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①에서 계속
메이필드호텔 이금희 셰프의 음식 철학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시간’이다. 메이필드호텔 한식당 봉래헌은 충북 괴산 메주로 직접 담근 된장과 2009년산 숙성간장을 씨간장으로 사용하는 등, 5성급 호텔 한식당 가운데서도 보기 드문 전통 장(醬) 문화 시스템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다.
특히 이금희 조리장은 시간이 빚어낸 씨간장의 깊은 풍미에 남다른 자부심을 보였다. 그는 어떤 인공적인 첨가물로도 흉내 낼 수 없는, 봉래헌만의 맛의 근원이라고 설명했다.
“씨간장에는 흉내 낼 수 없는 세월의 맛이 있어요. 오래될수록 짠맛은 줄고 단맛은 깊어지죠. 색도 점점 진해져서 마치 약(藥)처럼 느껴집니다. 이 씨간장이 떡갈비를 비롯한 봉래헌 요리 전체의 중심을 잡아줘요.”
이금희 조리장은 봉래헌 뿐만 아니라 한식당 '낙원'의 총괄도 맡고 있다. 메이필드호텔 서울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얼굴 '낙원'은 호텔이 문을 열기 전부터 있었던 곳으로, 시끌벅적한 사람 냄새와 깊은 맛이 공존하는 42년 전통의 갈비 명가다. 이 조리장은 이곳을 "3대가 함께 와서 추억을 쌓는 공간"이라고 소개했다.

"40년 전 아버지가 아들의 손을 잡고 왔던 곳인데, 이제 그 아들이 결혼해 또 자신의 아이를 데려옵니다. 한 단골 어르신께서 '내 손주에게도 낙원 갈비 맛을 보여주고 싶어서 같이 왔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요리사로서 그보다 더 큰 보람은 없더군요."
낙원의 시그니처 메뉴인 대갈비에는 타협 없는 원칙이 담겨있다. 소 한 마리를 잡으면 갈비뼈가 양쪽으로 나뉘는데, 이 중 가장 맛있는 부위 6대만을 엄선해 대갈비로 사용하고 있다. 워낙 나오는 양이 적어 귀한 부위지만, 마니아들은 그 맛을 잊지 못해 꾸준히 낙원을 찾는다.
이 조리장은 갈비 뿐만 아니라 겨울 별미 평양냉면을 강력 추천했다. 흔히 냉면을 여름 음식이라 생각하지만, 진짜 미식가들은 겨울 냉면을 으뜸으로 친다.
"냉면 맛의 핵심인 동치미는 겨울 무로 담가야 제맛이 납니다. 겨울 무 특유의 시원하고 단맛이 육수에 배어들 때 비로소 완벽한 평양냉면이 완성되죠."

지금은 여유로운 미소로 주방을 지휘하지만, 24년 전 시작은 전쟁터와 같았다. 허허벌판에 메이필드호텔이 들어서고 주방의 체계를 잡아가던 시절, 그는 한 달 내내 밤을 새우는 강행군 속에 코피를 쏟는 투혼을 발휘하며 기틀을 닦았다. 그 시간들은 지금 메이필드호텔 한식의 단단한 주춧돌이 됐다.
치열했던 시간들은 헛되지 않았다. 봉래헌은 우리나라 최초의 맛집 평가서 '블루리본 서베이'에 3년 연속 '리본 3개' 맛집으로 선정됐고, 서울시가 주관하는 '2025 서울미식 100선'에도 이름을 올렸다. 이금희 조리장 개인으로서는 2022년 '제49회 관광의 날' 기념식에서 국무총리표창을 수상하며 '한식 명장'으로 인정 받았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영광을 동료들에게 돌렸다. 특히 '흑백요리사2' 출연 이후 달라진 주방 분위기를 전할 땐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방송을 보고 직원들이 어디 가서 '우리 셰프님 TV 나왔어', '나 이금희 조리장이랑 같이 일해'라고 자랑을 한대요. 예전보다 더 큰 자부심과 책임감을 갖고 즐겁게 일하는 후배들의 모습을 볼 때, 제가 더 힘을 얻습니다."

이금희 조리장은 주방을 '오케스트라'에 비유했다 . 제아무리 뛰어난 지휘자도 단원 없이는 연주할 수 없듯, 최고의 요리는 재료 구매부터 손질, 조리, 서비스까지 모든 파트가 서로를 믿고 하나의 팀으로 움직일 때 완성된다는 생각이다.
그의 뚝심은 이제 '다음 세대'를 향하고 있다. 그가 지휘봉을 내려놓는 날까지 완수하고 싶은 마지막 소임은, 자신이 떠난 뒤에도 이 맛과 정성이 흐트러짐 없이 이어지도록 단단한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
"제가 현역에서 물러난 먼 훗날에도, 봉래헌과 낙원이 변함없는 맛으로 사랑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를 믿고 따라와 주는 후배들이 제가 닦아놓은 길 위에서 한식을 더 빛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저는 오늘도 주방에 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