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①에서 계속
캐릭터 특성상 눈빛을 사용할 수 없었던 정인지가 선택한 무기는 '목소리'였다. 정인지는 유모의 목소리 톤을 잡기 위해 상대역인 도경수의 연기를 철저하게 분석했다.
"대본에는 유모에 대한 단서가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역으로 요한의 대사를 통해 유모를 유추했죠. 도경수 배우가 해석한 요한의 톤이 생각보다 가볍고 살짝 떠 있는 느낌이더라고요. 그렇다면 유일한 안식처인 내가 더 낮은 톤으로 무게중심을 잡아줘야 그를 안정적으로 받쳐줄 수 있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자신의 목소리 톤을 '영업비밀'이라며 너스레를 떤 그는, 요한의 귓속말을 듣고 터뜨린 기괴한 웃음소리 역시 철저한 계산의 산물이었다고 털어놨다.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이질적인 웃음소리를 내야 시청자들에게 해당 장면이 더 각인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단다.
드라마 제목 '조각도시'처럼, 정인지 역시 유모라는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불필요한 감정들을 깎아내고 덜어냈다. 그가 덜어낸 것은 '분노'였다.

"유모에게서는 분노가 보이지 않아요. 그 감정은 요한의 몫이라고 생각했죠. 유모는 오직 '내 아들 요한이 즐거우면 나도 즐겁다'는 생각으로 움직입니다. 고모를 죽일 때조차 분노보다는 요한의 걸림돌을 치워준다는 느낌으로 접근했어요."
이처럼 유모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었지만, 카메라 밖 인간 정인지는 삶을 즐길 줄 아는 건강한 에너지로 가득 차 있었다.
2001년 드라마 '학교4'로 데뷔해 어느덧 20년 넘게 연기 외길을 걸어온 베테랑 배우. 긴 무명 시절과 불안함 속에서도 그가 흔들리지 않고 단단한 내면을 다질 수 있었던 비결은 달리기와 가족이었다.

정인지는 2년 전 러닝을 시작했다. 이제 러닝은 그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루틴이 되었다.
"뛸 때는 이어폰을 꽂지 않아요. 오직 제 숨소리와 발소리에만 집중하며 10km를 달리죠. 계속 뛰다 보면 제 발소리가 저를 따라오는 듯한, 저와 함께 발맞춰 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 묘하게 안심이 돼요. 잡념을 비워내는 저만의 명상법인 셈이죠."
데뷔 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조바심은 없었을까. 정인지는 고향 부산에 계신 아버지를 언급했다. 그에게 아버지는 가장 든든한 멘토이자 정신적 지주였다.
"이 일을 하면서 지칠 때 고향에 내려가 아버지와 대화를 많이 해요. 아버지는 늘 제게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살아라'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어릴 땐 '지금보다 더 잘돼야 하는데', '난 왜 이렇게 더디게 갈까' 조급하기도 했죠. 하지만 아버지 말씀처럼 억지로 욕심내지 않고, 내 앞에 놓인 징검다리를 하나씩 건너다보니 어느새 지금의 제가 있더라고요."

'조각도시'로 강렬한 악역 연기를 선보인 정인지의 시선은 이미 다음을 향해 있었다. 그는 차기작으로 40대의 로맨스를 꿈꾼다고 밝혔다.
"40대 후반, 50대 초반이 주인공인 사랑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요. 풋풋한 첫사랑과는 결이 다른, 그 연령대만 보여줄 수 있는 깊고 진한 멜로에 욕심이 납니다. 배우로서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의 스펙트럼을 넓혀보고 싶습니다."
인터뷰를 갈무리하며 인간 정인지, 그리고 배우 정인지로서의 다음 목표를 물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결심한 듯 비장하게 공약을 걸었다.
"사실 마음속으로만 고민하던 건데, 뱉어버려야 실천할 것 같아요. 내년에는 꼭 하프 마라톤 완주에 도전하겠습니다. 그리고 연기적으로는 이번 '조각도시'가 악역의 시작점이 됐으면 해요. 다음번엔 시력이 아주 좋은 캐릭터로,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제대로 괴롭히는 악역도 해보고 싶거든요. 하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