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엔터 이주희 기자]
‘귀향’ ‘아이캔스피크’, 그리고 올해 ‘허스토리’까지 충무로에서 위안부에 대한 관심이 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영화 ‘허스토리’의 모티브가 된 관부재판은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건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위안부의 존재를 인정하고 보상금을 지급한 최초의 판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잊혔던 것이다. 배우 김희애는 이러한 이야기를 꺼내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연기로, 진심을 내보였다.
“사실 처음엔 나도 관부재판이 뭔지 몰랐다. 혹시 나만 모르는 거 아닌가 싶어서 몰래 찾아보기도 했는데 결국 찾을 수가 없어서 정식으로 감독님께 여쭤봤다. 부끄러운 느낌도 있었다. 관부재판이 1990년대인데 위안부를 인정한 최초의 사례였다는 게 놀라웠고, 일어난 일인데도 인정받는 게 정말 힘든 일이라는걸 깨달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연기로 진심을 표현해야 하는 거라고 믿었고 그게 최선이었다. 이번 작품을 하면서 너무 힘들었는데 할머니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을 겪으셨지 않나. 내가 이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스스로 채찍질 하면서 연기했다. 할머니들이 용기를 주신 거다. 영화로 작게나마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면 좋겠다.”
물론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 좋은 메시지가 들어있기 때문에 ‘허스토리’를 훌륭한 영화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김희애 역시 위안부 소재에 앞서 할머니들의 당당함에 더 끌렸다.
“위안부 영화에 대한 사명감으로 시작한 건 아니었다. 할머니들이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큰 상처가 있는 분들인데도 불구하고 재판에 나가서 당당하게 말씀하시고, 내가 맡은 문정숙 사장도 자기 재산을 다 털어서 일을 시작한다. 그 모든 게 인간적으로 마음에 와 닿았다. 여성과 남성이 아니라 한 인간의 승리이자 용기가 보였다. 통쾌함을 느꼈다.”
특히 ‘허스토리’는 자극적이지 않은 문제 해결법과 매력적인 캐릭터를 통해 완성도를 높인 영화다. 김희애가 연기한 문정숙은 부산에서 여행사를 운영하는 사장으로, 인간적인 매력과 카리스마로 사람들을 휘어잡는다. 김희애가 기존에 우아한 아우라로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조금 더 친근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이미지 변신이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다. 내가 아들 둘을 키우는데, 인생에서 오는 시너지가 상당한 것 같다.(웃음) 처음엔 캐릭터가 좋아서 덥석 하겠다고 했는데, 사실 이렇게 큰 숙제가 있을 줄 몰랐다. 중압감 때문에 촬영 마지막 날 분장실에서 처음으로 울었다. 어쩌면 내 반성이었 것 같다. 나도 나름 오래 연기를 해왔는데 ‘그동안 나 뭐한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아왔던 것에 허탈함이 섞이면서 막 눈물이 나더라. 이런 경험은 쉽지 않다. 귀한 거다. 내 연기 인생에서 큰 강을 건넌 기분이다. 나 말고 다른 선배들도 다 힘들었을 것이다. 큰 숙제 하셨다.”
‘허스토리’는 김희애 외에도 김해숙, 예수정, 문숙, 이용녀 등 관록의 배우들이 뭉친 영화이기도 하다. 여자인 배우들이 참여할 수 있는 작품은 많지 않은 가운데, 여자 배우들 중심으로 돌아가는 현장에서 김희애는 연기자로서 충만한 기쁨을 느꼈다.
“여배우로서 뭔가 해낼 수 있다는 작품을 만나기가 쉽지 않아서 이 배역이 감사한 것도 있다. 남자 배우들은 선택할 폭이 많은데 여자 배우들은 할 게 많이 없으니까. 예전엔 우스갯소리로 남자 배역 중 남는 것 있으면 내가 하겠다고 한 적이 있다. 할 사람 생각 안 나면 내가 머리를 자르고 나서겠다고 했다. 물론 여성 배우를 쓰기 위해서 작품을 만드는 건 코미디다. 가장 중요한 건 작품이 재밌어야 한다. ‘아이 캔 스피크’ 같은 걸 보면 재밌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감사한 영화다. 이번 영화에선 (고증이지만) 쇼트커트를 하고 자유롭게 연기를 했는데, 젊을 필요도 없고 예쁠 필요도 없었다. 여자를 떼놓고 배우가 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김희애의 연기 경력은 무려 35년. 최근에야 인식이 좋아졌지만 김희애가 연기를 막 시작했을 당시만 하더라도 여자 배우를 향한 시선이 날카로웠던 것이 사실이다. 김희애는 배우 일을 하면서 가정에도 충실한 아내ㆍ엄마로 사는 것에 대해서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고 털어놨다.
“인생은 이렇게 어려운가보다. 과거엔 연예인을 ‘딴따라’라고 불렀고 사회적 인식도 너무 열악했다. 빨리 이 생활을 그만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떤 인생이 안 힘들겠나. 그래도 가정에서 이해를 해줬는지 계속 연기를 했고, 그게 이어져서 현역으로 일하고 있다. 지나고 나니까 보는 분들도 익숙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다. 지금은 밝은 세상으로 나온 기분이다. 공짜는 없는 것 같다. 어려움을 겪은 만큼 결과도 값질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오래 살아야 하는 거 같다. 더 좋은 게 올 수 있으니까,(웃음) 영화 ‘1987’을 보면 윗세대들은 얼마나 황당한 일을 겪으셨나. 그런데 이제 그것이 잘못 됐다고 이야기하는 영화가 나온다. 우리 영화도 많은 분들이 보면서 조금 더 알게 되고 작게나마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김희애는 관객에게 “편안한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우린 운명 따라 선택되어지는 직업이다. 주어진다면 열심히 하고 싶다. 그래도 나문희, 윤여정 선배들 같이 그 연세에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지 않나. 희망이 보이긴 한다”라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