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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규 대기자의 '스타 메모리'] '스포츠머리' 김경호, 27년 전 그날 밤 신선한 충격

[비즈엔터 홍성규 기자]

▲가수 김경호(비즈엔터DB)
▲가수 김경호(비즈엔터DB)

김경호는 이제 대한민국의 대표적 로커이며 살아있는 전설이다. '바로크 메탈'(클래시컬한 메탈 장르)적이면서도 한국적인 정서가 담겨있는 초고성 샤우팅 창법은 세계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1994년 1집 앨범 ‘마지막 기도’를 냈던 그가 어느새 데뷔 27년이다.

94년 어느 날 저녁, 가요 기자로 한창 활동 중이던 나는 모 음악 방송 프로그램 뒤풀이에서 김경호를 처음 만났다. 나는 지금도 그날 밤의 신선한 충격을 잊을 수 없다.

누가 주최한 자리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으나, 듀스, 김종서 등 인기가 치솟던 가수들과 매니저들, 방송 관계자들 수십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술이 여러 차례 돌아가고,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하는 순서는 대개 아마추어부터 시작한다. 가수가 아닌 나도 몇 곡 불렀고, 매니저들도 노래를 불렀다.

가수들도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원래 가수들은 이런 회식 자리에서 노래하기를 꺼린다. 듀스의 김성재는 댄스 가수가 무슨 노래를 하냐면서, 사양했지만 이현도가 “뭐 어때”하면서 어깨동무하고 같이 나가서 댄스가 아닌 가요를 씩씩하게 불렀다.

그런데 그 방의 맨 말석에 짧은 '스포츠머리'를 하고, 금테 안경을 쓴 어린 친구가 눈에 띄었다. 이 자리가 시작되고 나서, 단 한마디도 없이 앉아있던 친구였다. 나는 "얘 너는 누구니? 너도 가수냐"라고 물었다. 속으로는 아마도 기획사 직원 정도로 생각했지만, 괜히 객쩍은 농담을 한 것이었다.

당시 철이와미애를 제작했던 작사가 이승호가 옆에 있다가 반색하며, "형 사실은 가수 지망생인데, 오늘 인사시키려고 데리고 왔어요"라고 했다. 나는 "그럼 잘됐네. 너도 노래 한번 해봐"라고 권유했다.

끼도 없어 보이고, 얌전하고 착실하게 생긴 친구라,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고, 그가 어색하고 쑥스러운 몸짓으로 앞으로 나가는 모습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는 가운데, 스틸하트의 'She’s gone' 전주가 흐르고, '스포츠머리' 김경호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She’s gone' 은 현재에 이르러 노래 좀 한다는 많은 가수들이 경쟁적으로 부르고 있지만, 당시에는 이 노래를 어떤 국내 가수도 부르는 것을 본적이 없었다.

시끄럽던 좌중은 어느덧 정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노래의 백미인 '싸비(후렴구)'부분, 조를 바꿔 고음으로 올라가는 부분에 이르렀다. '과연 잘 올라갈 수 있을까. 잘 갖춰진 오디오 시스템도 아닌 이런 곳에서 잘 될까'하는 우려도 잠시, 폭발적이면서도 감성적인 김경호의 노래에 매료를 넘어서 충격을 받고 있었다.

좌중에 있던 사람 모두가 한목소리로 “앙코르”를 연호했고, 생짜배기 가수지망생의 미니 콘서트가 이어졌다. 김경호가 노래를 잘하는 데다 워낙 성량이 커서인지, 다른 손님들이 구경을 오기까지 했다. 당시 '대답 없는 너'로 언더그라운드 로커에서 유명가수로 발돋움하던 김종서가 "대단하다"라며 혀를 내둘렀다.

김경호는 유명 로커들의 레퍼토리를 위주로 노래했고, 마지막 순서로 아직 발표도 하기 전인 '마지막 기도'를 선보였다.

이승호가 "사실은 이 친구 제가 제작하고 조만간 이 노래로 데뷔시키려고 해요"라고 밝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승호는 그 후 DJ DOC, 쿨, 박상민, 터보, 이정현 등 히트 댄스 가요의 작사가로 성장했다. '이승호 작사·윤일상 작곡' 콤비의 댄스 가요는 오늘날 케이팝의 뿌리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이날 이후 김경호의 데뷔 앨범을 오매불망 기다리며, 이승호에게 "경호 앨범 언제 나오니"라고 독촉(?)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공식 첫 인터뷰 후, 1995년 1월 11일자 신문에 '가요계에 돌연변이가 등장했다'라는 기사를 올렸다. '신인답지 않은 기교, 섬세한 감정표현, 음악에 대한 이해와 소화 능력, 대형가수로서의 요건을 두루 갖췄다'라고 썼다.

김경호는 그날 그 기사 내용대로 급성장했다. 물론 김경호에게도 기존 록 음악계의 벽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몇몇 기존 록밴드들은 김경호를 잘 받아주지 않았다. 일명 '빠다(버터)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당시 국내 로커들은 해외 유명 밴드들의 음악을 따서 하는 것을 추구했다. '빠다 냄새'라는 것은 얼마나 외국 유명 보컬과 기타리스트 따라잡기를 잘하느냐의 문제였다. 그러나 오히려 그의 대중적인 매력은 제도권 무대로 진입하기에 무리가 없었던 것 같다.

그 짧고 순진한 청년 같던 외모는 어느새 치렁치렁 장발을 휘날리며, 가죽 재킷, 부츠 차림으로 화려하게 변신하고 있었다. 나도 팬으로서 그가 하는 콘서트라면 빠지지 않았고, 그의 성공에 박수를 보냈다.

그는 가장 한국적인 로커로서 그만의 독자적인 행보를 걸었고, 90년대 라이브 콘서트 무대와 방송 무대를 섭렵하며 '국민 가수'로 자리매김했다. 이제는 케이팝이 아닌 K록으로 세계 록 시장에 우뚝 서는 김경호의 모습을 기대한다.

홍성규 기자 skhong@bizent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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