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엔터 이주희 기자]
“‘덕선이가 사극을? 게다가 액션에 괴수물?’”
혜리가 직접 운을 뗀 말이다. 그는 자신을 향한 대중의 시선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평가가 좋든 나쁘든 피하려 하지 않았다. “굳이 어려운 길을 스스로 만들어서 가느냐”는 말도 들었지만, 그래도 영화 ‘물괴’는 혜리가 이와 같은 “선입견이나 평가들을 한 번쯤 이겨내고 싶었던 작품”이었다.
혜리가 스크린 데뷔를 했다. 1년 3개월 전에 촬영했던 영화 ‘물괴’(감독 허종호)가 개봉하면서 이번 추석 시장에 관객을 만나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 대표 걸그룹으로 불리는 8년차 아이돌 걸스데이의 멤버이자, ‘진짜사나이’를 통해 예능인으로 큰 사랑을 받았으며, ‘응답하라1988’의 덕선 역을 통해 첫 연기부터 큰 관심을 받기도 했다. 도전한 것마다 모두 결과는 좋았지만, 대신 혜리가 또 다시 새로운 것에 도전을 하는 순간 과거의 것들이 그의 발목을 잡기도 했다. 뭘 해도 지난 모습이 보인다는 것이다.
대중의 이런 반응을 다르게 생각해 보면, 혜리가 도전한 모든 분야에서 특출 나게 활약을 했기 때문에 이전의 것들의 잔상이 강하게 남아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혜리는 자신에게 붙어있는 꼬리표가 불편하지 않단다.
“그만큼 사랑도 많이 받는다. 이만큼 사랑을 받지 않았으면 꼬리표도 크지 않았을 거다. 둘의 크기가 비례하는 것 같다. 아무리 내가 잘 했어도 시청자들이 ‘별로야’ 라고 하면 정말 못 한 것이고, 내가 생각하기에 아쉬워도 남들이 ‘잘했어’ 하면 잘한 거다. 보시는 분들이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해 새기려고 생각한다.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내가 나아갈 수 있고 더 좋은 모습 보여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혹평도 관심도 많이 받고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혜리는 생각보다 다부진 성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단단한 마음은 강한 도전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얼마 전 혜리가 체코 프라하에 간 김에 스카이다이빙을 한 것은 그의 도전 의식을 증명한 대표적 일화다. 처음부터 도전할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스카이다이빙으로 유명한 스폿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나자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고 한다.
“안 하고 넘어가면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후회하더라도 하고 후회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원래 겁이 많은 편이다. 당연히 두렵지만 모순적이게도 도전 정신도 크다. 내가 물을 정말 무서워해서 수영도 무서워하는데 스쿠버다이빙은 한다. 작품을 마주할 때도 비슷한 자세로 임하는 것 같다.”
결과보다는 과정, 혹은 과정보다 결과, 한 가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다. 혜리는 “과정에 따라 결과가 바뀐다고 생각한다”라고 이야기 했다. 과정과 결과 모두 중요하다는 것. 특히 그가 생각하는 결과는 단순히 성적만이 아니라 그가 느끼는 모든 것이 담겨 있기 때문에 두 가지를 구분하는 건 의미가 없다. 혜리는 “좋은 과정이 있으면 좋은 결과가 오지 않을까. 아무리 결과가 좋아도 과정이 좋지 않으면 만족하진 못할 것 같다”라고 소신을 밝혔다.
그렇다면, 첫 영화로 충무로에 입성하게 된 그에게 ‘물괴’는 어떤 의미의 영화일까. 지난해 봄에 처음 만난 ‘물괴’는 연예인 혜리로서도 인간 혜리로서도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던 기회였다.
“‘물괴’는 개인적으로 힘들었을 때 만난 작품이다.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쯤이 있었다. ‘나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내가 뭘 해야지 좋을까’ 물음표가 있던 시기였다. 5년 동안 한 달에 하루 쉴까 할 정도로 정말 바쁘게 살았다. 그러다가 머리가 꽉 찬 거다. 뭘 하더라도 신나는 마음으로 하고 싶은데, 자신감 없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8개월가량 쉬었다. 처음엔 3일 쉬면 죽는 줄 알았는데, 웃긴 게 한 달 쉬니까 두 달 쉬고 싶고, 두 달 쉬니까 세 달 쉬고 싶더라.(웃음) ‘내가 쉴 수 있는 사람이구나’ 느끼면서 저절로 머릿속에 빈 공간이 생겼을 때 만난 작품이 ’물괴‘였다. 힘든 시기에 나를 꺼내줄 만큼 당시 나를 자극시킨 작품이었고, 미래에 봤을 때도 의미 있는 작품이 될 것 같았다.”
혜리가 ‘물괴’에서 맡은 ‘명’이라는 캐릭터는 호기심 많은 성격으로, 아버지 윤겸(김명민 분)과 함께 물괴를 물리치는 인물이다. 캐릭터보다는 작품에 더 끌려 선택했지만, 혜리는 자신의 캐릭터가 이 영화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꼼꼼히 연구해 표현했다. 혜리가 생각하기에 명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성장”이었다.
“명은 등장인물 중 가장 감정의 폭이 가장 큰 인물이다. 깨닫는 것도 가장 크다. 후반부에 명이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충격을 받는데, 너무 많은 것을 짊어지게 된다. 감독님과 대화를 하면서 ‘명이는 대단히 어른스러운 아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무섭고 두려워서 회피하고 싶고 ‘물괴고 뭐고 일단 자신의 상황부터 설명해 봐라’ 할 수도 있지 않나. 하지만 명은 원망보다 감사함을 느낀다. 어른스러운 그 모습을 보면서 애착이 갔다. 명이를 관객에게 설득시키고 이해시키기 위해 나도 생각을 많이 했다.”
사실 명의 경우, 극중 유일하게 깊은 전사가 있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자세한 감정이나 행동의 이유가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은 명에게 의문을 가질 수도 있지만, 혜리는 그에 대한 해답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첫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혜리의 답변에서는 영화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드러났으며 작품에 대한 이해도가 뛰어났다. 첫 발걸음을 뗀 혜리가 스스로 듣고 싶은 평가는 무엇일까.
“이런 대답을 하면 웃길 것 같긴 하지만(웃음), 나는 미래에 대한 계획이 전혀 없는 사람이다. 현실에 충실하고 싶다. 지금 하는 게 너무 좋았으면 좋겠고, 보는 사람도 비슷한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영화 혹은 드라마, 걸스데이만 할거야’라는 생각은 안 한다. 내가 정리해서 무게중심을 옮기기보다 운명처럼 만나는 것들을 넓은 시야로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크다. 사실 ‘물괴’는 영화 첫 작품이라 아쉬운 마음이 크다. 첫 술에 배부를 수 없지만, 나는 첫 술에 배부르고 싶었다.(웃음) 욕심도 많고 잘 해내고 싶고 잘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다. 보는 분들에게 큰 걸 바라진 않는다. 그저 ‘혜리가 사극도 하네’ ‘몸도 잘 쓰네’ ‘다른 영화에서도 봤으면 좋겠다’ 정도였으면 좋겠다.”
‘물괴’로 첫 영화에 도전한 혜리는 이후 올해 두 번째 영화 ‘뎀프시롤’까지 촬영을 마쳤다. 엄태구ㆍ김희원 등이 출연하는 ‘뎀프시롤’은 상업영화인 ‘물괴’와 전혀 다른 결을 가진 작은영화로, 혜리는 영화 현장에 대한 새로움을 또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여전히 혜리는 시작 단계를 밟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점차 자신의 활동 반경을 넓혀가고 있는 혜리의 다음 모습이 기대가 모아진다.
“전혀 다른 두 영화를 하면서 영화 현장에 대한 즐거움을 많이 느꼈다. 명이에 빗대서 얘기를 하자면, 명이는 의술을 공부하고 한양이란 큰 곳에 나아가 자신이 필요한 곳에 쓰이고 싶어 하지 않나. 물괴를 잡으러 갈 때도 가장 먼저 나선다. 어떠한 작품에 참여한다면 나도 적극 적으로 나서려고 한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도 있지만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더 마음이 배로 쓰이는 것 같다. 이건 영화뿐만 아니라 드라마나 앨범도 마찬가지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해냈을 때 느끼는 성취감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