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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웅의 아무말이나] 한국영화에 '플립' 같은 작품을 허하라!

[허남웅 영화평론가]

여름 극장가는 블록버스터로 몰리는 관객들 천지다. 23일 현재 '스파이더맨: 홈커밍'(7월 5일 개봉)은 685만 명이, '덩케르크'(7/20)는 개봉 3일 만에 135만 명이 관람했다. 26일 개봉한 류승완 감독의 '군함도'는 70%가 넘는 압도적인 예매율로 벌써 천만 운운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들 규모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예상치 못한 흥행으로 주목받는 작품이 있다. 할리우드 영화 '플립'이다. 국내 개봉은 지난 12일에 이뤄졌지만, 이 영화는 미국에서 2010년에 개봉했다가 본전도 회수하지 못하고 극장가에서 사라진 배경이 있다.

'플립'이 미국에서 만들어진 지 7년이나 지나서야 한국에서 지각 개봉한 이유? 지난번 칼럼 ‘극장 개봉은 이제 관객 손안에 있소이다’에서 다룬 적이 있는데, 그동안 '플립'은 한국에서 다운로드를 통해 네티즌 사이에서 그 재미가 회자되다가 정식 개봉 요청으로 뒤늦게 극장 개봉으로까지 이어졌다.

'플립'은 '스탠 바이 미'(1986),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 '미저리'(1990) 등을 연출한 로브 라이너 감독의 작품이다. 이 영화는 초등학생 소년 브라이스(캘런 맥오리피)와 소녀 줄리(매들린 캐롤)의 6년간에 걸친 첫사랑의 사연을 두 주인공의 관점에서 ‘교차 Flipped’하며 진행하는 로맨스물이다.

이 지면에서 '플립'에 관해 비평할 생각은 없고, 왜 이 작은 영화가 블록버스터들의 고래 싸움 속에서도 새우 등 터지지 않고 의미 있는 흥행 결과를 이루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여기에 한국영화계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는 생각에서다.

'플립'이 다루는 첫사랑의 소재는 흔하디흔하지만, 초등학생뻘의 소년과 소녀를 앞세운 로맨스는

한국영화계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이야기다. 주인공의 나잇대를 중고등학생과 대학생층으로 확장해 살펴봐도 한국의 청춘물은 ‘응답하라’, 청춘시대, ‘학교’ 시리즈와 같은 TV 드라마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뿐 영화는 거의 없는 상태다.

한국영화계는 언제부턴가 소년·소녀와 청춘의 사연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그러니 이들의 이야기를 개발할 생각도 없다. 1970년대 당시 고등학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하이틴'과 '얄개' 시리즈나 1980년대 대학생들의 낭만과 고민을 다뤘던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1987)와 '동키호테' 시리즈, 1990년대 입시경쟁에 허우적거리는 입시생들의 아픔을 어루만져줬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1990) 등이 큰 사랑을 받았던 것을 상기하면 한국영화 산업의 참 삭막해진 풍경이다.

지금의 청춘에게는 한국영화가 관심을 둘 만한 사연도, 특별한 이야기도 없는 걸까?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이미 고등학교 때부터 살인적인 입시 경쟁에, 대학에 들어가서도 오로지 취업할 목적으로 1학년 때부터 집과 도서실을 오가며 공부만 하고, 그렇지 않으면 대학 등록금과 하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에만 신경 쓰는 등 건져낼 만한 매혹적인 소재가 없다는 것이다. 말도 안된다. '실미도'(2003)의 극 중 설경구의 대사를 빌리자면, ‘비겁한 변명입니다!’

'플립'이 다루는 브라이스와 줄리의 첫사랑은 특별할 게 없다. 브라이스를 짝사랑하는 줄리, 그런 줄리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브라이스, 그렇게 티격태격하다 오해가 생기고 학교 행사로 벌어지는 일종의 ‘경매팅’을 계기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후 첫사랑을 완성하는 이야기다. 이를 브라이스와 줄리의 시점에서 각각 묘사해 소년과 소녀가 사랑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를 드러내는 형식이 다르다면 다른 점이다.

만약 한국에서 이와 같은 이야기로 아동 로맨스를 만든다고 하면 투자가 제대로 이뤄질까. 흥행에 검증된 장르를 편식하고, 티켓 파워가 보장된 배우를 선호하고, 천만 관객이 가능한 소재에만 관심을 두는 한국영화의 투자·제작 환경에서 '플립'과 같은 작품을 기대하는 건 언감생심이다.

바로 그와 같은 왜곡된 영화 산업 환경에서 다양성에 허기를 느낀 관객들이 '플립'을 찾고 있다고 분석해도 틀리지 않을 듯싶다. 거대한 볼거리에 지쳐 소박한 규모의 영화로 눈을 정화하기 위해, 자극적인 소재가 넘쳐나는 극장가에서 첫사랑과 같은 순수한 이야기로 위안을 얻으려고, 또래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가 반갑고 그래서 감정 이입하기 쉬우므로 '플립'을 찾는 관객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플립'에는 오래된 나무가 등장한다. 줄리는 이 나무 위에 올라 마을 전체를 조망하는 걸 즐긴다. 비슷한 집들이 모여 있는 마을에 이 나무가 있으니 보기에도 썩 근사하다. 근데 이 자리에 새로 집을 짓겠다고 어른들이 나무를 자르려고 한다. 지금 한국영화 산업의 상태가 꼭 이렇다. 유력 제작사들이 천만이라는 상징적인 숫자에만 현혹되어 미래를 보지 않고 다양성의 가치를 망각하고 있다. '플립'의 한국내 흥행은 그래서 중요하다. 한국영화 산업이 놓치고 있는 것을 우회적으로 가리키고 있다. 한국영화 산업에 '플립'과 같은 작품이 절실하다.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허남웅 영화평론가 edwo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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