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엔터 윤준필 기자]
한 분야의 창시자, 유행을 선도한 사람, 특정 영역에서 범접할 수 없는 공을 세운 사람을 우리는 '○○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런 점에서 'K팝의 아버지'는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총괄 프로듀서일 것이다. 이수만 프로듀서는 가요계에 아이돌이란 개념을 정립하고 세계 속 대한민국의 자랑거리 K팝을 탄생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이수만 프로듀서는 1995년 SM엔터테인먼트를 창립했다. 이후 이 프로듀서가 SM엔터테인먼트를 이끌어온 길은 K팝의 성장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이 프로듀서는 1990년대 후반 국내 가요계에 아이돌 문화를 정착시킨 인물이다. 그는 철저히 기획된 아이돌의 시대가 올 것을 예측했고, 1996년 SM엔터의 첫 번째 아이돌 H.O.T.를 선보였다. H.O.T에 이어 걸그룹 S.E.S.가 데뷔했고, 이후 신화, 플라이투더스카이, 보아,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에프엑스, 엑소, 레드벨벳, NCT, 에스파 등 이수만의 손을 거쳐 27년이 지난 현재까지 수많은 스타들이 탄생하고 있다.
이 프로듀서는 K팝의 영토가 국내에서 그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H.O.T.의 인기가 한국에서 그치지 않고, 아시아 전역에서 인기를 얻자 데뷔 때부터 해외 진출을 염두한 가수들을 기획했다.
보아는 2001년 당시 만 13세의 나이로 일본에서 데뷔했다. 보아의 일본 현지 진출은 당시 SM엔터테인먼트로서 꽤 위험한 승부수였다. 보아의 일본 현지화는 큰 성공을 거뒀다. 여러 사례 중 하나로, 올해 초 방탄소년단(BTS)이 달성하기 전까지 보아는 무려 16년 동안 일본 오리콘차트에서 앨범을 100만장 이상 판매한 유일한 한국인 '밀리언셀러'였다.
보아는 일본으로 향하는 길을 열었고, 그 길을 따라 일본에 진출한 동방신기는 현지 가요계의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했다. 자본으로 승부를 보는 방법도 있었을 테지만, 이 프로듀서는 정공법을 택했다.
결과적으로 동방신기는 도쿄 돔 공연을 매진시킬 만한 티켓파워를 갖게 됐다. 2012년 동방신기는 도쿄 돔 공연 2회를 포함해 오사카, 요코하마, 나고야, 후쿠오카 등 일본 11개 도시에서 총 26회 공연을 열었는데, 당시 동원한 관객은 55만명, 약 960억 원의 수익을 창출했다.
2005년에는 또 다른 해외 진출 방법을 모색했다. 중국 진출을 위해 그룹 데뷔 때부터 중국인 멤버를 포함시켰다. 그 첫 그룹이 슈퍼주니어였다. 중국인 멤버는 현지 팬들을 '입덕'시키고, 슈퍼주니어가 현지에 진출할 때 좋은 매개가 됐다. 슈퍼주니어의 성공으로 이후 결성되는 대다수의 아이돌 그룹에는 외국인 멤버 1~2명이 포함되는 것이 공식처럼 여겨지게 됐다.
멤버 각각 초능력을 가지고 있는 엑소, 멤버 수와 멤버 영입, 팀 구성에서 자유로운 NCT, 현실과 아바타 세계의 결합 에스파 등 아이돌의 '세계관' 정립도 이 프로듀서의 혜안이 발휘된 것이다. 이 프로듀서는 대중이 단순히 음악뿐만 아니라 잘 만들어진 아이돌의 세계관 위에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초기 생태계를 구축했다.
이 프로듀서가 K팝이라는 콘텐츠와 함께 화두로 삼았던 것은 기술이었다. 그는 일찍이 VR, AR 등의 관련 산업에 관심을 보였다. 덕분에 모두에게 위기였던 코로나 시국은 이 프로듀서는 기회로 다가왔다. 그는 비대면 공연 '비욘드 라이브'라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고, SM이 보유한 IP를 온오프라인 플랫폼에 하나의 세계관으로 묶은 '광야'를 개척했다.
덕분에 SM은 모두에게 위기였던 코로나 시국을 기회로 삼아 2021년 사상 최대 매출액 7015억을 달성했다. 1995년 자본금 5000만원으로 세워진 회사가 27년 만에 약 7000억의 자산 규모를 가진 회사로 1만 4000배 성장한 것이다.
기업가로서 이수만에 호오는 개인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하지만 프로듀서로서 이수만은 대한민국 K팝이라는 새로운 문화 장르를 창시했고, 남보다 앞서 K팝 내에서의 흐름을 선도했다. 그가 우리 가요계에 뿌린 씨앗이 있었기 때문에 전 세계가 K팝을 향유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