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엔터 이주희 기자]
‘말모이’(감독 엄유나)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영화다. 액션 등 자칫 자극적으로 갈 수 있는 길로 빠지지 않고, 그저 독립운동 하는 인물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만 중점을 뒀다. 주인공인 배우 유해진 역시 이 영화를 통해 연기 변신을 시도한다든가 극적인 연기를 선보이는데 목표를 두지 않았다. 늘 그랬듯 유해진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뿐이다. 이처럼 영화의 성격과 맞닿아 있는 유해진의 모습은 또 한 번 관객의 마음을 울린다.
“‘말모이’는 순한 영화다. 극중 순둥이 딸로 나오는 ‘순희(박예나 분)’ 같다. ‘말모이’가 2019년 처음으로 개봉하는 한국 영화인데, 하루로 치면 아침 일찍이 아니냐. 아침엔 자극적인 것 말고 순한 걸 먹어야 한다.(웃음) 사실 더 거친 모습도 촬영 했는데, 완성본에는 안 썼더라. 감독님이 생각하는 ‘말모이’의 모습인 것 같다.”
‘말모이’는 우리말 사용이 금지된 1940년대, 까막눈 판수(유해진 분)가 조선어학회 대표 정환(윤계상 분)을 만나 사전을 만들기 위해 비밀리에 전국의 우리말과 마음을 모으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엘리트인 정환이 아닌 소시민 판수다. 판수는 조선어학회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자신의 인맥으로 수십 명의 사람들을 데려오는 등 최선을 다해 힘을 보탠다. 이와 같은 장면은 실제 사람 좋기로 유명한 유해진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특히 배우 특유의 호흡으로 웃음 포인트를 살려야 하는 신이 많은 만큼, ‘말모이’에는 평소 대중이 알고 있는 유해진의 능청스러움이 더욱 빛을 발한다. 누가 봐도 판수 캐릭터는 유해진과 잘 맞는 옷이다.
“모든 작품이 그렇듯, 이번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을 때도 나와 잘 어울릴까 생각을 했다. 감독님이 판수를 나라고 생각하면서 썼다고 하시니까 ‘괜찮겠다’ 생각하고 하게 되었다. 내가 말맛을 잘 살릴 거 같아서 캐스팅 했다는데, ‘내가 잘 살렸나?’ 싶긴 하다. 가장 중요한 건 도전 의식보다는 극에 잘 녹아드는 거다. ‘안 어울리던데’ ‘따로 놀던데’라는 말을 듣는 게 가장 위험하다. 극에 잘 녹아야지 좋은 얘기를 전달할 수 있지 않겠나.”
‘말모이’는 판수의 성장 영화이기도 하다. 평생 글을 모르고 살던 까막눈 판수는 조선어학회의 심부름을 하다가 글자를 하나씩 깨치면서 한글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그렇게 극 초반 거칠었던 판수는 점점 변화해 간다. 초반 그는 아무데서나 침을 뱉어 책방 주인 구자영(김선영 분)에게 혼쭐이 나는데, 이 장면은 판수의 기질을 설명해 주는 대표적인 신이다.
“판수는 예의가 없고 막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침 뱉는 설정을 만들었다. 구자영에게 혼이 난 이후로는 절대 침을 안 뱉는다. 판수의 변화인 거다. 침도 안 뱉고, 글도 깨우치고, 머리 모양도 바뀐다. 이런 작은 변화가 쌓여서 끝날 때쯤엔 많이 바뀌는 거다.”
침을 뱉는다는 설정은 유해진이 직접 제안한 부분. 함께 호흡을 맞추던 김선영 역시 베테랑 배우답게 애드리브로 이 신을 완성했다.
비슷한 장면은 하나 더 있다. 까막눈이었던 판수가 글을 깨친 후, 건물에 붙어 있는 간판을 하나 하나 읽으면서 기뻐하는 모습이다.
“글을 깨우쳤을 때의 기쁨을 표현한 거다. 실제 나도 초등학교 때 막 글 읽기 시작하게 됐을 때 시장에 있는 간판이나 큰 글자를 계속 읽고 다녔었다. 엄마가 잘 한다고 하니까 계속 읽었던 기억이 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꺼내 써봤다.”
단순히 배우로서 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들을 꺼내와 캐릭터화 시킨다는 것. 그래서 유해진이 연기하는 캐릭터는 그와 싱크로율이 높은 건지도 모른다.
“연기자들은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 예전엔 많이 와 닿지 않는 말이었는데, 연기를 계속 하다 보니까 생각하게 된다. 사실 판수 캐릭터는 어렸을 적 이웃이었던 목공서 아저씨를 많이 참고한 것인데, ‘이때 써먹어야지’하고 기억을 한 건 아니다. 하지만 그때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기억을 떠올려 연기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럴 때 경험이 중요하구나 싶다. 밋밋하게 온실에서 자라기보다는 여러 경험을 하는 게 좋은 것 같다.”
특히 ‘말모이’는 2017년 여름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천만 영화가 된 ‘택시운전사’(감독 장훈)의 각본가인 엄유나 감독의 장편 영화 데뷔작이다. 유해진이 ‘택시운전사’에 이어 감독의 데뷔작까지 같이 하면서 충무로의 주목을 받았다.
“사실 감독님과 ‘택시 운전사’ 때는 현장에서 부딪칠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아주 오래 전 ‘국경의 남쪽’ 연출부일 때부터 알았던 분이다. ‘택시 운전사’ 때 각본을 쓰셨다고 해서 깜짝 놀랐고 대단하다 싶었었다. 연출은 이번이 처음이신데 좋은 점이 많았다. 첫 작품이라 조심스러운 것도 많았겠지만 마음을 많이 열어두셔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본인을 늘 낮추는 분이고, 뚝심 있는 뚝배기 같은 분이다. 영화와 색깔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는 분이었다.”
작품을 고를 때 “사람이 어떻게 그려져 있느냐가 중요하다”라며 사람 얘기 위주의 작품을 해 나가겠다는 유해진, 늘 묵묵하게 걸어갈 배우임을 알기에 응원은 뒤따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