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엔터 이은호 기자]
이직을 고민하며 가슴에 사직서를 품고 다니던 어느 날의 일이다. 마음이 심란해 찾아간 점집에서 뜻밖의 말을 들었다. “올해 백수 운이 들었네. 오라는 곳 있으면 일단 가.” 백수 운이라니, 쉽게 납득할 수 없어 이번엔 용하다는 역술인을 찾아갔다. “지금 회사에 붙어 있어! 안 그럼 정신 피폐해진다.” 아, 인생엔 왜 이리도 흔들림이 많단 말인가.
배우 정유미가 연기한 KBS2 ‘마스터-국수의 신’(극본 채승대, 연출 김종연 임세준, 이하 국수의 신) 속 채여경 또한 숱한 흔들림을 맞닥뜨린 인물이다. “사건번호 1994 고합 5021을 파헤쳐 달라”는 박태하(이상엽 분)의 부탁 때문에 검사가 됐고, 부모님의 죽음 뒤에 얽힌 진실을 마주했다. 그리고 채여경의 삶은 크게 출렁였다.
“여러 인물의 사연이 얽혀 있으니, 여경이의 심리상태나 감정선에만 집중할 수 없는 건 당연해요. 다만 박태하가 죄를 뒤집어 쓴 뒤 ‘검사가 돼라’는 말에 여경이의 미래가 결정되는 듯 비춰진 것이 아쉬워요. 검사가 되기까지 여경이도 나름대로의 갈등이 있었을 거예요.”
채여경은 박태하의 아버지가 자신의 부모님을 죽였으며, 배후에는 김길도(조재현 분)의 사주가 있었음을 알게 됐다. 진실을 알게 된 후, 그는 검사가 아닌 피해자의 딸로서 복수에 매진하기 시작됐다. ‘정의 사회 구현’이라는 신념도 복수 앞에선 힘없이 꺾였다.
“사실 시놉시스 단계에서는 보육원 친구들이 무명(천정명 분)의 아픔을 함께 느끼고 그의 복수에 가담한다는 내용이었어요. 조력자의 느낌이 강했죠. 그런데 극이 점점 진행되면서 여경이도 자신의 부모님에 대한 복수에 빠져들게 됐어요. 감독님이 보여주고자 했던 모습이 그것 아니었나 싶어요. 복수만을 위해 달려가는 인간의 모습이요.”
채여경이 복수에 매몰된 것처럼 연예인은 타인의 시선에 매몰되기 쉽다. 불특정 다수에게 끊임없이 노출되고 평가당하는 것이 이들의 숙명. 무엇이 비난이고 무엇이 사탕발림이며 또 무엇이 충언인지 구별하기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와 진배없다.
정유미는 “직업 특성 상 다른 사람의 얘기를 많이 듣게 되고 또 많이 들어야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다른 사람의 얘기에 너무 많이 흔들려서 내 자신이 없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더라”고 고백했다.
“유명세를 타기 전에는 오히려 스스로를 잘 지켜냈어요. ‘천일의 약속’(2011)으로 주목을 받게 되면서 사람들에게 비춰지는 내 모습이 어떻게 비춰지는지 의식하게 되더라고요. 제게 요구되는 기대치를 충족시켜 드려야할 것 같고…. 점점 평가에 연연하게 되고 연기 외적인 부분에 신경쓰게 됐어요.”
정유미가 스스로를 다잡게 된 데에는 지난 3월 종영한 ‘육룡이 나르샤’의 공이 컸다. 정유미는 “연기적으로 자극을 많이 받았다. 동료 및 선후배 배우들로부터 도움이 되는 말도 많이 들었다. 배우라는 직업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고 털어놨다.
어머니의 조언도 큰 힘이 됐다. 어머니는 정유미에게 자신감을 세우지 말고 자존감을 쌓으라고 충고했다. “자존감은 내 안에서부터 채워가는 것. 외부의 시선에 흔들리지 말자.” 정유미는 어머니의 이야기에 스스로를 다시 한 번 되돌아봤다고 전했다.
“저에게 쏟아지는 수많은 말들 가운데에는 물론 저를 위한 고민의 말도 있을 테죠. 하지만 반대의 경우 역시 굉장히 많아요. 사람들의 의미 없는 말에 휩쓸려 가는 것이 저 스스로에게 너무 미안하더라고요. 정유미의 단점을 가장 잘 아는 것도 정유미이고, 정유미를 가장 사랑하고 아껴줄 수 있는 사람도 정유미에요. 그걸 깨닫고 난 뒤로는 스스로에게 좀 더 집중하려고 해요. 나를 지키는 방법을 이제 조금 알 것 같아요.”
스스로를 지키는 법을 알게 된 만큼, 앞으로의 배우 인생은 다르게 펼쳐질 것 같다는 설명이다. 최근 몇 년 간‘엄마의 정원’(2014), ‘하녀들’(2015), ‘육룡이 나르샤’(2016), ‘국수의 신’(2016) 등에 연달아 출연하며 쉼 없이 달려왔지만 당분간 공백기를 가지며 자신을 재정비하겠단다.
“작품을 연달아 하면서 저 자신이 많이 소모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동안은 연기를 하고 싶다는 욕심 혹은 배역에 대한 욕심에 작품을 선택하곤 했죠. 배우로서 저의 기본기나 그릇에 대한 고민은 많지 않았던 게 사실이에요. 그런데 ‘육룡이 나르샤’와 ‘국수의 신’을 연달아 작업하면서 배우로서 스스로를 비워야 할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