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엔터 라효진 기자]
평범한 역을 맡아도 결코 평범해 보이지 않는 배우. 많은 사람들이 장동건의 얼굴을 떠올릴 것이다. 데뷔 이래 장동건을 미남의 대명사로 인식케 한 외모는 그를 스타덤에 올렸지만, 배우로서의 한계를 느끼게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 장동건이 영화 ‘브이아이피’에서 국정원 요원 박재혁으로 변신했다. 흔치 않은 직업, 드문 외모이지만 그는 최대한 힘을 뺀 연기로 여느 직장인들이 갖고 있을 법한 얼굴을 그렸다. 흑도 백도 아닌 회색의 평범성은 머리를 박박 깎고 진흙을 바른 채 등장했던 ‘해안선’만큼 파격적인 도전으로 보였다.
“영화 ‘태풍’을 찍을 때 국정원 직원과 만난 적이 있는데 의외로 평범한 회사원 같더라고요. ‘브이아이피’의 박재혁은 현장 요원에서 승진, 사무직으로 발령받게 됐다는 설정이 있었죠. 기존 국정원 요원 하면 첩보원 이미지가 강하지만, 이번엔 현실적으로 해 보려고 노력했어요. 박훈정 감독도 조직에 오래 몸 담은 부장님 같은 느낌으로 연기해 달라고 주문했고요.”
상상할 수 없지만 장동건에게도 직장인으로서의 경험이 존재한다. 1992년 MBC 공채 탤런트 21기 출신인 그는 시간에 맞춰 출퇴근을 하며 드라마 엑스트라로 차출되거나 전화를 받았다며 웃었다.
“직장 생활을 제대로 해 보지는 못했지만 어렴풋이 그 애환을 알 것 같은 건 당시 경험 덕이죠. 아침에 출근하면 출석부에 도장 찍고 탤런트실에 가서 대기하고 있는 게 일상이었어요. 원래는 2년 계약으로 출발하지만, 저는 ‘우리들의 천국’에 캐스팅돼서 6개월 정도 이런 생활을 했어요.”
장동건의 여러 경험들은 ‘브이아이피’의 박재혁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됐다. 많은 사람들의 머릿 속에 있는 국정원 직원의 모습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새로운 캐릭터도 아니었다. 당장 3년 전 영화 ‘우는 남자’ 속 장동건이 맡았던 킬러 곤과도 유사점이 목격된다.
“저도 어떤 면에서는 전작 속 인물과 너무 비슷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평범한 회사원의 모습이 대부분이지만, 잔혹하고 냉철한 킬러처럼 변하는 부분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헤어스타일이나 피부 표현 등에 신경을 썼죠. ‘브이아이피’에 나오는 캐릭터 중에서는 가장 심리 변화가 큰 인물이기 때문에 제 나름대로 전사(前事)를 많이 생각해봤던 것도 있고요. 그런 감정의 변천 덕분에 이 캐릭터가 마음에 들기도 했어요.”
배우 고소영과 결혼해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는 장동건은 아이들이 생긴 후 작품 선택의 기준이 조금은 바뀌었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볼 수 있는 걸 하고 싶다는 설명이었다.
“제 영화 같은 경우는 아이들이 스무살 될 때를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웃음) 드라마는 볼 수 있겠지만요. 아이들이 ‘번개맨’ 같은 걸 좋아하는데, 슈퍼히어로물에 출연하는 건 우리나라 현실상 쉽지 않고요. 아내랑 함께 찍은 ‘연풍연가’를 보여줬더니 아들이 부끄러워서 못 보더라고요.”
가정적인 것으로 소문이 난 장동건은 배우, 남편, 아빠 중 무엇이 가장 어렵냐는 질문에 ‘아빠’를 꼽았다. 의욕은 앞서 있는데 스스로 뭔가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있다는 것이었다.
“사람 많은 곳에 가는 걸 불편해 하는 성격이었어요. 배우라는 직업을 갖게 된 후 많은 사람들 앞에 혼자 서야하는 경우가 많아지긴 했지만, 피할 수는 있었죠. 그런데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더라고요. 가족끼리 유원지도 가 봤어요. 처음에는 할 만 하겠다 싶었는데, 점점 알아보시는 분들이 많아지더라고요. 키즈카페나 축구교실은 아무렇지 않게 가요.”
배우로 겪은 수많은 역할들을 넘어 실제 남편이자 아빠로서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장동건에게서는 확실히 여유가 느껴졌다. 지겹게 들었을 외모 칭찬, 선량한 이미지에 대한 언급도 너스레로 받아칠 수 있게 됐다.
“예전에는 겸손하게 ‘아니다’라고 말했더니 망언이라고 하더니…. 뭐, 사실이기도 하고요.(웃음) 그런 이미지가 저 자신을 가두는 부분이 있어요. 그런 걸 지워 보려고 거친 역할을 시도해 보기도 했는데, 가린다고 가려지지 않는 것 같아요.(웃음)
잘생긴 외모 때문에 연기하는 데 한계가 있지 않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지만, 이 명제는 역도 성립하잖아요. 외모는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옛날에 찍었던 작품들을 생각하면, 그때는 쭈뼛쭈뼛댔고 나름의 선을 긋기도 했죠. 그래서 지금 다시 한다면 훨씬 더 잘 할 수 있을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