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순탁 음악평론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변함없이 1위 아니면 2위다. 선선한 가을 바람을 타고 인기가 식기는커녕 되레 상승보합세를 유지하고 있다. 이 정도면 가히 2017년의 노래를 넘어 27년 커리어의 정점이라 할 만하지 않을까. 그래. 맞다. 가수 윤종신의 ‘좋니’에 관한 얘기다.
까놓고 말해볼까. 윤종신이 보유한 두터운 디스코그라피들 중 “‘좋니’보다 좋다”고 말할 수 있는 노래, 10곡은 훌쩍 넘는다고 확신한다. 비단 나뿐일까. 아마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 이렇듯 엄청난 히트를 기록할 거라고는 그 누구도, 심지어 윤종신 본인도 예상하지 못했을 게다. 그럼에도, ‘좋니’가 그의 다른 좋은 곡들을 뛰어넘어 오랜 기간 스포트라이트 받고 있는 현상에는 분명한 이유가 존재한다. (오랜만에 등장한, 노래방에서 노래하고픈 욕망을 자극하는 곡이기 때문이라는 분석에 동의하지만, 글의 논지에 포커스를 맞추기 위해 더 이상 언급하진 않겠다.)
여러분은 창작이라는 행위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나. 뭐, 사람마다 다채롭게 여러가지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글쎄. 내가 봤을 때 윤종신이라는 인물에게는 ‘건설적으로 삐딱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아, 참고로 이 표현은 내가 만들어낸 게 아니다. ‘은하영웅전설’의 작가 다나카 요시키가 인터뷰에서 소설 속 주인공 양 웬리를 언급할 때 꺼낸 말이다. 어쨌든, 그냥 삐딱한 게 아니라 건설적으로 삐딱했기에, 나는 윤종신이 27년간 자기만의 커리어를 쌓을 수 있었다고 믿는다.
그 증거가 바로 ‘월간 윤종신’이다. 매달마다 조금씩이나마 곡(들)을 발표하는 이 ‘건설적인’ 계획은 위험부담이 상당할 수 있었다. 창작이라는 게 강제성을 부여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추어가 영감을 찾아 헤맬 때 프로는 일하러 나간다”는 명언처럼, 윤종신은 이 프로젝트를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가꿔왔다. 과거 그의 공언처럼 ‘음악의 생활화’를 이뤄낸 것이다.
이후 매달 꾸준히 챙기는 팬들이 늘어나면서 결국 ‘좋니’로 큰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 그건 바로 그가 음악을 ‘즐기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음악의 생활화’라는 언급이 다시 호명되어야 한다. 고통은 창작의 중요한 원천이지만 그것이 생활화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무엇보다 고통을 동력으로 음악했던 사람들을 떠올려보라. 그들 중 대부분이 세상을 일찍 떠났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불멸의 천재’ 등의 (관점에 따라서는 허망하다 할) 수식을 얻지 않았나. 그렇다면 역으로, 긴 인생에서 음악을 생활화하려면 어떤 자세가 요구될까. 고통이 아닌 그것을 즐길 줄 아는 태도가 필수적일 것이다.
윤종신은 “음악은 나에게 놀이”라는 표현으로 이를 압축한다. 예능이든 음악이든, 그에게는 그저 하나의 놀이터인 셈이다. 사람들은 쉽게 타인에게 “즐기라”고 충고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또, 대개의 사람들은 음악이라는 것을 특수한 경험으로부터 비롯되는 특별한 행위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요컨대, 이것을 음악(가)에 대한 오랜 선입견이라고 가정한다면, 그는 어떤 의미에서 자그마한 혁명을 시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여러모로 주류의 법칙에서 벗어나 있다는 측면에서 그의 건설적인 ‘삐딱함’은 증명된다.
요한 하위징아는 자신의 저서 ‘호모 루덴스’에서 모든 문화는 ‘놀이’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놀이야말로 모든 창조의 원동력이었다는 것이다. 우리 가요계에서도 수많은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들이 존재해왔다. 여러 명이 후보로 거론될 수 있겠지만, 그 맨 앞줄에 윤종신의 이름이 새겨져 있을 것임은 분명하다.
운명을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게 되면 자신감은 저절로 커지는 법이다. ‘좋니’의 대규모 흥행으로 그의 독보적인 위치는 한층 공고해졌다. ‘좋니’ 이후 윤종신의 미래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이 글의 일부는 글쓴이의 저서 ‘청춘을 달리다’에서 빌려왔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