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엔터 홍선화 기자]
24일 방송되는 KBS1 '역사저널 그날-판문점 도끼만행사건'에서는 44년 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을 돌아봄으로써 한반도 내에 상존하는 '전쟁과 평화'를 다시 한번 상기하는 계기를 만들어 본다.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하던 유엔군 경비대에게 도끼와 쇠몽둥이를 든 북한군이 습격을 가한 것이다. 이 도끼만행사건으로 유엔군 11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미군 장교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후 미국이 대규모 군사적 대응에 나서 한반도는 휴전 후 최초로 전쟁위기에 봉착한다.
당시 현장에서 사망한 故 보니파스 대위를 경호했던 전병호 씨. 그 역시 북한군의 공격에 머리를 맞아 44년이 지난 오늘까지 후유증을 앓고 있다. 그가 기억하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는 사건 전까지만 해도 북한군과 담배를 나눠 피우고, 초콜릿을 나눠 먹는 등 지금의 모습과 달리 친근한 교류가 있었다. 그랬기에 북한군의 습격은 그에게 더 충격으로 다가왔다.
예측하지 못했던 북한군의 습격에 전병호 씨와 동료들은 무방비로 당했다. 습격 전까지 미루나무 가지치기에 훈수를 두고 관망했던 북한군은 단 10분 만에 현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전병호 씨가 기억하는 그날의 모습을 직접 소장한 사진과 함께 자세히 들어봤다.
유례없는 미군 장교 2명의 잔혹사. 미국은 사건이 일어난 다음 날, 정전 후 최초로 한반도 전체에 데프콘3(준전시태세)를 발령했다. 자국 군인의 죽음에 분노한 미국은 강경 대응을 예고했고, 대응 방안으로 핵폭탄 투하까지 고려했다. 일본 요코스카항에서는 항공모함 미드웨이 호가, 오키나와에선 미 해병 1,800여 명이, 미국 본토에서는 핵 탑재가 가능한 폭격기들이 한국으로 향했다.
이 작전의 목적은 '미루나무 베기'였다. 작전 중 북한에서 3발 이상 사격 시, 개성의 인민군 막사를 포격하는 것이 유엔군 사령관 스틸웰에게 허가되었다. 자칫하면 전면전이었다.
폴 번연 작전의 주요 내용은 미군 공병부대의 '미루나무 베기'였다. 그리고 한국군 특수부대 50명이 이를 경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북한군 150여 명은 돌아오지 않는 다리에서 전투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고, 여기서 양측의 도발이 진행된다면 곧 전쟁으로 직결될 수 있었다.
그런데 나무가 거의 베어질 무렵, 한국군 특수부대가 갑자기 북한군을 도발하기 시작했다. 북한군이 설치한 차단기를 부수고, 군사분계선 남측에 있던 북한군 4개 초소를 파괴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화기 소지가 금지되어 있었음에도, 소총과 권총, 수류탄을 숨기고 작전에 들어갔다. 이는 당시 함께 작전을 수행했던 미군도 예측할 수 없었던 위험한 도발이었다. 여기에 북한군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당시 일촉즉발의 상황을 생생하게 돌아봤다.
한반도로 흘러들어오던 데탕트의 물결을 타고 남북대화가 추진됐던 70년대, 북한은 대체 왜 도끼만행사건을 벌인 것일까? 당시 해빙 분위기 속에서 북한은 주한미군 철수를 위해 국제여론을 조성하고자 노력했고, 거의 성사되기에 이르렀는데... 이 상황에서 과연 도끼만행사건은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일까, 계획된 것이었을까? 김일성은 폴 번연 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나자마자, 유엔사에 유감 성명을 보냈다.
결과적으로,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은 북한에 다방면으로 악영향을 끼쳤다. 국제적인 비난에 위상이 실추된 것은 물론, 주한미군 철수를 위해 벌였던 외교적 노력까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이에 더해 몰려온 경제적 여파까지, 역사저널 그날에서 사건이 북한에 끼친 영향을 살펴본다.
◆반도의 전쟁과 평화, 그리고 분단의 비극
미루나무 가지치기에서 촉발된 이 사건으로 한반도 내에 더는 남북이 자유로이 오갈 수 있는 곳이 없다. 사건 이전에 정전 체제의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교류와 소통이 가능했던 공동경비구역에는 높이 5cm의 군사분계선이 생겼고, 남북 간에는 확연한 대립의 금이 그어졌다. 사소한 실랑이에서 전쟁위기로 비화된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은 한반도가 분단의 냉혹한 현실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각인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