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엔터 홍성규 기자]
③에서 계속
그런데 조금 있으니 놀랍게도 용필이 형과 당시 용필이 형의 기획사 '필기획'을 경영하던 조용필의 작은형, 지금은 작고한 조영일 사장이 편집국에 직접 뛰어 들어왔다. 내가 볼멘소리로 용필이 형한데 확인 전화를 하자마자, 곧바로 이분들이 달려온 것이었다.
두 사람은 편집국장과 연예부장에게 "그 기사는 사실이 아니다. 홍성규 기자가 알면서도 잘 참아줘서 고맙다"면서 "오보 기사 써버린 매체는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것"이라고 했다. 우리 앞에서 그 기사를 쓴 경쟁지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격하게 항의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기사를 안 쓴 나를 대변해준 셈이었고, 나는 일단 그 위기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걸로 끝은 아니었다. 연예계를 들쑤셔놓은 그 일을 잠재우려면 사실이 아니라는 구체적 증거가 필요했다. 나름 기자로서 자존심이 너무 상해있던 바라, 확실한 반전이 필요했다. 설사 사실이 아니어도 일반 대중들은 1차적으로 나온 배드뉴스(bad news)만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날 밤 나는 밤새 당사자들을 수소문해 만나러 돌아다니다 결국 확실히 만회할 수 있는 누군가의 독점 인터뷰를 따냈다. 당사자는 "그냥 친하니까 믿고 다 이야기하는 거다. 기사로는 쓰지말라"고 했지만, 나는 상황을 종결짓는 의미의 기사로 썼다.
그 다음날 신문에는 그 인터뷰 기사가 게재됐다. 그 당사자분은 득달같이 전화해서는 "쓰지 말라고 했는데, 왜 썼느냐"라며 난리를 쳤다. 그분은 이후 며칠 동안 계속 내게 전화해서 "내 인생 당신이 책임질 거냐"고 항의해서 정말 힘들었었다. 사실 인간적으로 미안했지만, 그 분도 내심 기사화 될 것을 알면서도 다 이야기 했을거라 생각한다.
그 사건으로 엄청 곤욕을 치른 이후부터 나는 기자로서 '취재원과의 불가분, 불가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됐다. 일장일단이 있지만, 기자도 사람인지라 연예인과 오래 만나도 보면 '형 동생'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면 인간적으로 비판적인 기사를 쓰기가 힘든 것이 인지상정이다. 반면 사적으로 깊은 이야기를 끌어내려면 가까워지는 것이 당연히 낫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생각하는 바는 모든 걸 떠나서 특종하는 것보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이 사회 정의냐'하는 것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뿐인 그 연예인의 인생이라고 판단한다.
조용필은 그때나 지금이나 대한민국이 낳은 최고의 가수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그분의 처절하리만큼 강한 음악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그는 어린 시절 음악이 아니면 목숨까지도 내어놓겠다는 각오로 밑바닥부터 음악을 시작했다. 이제 50주년 음악인생을 지나는 조용필은 그동안 스타덤에 오르기까지 온갖 이야기가 인구에 회자됐다. 그러나 그는 시련이 닥칠 때마다 지난 어린 시절을 떠올리곤 한다. 음악을 만나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때로는 음악을 위해 목숨까지 내던지려 했던 순간을 생각하며 현실을 견뎌낸다고 한다.
지금도 용필이 형과의 추억을 더듬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용필이 형 집에 가면, "어~홍 기자 어서 와"하고는 통기타 부여잡고 쭈그리고 앉아서, 기타 줄 퉁겨가며 오선지에 콩나물 대가리 그려 넣고 있는 모습이다. 어떤 때는 집에 있는 피아노를 '뚱땅 뚱땅' 쳐보고는 배를 깔고 방바닥에 엎드려서 악보를 그리며 백지 위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해냈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악보를 볼 줄 몰라도, 누군가 미리 만들어놓은 소스(음악샘플)를 재료로 해서 미디(MIDI) 작곡하거나, 심지어는 샘플링이라는 미명하에 표절까지 난무하는 현실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신선한 충격일 것이다.
용필이 형은 늘 아무리 나이 먹어도 앞서가는 음악을 해야 한다는 지론을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다. 상당수 레전드 가수들은 과거 히트곡 당시 콘셉트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한다. 새로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조용필은 신곡이 나올 때마다 늘 새롭다. 데뷔 당시부터 늘 앞서간다는 초심과 그 자세를 흐트러짐 없이 지켜내고 있다. 영원한 아티스트 조용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