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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원 "10월 유신=쿠데타 쇼?" 암호명 '풍년사업'과 유신헌법…99.9% 찬성 체육관 대통령의 탄생(역사저널 그날)

▲이시원(사진=KBS1 '역사저널 그날' 방송화면 캡처)
▲이시원(사진=KBS1 '역사저널 그날' 방송화면 캡처)

암호명 풍년사업, 극비리에 진행된 유신헌법으로 당선된 제 8대 박정희 대통령이 꿈꾼 것은 무엇일지 배우 이시원과 '역사저널 그날'에서 알아봤다.

27일 방송된 KBS1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의 초석이 된 10월 유신에 대한 이야기가 밝혀졌다. 이날의 주제가 '10월 유신'으로 알려지자 박상영 작가는 "군대까지 동원해 국회를 장악한 것은 쿠데타라고 볼 수 있지 않느냐"라고 말했고, 이에 이시원은 "헷갈린다. 박 대통령과 군대가 같은 편인 건가"라고 물었다.

▲'역사저널 그날'(사진제공=KBS 1TV)
▲'역사저널 그날'(사진제공=KBS 1TV)

이에 오제연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10월 유신은 군인들이 헌정 파괴, 국회 해산 등 사회를 장악한 행동"이라며 "쿠데타 같지만 박 대통령이 권력 강화를 한 것이다. 이것을 친위 쿠데타"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설명을 들은 이시원은 "한마디로 '쿠데타 쇼'네요"라고 말했다.

▲'역사저널 그날'(사진제공=KBS 1TV)
▲'역사저널 그날'(사진제공=KBS 1TV)
◆숙명의 라이벌, 김대중의 등장

1972년 10월 17일 오후 7시, 박정희 대통령이 특별선언을 발표한다. “새로운 체제로의 일대 유신적 개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탱크와 장갑차로 중무장한 군인들이 서울 일대에 포진한다. 국회는 해산되었으며, 헌법 효력은 정지됐다.

10월 유신이 일어나기 1년 전, 1971년 3선을 위해 헌법까지 고쳐가며 7대 대선에 도전한 박정희 대통령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힌다. 40대 기수론을 내세운 야당 후보 김대중이 큰 인기를 끌며 돌풍을 일으킨 것이다. 고전 끝에 약 95만 표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승리한 박정희 대통령은 크게 분노했다. 이후 생산적인 정치를 내세우며 ‘특수한 것’을 마련했다.

▲'역사저널 그날'(사진제공=KBS 1TV)
▲'역사저널 그날'(사진제공=KBS 1TV)
◆암호명 풍년사업

1972년 5월,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가에서 유신헌법의 초안이 만들어졌다. 암호명 풍년사업, 국무총리 김종필은 물론 미국도 모르게 극비리에 진행했다.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주도 아래 5명의 비밀공작팀은 대만의 총통제, 스페인의 프랑코 헌법 등 지도자의 권력이 막강한 헌법들을 연구하며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에 힘을 싣는다. ‘헝가리 헌법’ 이라고도 불리는 유신헌법 제정의 전말, 자세히 살펴봤다.

▲'역사저널 그날'(사진제공=KBS 1TV)
▲'역사저널 그날'(사진제공=KBS 1TV)
◆야만의 시대, 유신

유신이 발표되자마자, 정부에 각을 세웠던 야당 정치인을 비롯해 유신에 반대한 국회의원들은 보안사령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다. 계엄군하에 언론 역시 통제됐다. 언론은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2천 회 가까이 유신을 보도하며 유신 홍보에 앞장섰다.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선언 이후 유신헌법안이 확정되기까지의 과정을 따라갔다.

▲'역사저널 그날'(사진제공=KBS 1TV)
▲'역사저널 그날'(사진제공=KBS 1TV)
◆체육관 대통령의 탄생

1972년 12월 23일, 유신헌법 아래 치러진 대선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99.9%의 찬성률로 제 8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른바 체육관 대통령이 탄생한 것이다.

홍선화 기자 cherry31@bizent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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