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엔터 정시우 기자]
‘누구지?’ 그의 존재를 처음 인식한 건 지난해 싱가포르에서 열린 ‘캡틴 아메리카: 시빌워’ 아시아 투어 현장에서였다. 큰 키 때문에 어디에서든 주목 받았을 법한 그는, 한국 기자단 사이에서 내내 조용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배급사 관계자인가? 수줍은 사람인가 보네.’ 그런데 웬걸. 조 루소 감독과 크리스 에반스, 세바스찬 스탠, 안소니 마키의 추임새는 물론 작은 농담 하나도 놓치지 않고 유들유들하게 전달하는 남자. 수줍은 성격인 줄 알았던 남자는 (주형준) 통역사였다. 윌 스미스가 ‘애프터 어스’로 한국을 찾았을 때는 그의 비트박스에 맞춰 통역도 랩으로 했다고 하니, 사람을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본 셈이다.아마도 주형준 통역사는 한국을 찾는 할리우드 스타들이 가장 친밀하게 의지하는 사람 중 한명일 것이다. 스타들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들의 귀와 입이 돼 주는 사람. 통역사는 단순히 언어와 언어 사이를 잇는 가교가 아니다. 외국어를 머리로 접수한 후, 그것을 가장 알맞은 모국어 문장으로 변환하고, 정확하게 표현하기까지. 매순간 선택에 놓인 그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을 전달하는 메신저이기도 하다. 통역사의 능력은 현장의 분위기를 좌지우지하기도 하는데, 해당 영화에 대한 이해가 없는 통역은 ‘죽은 말’과도 같다. 그런 점에서 주형준 통역사의 영화에 대한 높은 이해와 유연한 태도는 현장에서 자주 빛을 발하곤 한다. 통역을 하기 위해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영화가 좋아서 통역을 하고 있다는 주형준 통역사를 만났다.
Q. 통역하시는 걸 보면, 제스처나 어휘 선택에서 미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높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혹시 유학생활을 하신 건가요?
주형준: 초등학교 때 미국 캘리포니아로 건너갔어요. 디즈니랜드와 가까운 곳에서 6년을 살았죠. 미국 영주권을 갖고 있었기에 그곳에서 계속 살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애국심이 불타는 분이셨어요. “한국 남자는 군대도 가고, 한국에서 대학을 나와야 한다. 아니면 도피성 유학으로 오해를 받는다” 하시면서 가족을 데리고 다시 한국으로 들어오셨죠. 그때가 LA폭동이 일어나기 딱 일주일 전이었어요.
Q. 아버지의 선택으로 인생이 다시 한 번 바뀐 셈이군요.
주형준: 네. 그렇게 다시 한국 생활을 시작했죠. 제가 사회학을 전공했는데 당시 한국에서 IT붐이 일었어요. 이렇게 이야기 하면 제 학번(98학번)이 대충 추정이 되시겠죠?(웃음) 대학생일 때 IT산업체에서 병역특례 복무를 했어요. IT 전공은 아니었지만 영어를 할 줄 아니까 쓰임이 있었던 거죠. 당시 IT 바닥에 통역을 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거든요. 병특을 하면서 해외투자 유치나 미팅, 컨퍼런스를 주관했어요. 졸업 후 경영컨설팅 회사에서 일 하다가 2009년도에 함께 일하던 몇 분과 독립해서 지금의 회사를 차렸어요.
Q. (건네받은 명함을 보며) 안 그래도 명함을 받고 좀 놀랐는데요, 통역만 하시는 게 아니군요. 몸담고 있는 곳은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 회사인가요.
주형준: 대기업/외국계 기업들에게 신규 사업을 제안해주거나, 사업타탕성을 검토해 주는 회사에요. 한국기업이 해외에 진출하는 걸 돕거나 반대로 해외 기업이 한국에 들어올 때 마케팅 전략을 짜 주기도 하고요. 저는 경영컨설팅 일을 하면서 동시에 통역을 하고 있어요. 영화 외에도 자동차, 의학, 법률, 인수합병, 해외진출… 그러니까 정치를 제외한 모든 통역을 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Q. 아무리 봐도 영화와 인연이 닿을만한 지점이 보이지 않는군요. 어떻게 영화 관련 통역을 하게 되신 건가요.
주형준: 그게 참 재미있는 게, 경영컨설팅 프로젝트를 하다가 연을 맺게 된 경우에요. 2009년도였어요. 이병헌 씨의 할리우드 진출작 ‘지.아이.조-전쟁의 서막’이 미국에서는 굉장히 잘 알려진 프렌차이즈였잖아요? 반면 한국에서는 해당 영화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었어요. 또 하나의 작품은 ‘스타트렉: 더 비기닝’. 감독 J.J. 에이브람스는 유명했지만 당시만 해도 크리스 파인이 국내에서 그리 인지도 있는 배우가 아니었어요. 두 영화가 한국시장에서 어떨지에 대한 사업타당성 검토를 제가 맡게 됐어요. 검토 결과가 좋아서 ‘내한 기자회견을 추진하자’가 된 거죠.
Q. ‘스타트렉: 더 비기닝’ 기자회견의 경우 말씀처럼 감독이 배우보다 워낙 유명하던 때라 J.J. 에이브람스에게 기자들 질문이 몰렸던 것으로 기억해요.
주형준: 맞아요. J.J.에이브람스는 ‘미션 임파서블’ ‘로스트’ 등으로 이미 유명할 때였죠. 이 분이 진짜 천재에요. 너무 머리가 좋으니까 가는 나라마다 통역사들을 ‘작살’을 냈나 봐요. 가령 중국에 가면 중국필름 역사부터 중국 배우의 필모그래피 등 예상 밖의 정보를 언급하니까 통역사들이 소화를 못한 거예요. ‘스타트렉: 더 비기닝’ 배급사인 CJ엔터테인먼트가 이 사실을 알고 저에게 “네가 우리 마케팅 전략을 다 알고 있으니, 감독 통역도 맡아 볼래?” 제안을 해 왔어요. 그게 제 영화 관련 첫 통역이었던 거죠. 통역을 CJ에서 굉장히 좋게 봐 줬어요. 이후 ‘몬스터 vs 에어리언’으로 한국을 찾은 드림웍스 CEO 제프리 카젠버그의 통역도 맡겨 주셨고, 지금까지 일이 이어지고 있죠.
Q. 지금 영화 분야에서 통역을 하시는 분이 얼마나 되나요?
주형준: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제가 알기로는 다섯 분 정도가 주로 하시는 것 같아요. 서브로 하는 분까지 하면 열 분 정도 되지 않을까 싶고요. 저는 통번역대학원을 나오지 않았어요.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고 하는 거죠.(동시통역사의 국가 공인 자격증이 없다. 대신 통번역대학원을 나오면 동시통역사로 인정해준다.) 그럼에도 제가 가진 장점이라면, 말하는 이들이 지닌 감성코드를 깊이 있게 읽어내려고 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Q. 감성코드라고 하셨는데, 사실 대화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뉘앙스죠. 뉘앙스를 알아채려면 그 나라 문화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고요. 그런 건 아무래도 외국생활을 한 분들이 유리하지 않을까 싶어요.
주형준: 제 경우엔 사춘기 시절을 미국에서 보냈기에, 감성적인 것들이 영어에 조금 더 특화된 면이 있어요. 그런데 사실 제가 이중인격자 면모가 있어요.(웃음) ‘경영컨설턴트 주영준’은 차분하고, 객관적이고, 분석적인 면모가 커요. 하지만 통역사 마크주(영어 이름)가 되면 감수성이 풍부해지고, 현실보다는 꿈과 이상을 바라봅니다. 굉장히 다르죠.
Q. 실제로 하고 계신 두 가지 일의 특성이 상당히 다른 것 같습니다.
주형준: 맞아요. 기업 쪽 일은 드라이하고 객관적이어야 하고 수치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일이 많아요. 반면 이 쪽은 감성적이고 정서를 전해야 하고 감동을 줘야하죠. 팩트를 전달해야 하는 건 같지만, 영화 관련 통역을 할 때는 그 위에 감동을 전달하려고 노력합니다. 가령 윌 스미스가 아들 제이든 스미스와 ‘애프터 어스’(2013년)로 한국을 찾을 때에요. 레드카펫 행사를 마치고 스미스 부자가 한 상영관에서 무대 인사를 했어요. 영화 소개를 부탁하자 제이든이 관객석으로 뛰어 올라가더니 “애프터 어스~Yo”하면서 랩으로 줄거리를 소개하는 거예요. 윌 스미스는 그런 아들의 랩에 맞춰 붐 박스를 넣어주고요. 분위기가 확 달아올랐죠. 그런데 장난기 많은 윌 스미스가 저에게 “잠깐만! 통역도 랩으로 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걸 흔쾌히 받았죠. 윌 스미스의 비트 박스에 맞춰서 랩으로 통역을 했는데, 그걸 굉장히 좋아해 주셨어요. 통역을 하는데 있어 감정을 전달하는 게 정말 중요하다는 걸 알았죠.
Q. 통역의 중요성은 비단 말을 전달하는데 있지 않다고 생각해요. 통역사의 기질에 따라 행사 분위기가 축 처지기도 하고 반대로 활기차 지기도 하죠.
주형준: 사실 팩트는 정보화 시대이기에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어요. 우린 그 사람의 감성을 만나보고 싶은 거잖아요? 그래서 한국으로 초대를 하는 것이고요. 그에 맞게 통역을 하려고 노력해요.
Q. 통역을 준비할 때 어떤 점에 각별히 신경 쓰시나요? 노하우가 많이 쌓이셨을 텐데요.
주형준: 스타일을 파악해 두면 도움이 됩니다. 가령 J.J. 에이브람스, 제프리 카젠버그,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경우 감성보다 디테일을 중요시해요. 중요하게 생각하는 디테일들은 다른 곳에서도 말하고 다니는 경우가 많죠. 통역하기 전에 그 분들의 인터뷰나 다른 기자회견 동영상들을 유튜브에서 찾아보면 ‘아, 이 분들이 이 작품에서 이걸 강조하고 싶어 하는 구나’가 잡혀요. 그걸 미리 숙지해 두면 통역할 때 한층 수월합니다.
Q. 통역사가 해당 영화의 정보를 얼마나 알고 있느냐, 소재에 대한 전문성이 얼마나 있느냐 역시 중요합니다. 특히 ‘덕후’라고 하죠? ‘스타워즈’나 ‘스타트랙’의 팬들은 영화에 대해 전문가 수준이기에 대충하면 큰일 나죠.
주형준: 해당 분야에 대한 관심은 정말 중요해요. 통역 잘 하시는 분들을 보면 딱 느낌이 와요. ‘아, 이 분야에 정말 관심을 가지고 통역을 하고 계시는 구나’ 알 수 있죠. 그런 점에서 어린 시절 미국에서 습득한 것들이 저에겐 무척 큽니다. 미국에 처음 갔을 때 영어를 못했어요. 영화를 굉장히 좋아했는데 마침 도서관에서 비디오테이프를 무료로 대여해 줬어요. 영어 익힐 방법을 영화에서 찾은 거죠. 그때 영화란 영화는 다 봤어요. ‘벤허’ ‘쿼바디스’ ‘메리 포핀스’ ‘십계’ ‘대부’, ‘스타워즈’ ‘스카페이스’ 등을 보며 자랐죠. 좋은 자양분이 돼 주고 있는 것 같아요.
Q. 통역을 하다가 정신이 번쩍 드는 순간도 있으시겠죠.
주형준: 그럼요. 저도 해프닝이 몇 번 있었어요. 장동건 씨 주연의 할리우드 영화 ‘워리어스 웨이’(2010년)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제작발표회를 했어요. 제작을 맡은 ‘반지의 제왕’ ‘매트릭스’의 배리 오스본과 보람엔터테인먼트의 이주익 대표님, 장동건 씨가 참석했죠. 당시 이주익 대표님이 제작한 탕웨이-현빈 주연의 ‘만추’도 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였는데, “가장 보고 싶은 영화가 무엇인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배리 오스본이 ‘만추’를 언급했어요. ‘만추’ 제목을 아마 영어로 말했을 거예요. 제가 무슨 영화인지 헷갈려 하니까 옆에 계시던 이주익 대표님이 “만추! 만추!”라고 저에게 속삭였는데, 그걸 잘못 알아듣고 “네. 가장 보고 싶은 영화는 ‘만취’입니다”라고 통역을 한 거예요. 순간 기자회견장 전체가 빵 터졌어요. 장동건 씨 배꼽 잡고, 이주익 대표님 얼굴 빨개지시고. 다들 웃는데 저는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죠. ‘큰일 났구나. 클레임 들어오겠구나’ 했는데, 기자회견 후에 이주익 대표님 얼굴이 오히려 환하신 거예요. 알고 보니, 제 실수를 기자 분들이 재미있는 해프닝으로 기사화 해 주시면서 ‘만추’ 홍보가 된 거죠.(웃음) 이후 장동건 씨는 저만 보면 “어이, 만취!”하곤 해요.
Q. “두유 노 김치” “두유 노 강남 스타일?” 같은 질문은 이제 많은 이들이 치를 떠는 질문입니다.(웃음) 한국 영화에 대한 질문도 적지 않게 등장하는데요,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게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가 아닐까 싶어요. 이런 질문이 나올 거라는 걸, 배우들에게 미리 알려주나요?
주형준:합니다.(웃음) 홍보 쪽에서 미리 “이러 이러한 질문이 나올 수 있으니 좀 알아 봐 둬라”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올드보이’의 경우 해외에서 상도 받고 정말 유명하잖아요? 내용도 내용이지만, 영화에 담긴 박찬욱 감독님 특유의 영상미를 할리우드 배우들이 진짜 좋아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Q. 가장 가까이에서 할리우드 배우를 만나고 계신 셈이에요.
주형준: 정말 많이 만났어요. 그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분은 브래드 피트. ‘머니 볼’(2011년) ‘월드워Z’(2013년) ‘퓨리’(2014년)로 한국에 세 번 내한했는데, 모두 제가 통역을 했어요. 특히 ‘머니 볼’은 본인이 처음으로 제작한 작품이라 애정이 많았어요. 애정이 많은 만큼 ‘머니 볼’이 얼마나 훌륭한 영화인가를 저를 붙잡고 굉장히 열심히 세뇌시키더라고요.(웃음) 사람이 정말 좋아요. 사람 좋고, 착하고, 잘생겼는데, 제작까지 잘 하는! 괜히 그를 ‘빵 아저씨’ ‘빵 형’이라고 하는 게 아니더라고요. 스타 특유의 권위의식이 없어요. 함께 온 스태프들과도 굉장히 막역한데, 15년을 함께 했다고 하더라고요. 자기 사람을 굉장히 잘 챙기는 느낌이었죠. 윌 스미스도 그렇고 잘 되는 배우는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Q. 통역을 하면서 성취가 컸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주형준: ‘워터 디바이너’(2015년)로 내한한 러셀 크로우가 생각나네요. 당시 러셀 크로우 스케줄이 상당히 타이트 했어요. 게다가 기자회견 전에 몇몇 문제가 있어서 살짝 예민해 있었어요. 사실 배우로만 오면 편해요. 그런데 ‘워터 디바이너’는 러셀 크로우가 연출도 겸한 작품이에요. 제작자나 감독으로 오면 ‘스크린 수 협의부터, 마케팅 비용은 누가 지불할 것인가’ 하는 비즈니스 적인 측면이 끼어드니까 예민해져요. 어수선한 가운데 러셀 크로우가 무대에 올라왔는데, 모드 전환이 잘 되게끔 하려고 긴장을 많이 했던 현장이에요. 다행히 잘 돼서 보람도 컸죠.
Q. 내한 당시 러셀 크로우가 JTBC ‘뉴스룸’에 출연해서 손석희 앵커를 만났어요. 용산 전쟁기념관에도 방문하는 등 3박 4일 동안 인상적인 홍보활동을 펼친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작품에 대한 애정이 크게 반영된 것이겠군요.
주형준: 그렇죠. 애착이 그만큼 큰 거죠. 러셀 크로우가 호주 럭비팀 구단주이기도 해요. 그리 잘 하는 팀이 아닌데, 그 해에 우승을 했나 봐요. 어느 날 러셀 크로우로부터 소포 하나가 왔어요. 구단 팀 모자와 손수 쓴 편지를 보내왔더라고요. “당신도 나만큼 내 작품을 사랑해 준 것 같다. 나의 마음을 열정적으로 잘 전해줘서 고맙다.”라는 편지였는데, 정말 감동적이었죠. 윌 스미스도 랩 통역 이후에 편지를 보내왔어요. 그럴 때 더할 수 없는 성취감을 느낍니다.
Q. 반대로 통역하기 까다로운 경우도 있을 텐데요.
주형준: 감독들의 경우 언어를 모르더라도 통역사가 제대로 의미를 전달하는지 바로 알아요. 자기가 말한 어감이 다르게 통역되면 표정이 살짝 굳어지죠. 아무래도 감독들은 디테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조금 더 신경이 쓰였던 분은 ‘굿 다이노’(2016년)의 피터 손 감독님. 이 분이 디즈니 픽사 최초 한국계 감독이세요. 한국어 스피킹은 안 되지만 리스닝은 되시기에 통역할 때 긴장이 더 됐죠. ‘쿵푸팬더3’(2016년)로 한국을 찾았던 재미교포 제이퍼 여(여인영) 감독님도 같은 경우고요.
Q. 긴 말을 옮길 때 메모를 하시잖아요? 필기 노하우가 있으신가요.
주형준: 통역사마다 방식이 다를 텐데 저는 사고의 흐름으로 적습니다. 주요 키워드를 메모하고, 사고의 흐름과 주요 메시지를 캡처 하면서 그 흐름 옆에 디테일한 내용들을 덧붙여요. 이후 머릿속에서 한글로 다시 재구성한 후 연기를 하는 거죠.
Q. 짧은 시간에 효과적으로 말의 징검다리를 넣는 작업인데요, 고민도 될 것 같습니다. 말 하는 이의 단어를 최대한 있는 그래도 살리는 것이 좋은 통역인가, 아니면 선택 어휘는 조금 달라도 말하는 이의 의도를 최대한 살리는 것이 좋은 통역인가. 이런 고민이 있을 것 같아요.
주형준: 스피커가 하고자 하는 말의 핵심을 적확히 옮겨서 듣는 이의 마음에 와 닿게 할 때, 그것이 진짜 훌륭한 통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통역사가 이야기하길, 넬슨 만델라가 그랬대요. “당신이 만약 어떤 사람과 그가 이해하는 언어로 말한다면 그는 머리로 받아들이지만, 그의 언어로 말한다면 그는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라고 말이죠. 넬슨 만델라가 원래 소통의 천재시잖아요? 소통을 위한 여러 노력을 하셨던 것 같아요.
Q. 현장에서 난감한 질문이 나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떻게 대처하시나요.
주형준: 있는 그대로, 느낌을 그대로 전달해 드려요. 이 분들은 다 프로세요. 있는 그대로 통역을 해드려야 상황에 맞는 대처를 하신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그렇고요.
Q. 경영컨설팅 일을 하고 계시니 주 수입이 통역은 아닐 텐데요, 통역만 한다면 어떨까요. 괜찮은지요.
주형준: 나쁘지 않게 주십니다.(웃음) 그런데 사실 엔터테인먼트 분야 통역은 너무 많은 분들이 하고 싶어 하세요. 페이를 많이 안 줘도 하겠다는 분들이 많이 계시기에 엔터 쪽 통역 페이는 높을 수가 없어요. 다른 분야보다는 조금 낮은 것으로 알아요.
Q. 통역으로 이루고 싶은 건 어떤 그림인가요.
주형준: 한국 영화가 해외에 갈 때 마우스피스가 필요하잖아요? 그런 부분에서 기여를 하거나 함께 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으면 좋겠어요. 영화 산업적인 측면에서 한국 영화의 해외 확장에 도움이 되는 일. 그것이 제가 꿈꾸는 일입니다.
Q.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2013년)를 보면 지구횡단 기차에 갇힌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실시간 ‘첨단 통역기’를 통해 의사소통을 해요. 이런 실시간 통역 기술이 상용화 된다면 어떨까요. 아무래도 가장 큰 피해는 통역사일 텐데요.
주형준: 그게 통역사들 사이에서 나름 이슈 아닌 이슈이긴 해요. “언젠가는 올 것이다”라는 의견이 많아요. 실제로 인공지능이 80-90%를 소화하는 수준까지는 온 것 같아요. 하지만 언어의 맛이라는 게 있잖아요. 감성이 가미된 나머지 10-20%는 아직 인공지능으로 어렵다고 생각해요. 통역이라는 것은 순간을 압축해서, 그 문화를 이해하면서 해당 문화에 맞게끔 다시 재공연/재연출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감성의 영역이 분면 있죠. 이 분야는 인공지능이 조금 더 걸리지 않을까 싶어요.
Q. 통역사 주형준을 표현할 수 있는 영화 대사가 있을까요.
주형준: 제가 ‘대부’를 정말 좋아해요. ‘대부’는 거의 모든 대사가 명대사인데, 그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말론 브란도의 “I’m gonna make him an offer he can’t refuse.(그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지.)”입니다. 저는 인생에 그런 기회들이 계속 온다고 믿거든요. 어떤 우주의 존재가 우리에게 기회를 준다고 생각해요. 그런 기회가 왔을 때 놓치고 싶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