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 채수빈이 MBC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이하 역적)에서 호연을 펼쳤다. 채수빈의 재발견이다.
채수빈은 ‘역적’에서 굴곡진 감정선을 가진 가령으로 분했다. 홍길동(윤균상 분)을 오래 짝사랑한 후 결실이 맺어져 행복하게 잘 사나 싶었건만, 서방이 연산(김지석 분)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길동의 복수를 위해 쾌활했던 과거를 지워내고 여악을 자처한다. 길동의 생존 소식에 기뻐하는 것도 잠시, 전장의 인질이 된 자신의 모습에 오열한다. 이후 길동과의 재회, 아기를 임신한 가령은 적극적이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러니까 가령은 인생사 길흉화복을 온몸으로 맞이하는 인물이다.
대의를 위해 악인을 택했다는 점에서도 가령은 인상적이다. 길동에게 “볼 장 다 봤으니 혼인하자”고 청혼했던 과거의 당찬 모습을 지우고, 연산의 귀를 물어뜯으면서 “죽어서도 내 망령이 네 잠자리를 찾아갈 것”이라고 일갈한다. 길동의 인질이 될 바에는 사랑하는 이의 앞날을 위해 그리고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낫다며 목숨을 끊으려고도 한다. 좀처럼 만나볼 수 없었던 주체적인 캐릭터다.
채수빈은 입체적인 가령의 모습을 훌륭하게 소화했다. 특히 가령이 선에서 악으로 변하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풀어냈다. 가령의 변화는 채수빈의 호연을 통해 당위성을 획득했다. 덕분에 시청자들은 큰 무리 없이 가령의 변신을 납득할 수 있었다.
또한 채수빈이 보여준 ‘장대 엔딩신’은 최고의 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남편을 만난 기쁨과 죽음을 앞둔 불안감을, 채수빈은 핏발 선 눈과 힘 있는 목소리, 떨림이 느껴지는 호흡으로 표현했다. 무게감 있는 사극물인 ‘역적’에서 주연으로서의 능력치를 증명해 낸 셈이다.

채수빈의 밀도 높은 표현력은 하루아침에 탄생한 게 아니다. 2014년 '원녀일기'를 통해 데뷔한 채수빈은 그동안 꾸준히 작품에 출연했다. 영화 ‘나의 독재자’에서 '배꼽티녀'라는 단역으로 시작하더니 2015년 KBS2 주말연속극 '파랑새의 집' 주연을 맡으며 서서히 얼굴을 알렸다. 이후 드라마 ‘발칙하게 고고’, 영화 ‘테이크 아웃’·‘엠보이’·‘밤과 함께’·‘로봇, 소리’ 등에 주·조연으로 출연했다.
채수빈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20%대가 넘는 시청률을 보여준 KBS2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다. 당시 채수빈은 귀한 집에서 어려움 없이 밝게 자란 조하연 역을 맡았다. 극 초반 짝사랑으로 설레는 마음을 드러낸 채수빈은 후반부 사랑 때문에 시련을 겪는 모습까지 무난하게 캐릭터를 소화했다. 주연보다는 조연에 가까운 인물이었지만 시청자들에게 눈도장을 찍는 데는 성공했다.
지난해에는 선배 조재현과의 2인 연극 ‘블랙버드’에 출연해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다. 조재현과 극명한 대립을 이루면서 작품의 한 축을 단단하게 지탱했다. 채수빈은 브라운관·스크린관에 안주하지 않고 연극으로 발을 넓혀 연기의 스펙트럼을 넓혔다.
모르긴 몰라도, 채수빈의 연기에 실망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좋은 배우를 발견했다. 채수빈의 대찬 행보가 벌써부터 기대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