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엔터 홍성규 기자]
11월은 연예계가 우울해하는 달이다.
언제부턴가 매년 이맘때가 되면, '11월 괴담'이라는 말이 돌았다. 특별히 과학적 원인은 없는데, 우연의 연속으로 연예인들에게 불행한 일들이 겹치다 보니 그랬던 것 같다.
2021년 올해도 어김없이 11월이 왔다.
故 김현식은 그 11월이 되면 가장 많이 생각나는 가수 중 한 사람이다. 그날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30년이 넘었다.
김현식은 1990년 11월 1일 인기 절정이던 32세 한창나이에 간 질환으로 별세했다. 그와는 짧은 만남이었지만, 너무도 강렬하면서도 안타까운 기억을 남기고 간 사람이다. 살아있다면 아마도 가을날 옛날 이야기하며 소주 한잔 기울일 친구가 됐을 텐데 하는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김현식을 처음 만난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나던 해 초봄이었다. 당시 김현식의 인기는 대단했다. 대중적으로 폭넓게 알려져 있진 않았지만, 젊은 여성 팬을 중심으로 충성도 높은 팬덤이 형성되어있었다.
'내 사랑 내 곁에', '사랑했어요', '비처럼 음악처럼'이나 그가 강인원, 권인하와 같이 부른 '비 오는 날 수채화' 등은 비공식 집계로 100만 장 넘게 팔려나갔다. 그가 출연하는 신촌, 홍대 소극장 콘서트는 늘 관객들로 가득 찼다.
한편으로 그는 언더그라운드 가요계에서 '악동'으로 유명했다. 뮤지션으로서 자존심이 강하다 보니, 그 어떤 누구와도 타협이란 게 없었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곧바로 주먹이 나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싸움도 잘한다고 소문나 있었다. 체구는 그리 크지 않지만, 다부지고, 어린 나이부터 밤무대 활동을 하다 보니 '깡'이 장난이 아니라서 그와 싸워서 이긴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방송 출연을 하지 않는 건 물론, 신문과의 인터뷰도 사양했다. '내가 알아서 내 음악 하는데 잘 알지도 못하는 PD며 기자들이 이러쿵저러쿵하는 게 싫다'라면서 못 견뎌 했다. 특히 방송국 일부 PD들이 함부로 반말을 하는 데다, 가수의 의견 무시하고, 제멋대로 연출하는 것을 못 참았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립싱크가 성행하던 시절이라, 대부분 음악 프로들은 라이브가 아니어서, TV 음악프로그램 출연을 사양하는 가수들이 꽤 있었다.)
그 껄끄러움은 기자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경우는 오히려 궁금증이 더해갔다. 오기로라도 인터뷰를 끌어내 보고 싶었다.
김현식의 당시 소속사는 동아기획이었다. 동아기획은 80~90년대 조동진, 들국화, 푸른하늘, 장필순, 박학기, 김현철, 김장훈, 이소라 그리고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 등을 발굴해낸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의 메카였다.
여타 기획사와 달리, 방송에서 자주 보는 인기가수보다는 소위 언더그라운드 실력파 가수들을 가장 많이 보유한 메이저 음반기획사였다. 위치는 광화문 구세군 회관 뒤편이라 내 근무처와도 가까워서 오다가다 자주 들르곤 했다.
나는 동아기획 김영 사장이나 매니저들에게 김현식 안부를 수시로 물었다. 그때마다 매니저들은 "현식이 형은 안 만나시는 게 편하실 겁니다. 그냥 저희가 자료 잘 만들어 드릴게요"라고 답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심코 동아기획 사무실에 갔는데, 김영 사장과 김현식이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내심 무척 반가워서, 김영 사장에게 큰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김영 사장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껄껄 웃으며 김현식에게 "현식아. 인사해라. 최고의 가요 기자님이야. 마침 잘됐네! 만난 김에 인터뷰 한번 하자"라고 들이댔다.
그런데 김현식은 인사는커녕 불쾌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오해한 듯 "이러려고 날 불렀어. 내가 기자하고 왜 만나야 해"하면서 쌩하고 나가버렸다. 김영 사장은 민망해하면서 "나중에 자리 한번 만들어 보겠다"라고 했다.
그날 이후 "아니면 말고. 가수가 김현식밖에 없냐"라는 생각으로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그럴수록 김현식의 인기는 더욱 치솟고 있었다. 심지어 "낮의 대통령이 조용필이면, 밤의 대통령은 김현식"이라는 말까지 돌고 있을 정도였다.
가요 기자 입장에서 한 번쯤은 기사로 다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본인 인터뷰는 일단 접어두고 동아기획으로부터 자료를 받아서, 김현식의 인기에 관한 기사를 몇 번 썼다.
편집국에서도 기사가 나가자, 음악 좋아하는 타 부서 기자들이 다가와서 "김현식 노래 너무 좋다. 남들 안 쓰는 이런 가수도 다뤄야 한다"라며 격려해줬다.
김현식에 대한 관심도는 더욱 커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그의 주변에서는 김현식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다.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 간 건강이 심각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취재 끝에 그가 간경화로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 사실을 신문사 데스크에 보고했고, 바로 쓰라고 했다. 지극히 사적인 개인정보였지만 "병은 숨기지 말고, 알려야 한다"라는 생각으로 애써 합리화하며, 이야기를 써서 올렸다.
나는 그냥 박스 기사 정도 날것으로 예상했는데, 그다음 날 편집부에서는 이 기사를 1면 톱으로 뽑았다. 아침 출근길 지하철 가판대에 김현식 병세에 관한 기사가 마구 눈에 띄었다.
"너무 일을 크게 벌인 것 아닌가"하는 불안감이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동아기획 매니저들이 전화 와서 "미리 이야기하고 쓰시지"라며 볼멘 항의를 해왔다. 김현식 가족도 전화를 해왔다. 왜 남의 병세 이야기를 함부로 쓰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병은 숨기지 말고, 알려야 하는 것이다. 그동안 가족들이 대체 뭘 하고 있었냐. 이렇게 경고라도 해야 김현식이 건강관리를 잘 하지 않겠냐"라고 거꾸로 따지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무척 뻔뻔스러웠던 장면이었던 것 같다.
이일이 있고 나서 신문사 편집국에서는 내친김에 김현식 라이프 스토리까지 다루자는 의견이 나왔다. 김현식 기사 덕분에 신문이 많이 팔려나가니, 이참에 아예 그의 삶의 이야기를 연재하자는 것이었다.
좋은 기획이었지만 내겐 '왕 부담'으로 다가왔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기획사에서 주는 자료나 받아서 기사 쓰면 편할 텐데, 라이프 스토리를 매일 쓰려면 그 까다로운 김현식을 수시로 만나서 인터뷰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마침 그 무렵 내 밑으로 신참 가요 담당 기자가 들어 왔다. 나는 면피할 생각으로 다른 가수들 취재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그에게 미루기로 했다. 비겁했던 것 같다.
그 후배 기자는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한 육상효(이하 '후배')라는 친구였고, 성격도 좋고 책임감이 있어 딱 맞았다. (육상효는 나중에 신문기자를 그만두고, 현재 영화감독,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김현식과의 만남 1년 후에는 그 기억을 더듬어 '사랑의 가객 김현식'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데스크 부장에게는 인터뷰는 후배가 하고, 나는 김현식 인터뷰 주선하고, 잘 안되는 부분을 지원하는 거로 보고했다. 데스크는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런데 이제 넘어야 할 미션은 김현식과 어떻게 만나서, 어떻게 그의 입을 여느냐는 부분이었다.
②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