어루만지는 노래라면 ‘시대유감 2016’은 정권을 향한 비판을 직접적으로 쏟아낸다. 윤일상은 “작금의 현실을 참담하고 답답한 심정으로 바라보며 만들었다. 마음껏 공유하시길 바란다”고 밝혔다. 래퍼 제리케이의 ‘하야해(HA-YA-HEY)’, 김디지의 ‘곡성(GOOD PANN)’, 오왼 오바도즈의 ‘하이포크리트(Hypocrite, 위선자)’ 등 힙합 뮤지션들의 디스곡 발표도 줄을 이었다.
소속사 드림팩토리 건물에 “박근혜 하야하라”는 현수막을 내걸었던 가수 이승환은 마음이 맞는 동료 뮤지션들과 함께 대국민 위로가 ‘길가에 버려지다’를 발표했다. 이승환, 이효리, 전인권이 부른 버전이 지난 11일 공개된 데 이어 18일에는 100여 명의 뮤지션들이 ‘길가에 버려지다’ 파트2가 공개됐다.
“분노와 부추김이 아닌 위로가 우선인 음악”이라고 이승환은 말했지만, ‘길가에 버려지다’가 상기시키는 사건은 비교적 분명하다. 그리고 이 곡의 뮤직비디오는 사건들을 더욱 노골적으로 지목한다. 팽목항을 배경으로 시작된 영상은 차마 신겨주지 못한 운동화를, 단원 고등학교의 교실을, 끝내는 아이들의 영정사진과 유가족들의 설움을 보여준다. 정치인들 몇 사람의 얼굴에 이어, 이미 이륙한 비행기를 회항시킨 항공사 부사장의 얼굴, 고공 농성중인 노동자들의 모습을 차례로 비추는 의도 또한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은 “버티어 서라”는 헤큐바(김금미 분)의 외침으로 막을 내린다. 기원전 415년에 쓰인 원작이 2016년의 관객들에게 유의미한 울림을 남긴다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현상인가는 모르겠다. 하지만 버티고 서면, 분명 하나 쯤은 뚫고 나온다. 송곳 같은 음악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