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엔터 이은호 기자]
배우 이상엽은 KBS2 ‘마스터-국수의 신’(극본 채승대, 연출 김종연 임세준, 이하 국수의 신) 속 박태하를 위로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이상엽만큼 박태하의 마음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이가 또 있을까. “태하에게서 빠져 나오지 못해 죽을 것 같다”던 그였지만, 어쩌면 박태하에겐 이상엽의 존재가 가장 큰 위안이 됐을는지도 모른다.
Q. 비 오는 날 좋아해요?(인터뷰가 진행된 날은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이상엽: 기분에 따라 다른데 요즘엔 비 오는 것만 봐도 태하 생각이 나요. “태하가 우네” 어제 밤에도 술을 마시다 그런 말을 했었죠. 장난 아니에요, 저 요즘.(웃음)
Q. 그렇지 않아도 캐릭터에 푹 빠져 있다는 얘긴 전해 들었어요.
이상엽: 이렇게까지 빠진 건 처음이에요. 처음 대본을 봤을 땐 “태하 너무 불쌍하지 않아요? 어떻게 이런 삶이 있지?” 얘기를 나누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부턴 아무 말 못할 정도였어요. 감당이 안 되더라고요. 태하의 인생 때문에 제가 너무 많이 지쳤어요.
Q. 박태하의 무엇이 당신을 슬프게 만들었나요?
이상엽: 태하의 삶은 오로지 친구들에게만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어요. 그게 아직도 어렵고 저를 힘들게 해요. 나중엔 태하가 보육원 4인방과 다해에게 아빠 같은 존재였단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면서 태하가 더 이해되고, 더 힘들었고, 더 아팠어요. 김길도(조재현 분)와의 관계도 달라졌어요. 나쁜 사람이지만, 태하에겐 아빠였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요.
Q. 그렇지 않아도 태하와 김길도와의 관계가 묘했어요. 인간적인 교감이 느껴졌다고 할까요?
이상엽: 저와 조재현 선배 모두 원했던 느낌이에요. 우리가 굉장히 밀접한 관계가 되면 안 되죠. 하지만 미묘한 둘만의 끌림이 느껴지게끔 연기했어요. 김길도는 박태하 인생의 유일한 친한 중년 남성, 유사 아빠였잖아요. 감독님과도 얘기를 많이 했고 조재현 선배와도 얘기를 많이 했어요.
Q. 사실 태하의 불행은 김길도로부터 시작됐잖아요. 그런데 태하에겐 김길도에 대한 복수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죠.
이상엽: 태하는 친구들을 보호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김길도의 곁을 지킨 거예요. 가까이서 관찰하면서 그에게 빠진 거죠. 술 취해 잠든 김길도를 보며 “내 아버지, 당신이 죽인 거 압니다”라는 대사를 한 적이 있어요. 제 해석이 잘못된 것일지도 몰라요. 그런데 저는 술에 취한 김길도가 애처로워 보였어요. 어쩌면 조재현 선배가 애처로워 보였는지도 모르고요.
Q. 아까 보육원 친구들의 아버지가 된 것 같다고 했죠. 아버지가 된 경험이 없는데, 아버지와 같은 사랑을 베푸는 게 가능하던가요?
이상엽: 베푼다…. 어렵네요. 그런 마음이었어요. 나는 2G폰을 쓸지언정 너는 스마트폰을 써라, 내 신발은 구멍이 나도 너는 나이키를 신어라. 그게 태하였던 것 같아요. 작품을 할 때마다 아버지에 대해 한 번 씩 더 생각하게 되는데, 이번엔 좀 달랐어요. 그 전엔 내가 아버지를 ‘봤다면’, 이젠 (가슴을 두드리며) 여기로 느끼게 된 거죠. 한편으로는 겁나요. 아버지가 된다는 게.
Q. 아버지의 마음을 갖게 되기까지 태하에게도 갈등이 있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드라마에선 태하가 마냥 선한 인물로 그려진 느낌이었어요.
이상엽: 착한 걸 넘어선 것 같아요, 하늘에 계신 박태하님은.(웃음) 태하에겐 ‘나’란 존재가 없었다고 생각해요. 내가 먹고 싶고, 갖고 싶고, 하고 싶은 게 없고 ‘무명(천정명 분)이가 먹고 싶을 거야’, ‘여경(정유미 분)이가 갖고 싶을 거야’, ‘길용(김재영 분)이가 하고 싶을 거야’로 꽉 차 있었던 거 같아요. 마냥 주기만 했다면 제가 더 힘들었을 텐데 그나마 다해(공승연 분)와의 러브라인이 있어서 저에게도 태하에게도 위안이 됐어요.
Q. 태하의 죽음은 그에게 최선의 결말이었을까요?
이상엽: 박태하만의 방식이었겠죠. 나를 버리는 희생. 피바람이 부는 가운데서 내 피로써 싸움을 끝내길 바라는 마음. 그런 대사가 있었어요. “내가 마지막에요.” 이 끝없는 싸움을 내 희생으로서 멈췄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죠.
Q. 그래서 태하는 행복했을까요?
이상엽: 그러게요. 궁금해요, 걔가 행복이라는 단어는 알까. 그나마 다해가 있었으니까 ‘좋다’는 감정 정도는 알게 되지 않았을까요? 박태하는 자기감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던 것 같아요. ‘시그널’의 김진우는 나도 없고 남도 없었다면 박태하는 나는 없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있었으니까요.
Q. 어쩌면 당신은 세상에서 박태하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인지도 몰라요. 혹시 태하에게 해주고 싶은 위로의 말이 있나요?
이상엽: 박태하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 아……. 음…. (잠시 침묵) 되게 뭉클하네요. 그런 얘기를 한 적 있어요. 태하가 자기 옷을 사러 가봤을까? 내가 더 많이 사랑해주지 못해 미안하네요. 아, 마음이 되게 아프다~ 왜 그런 질문을 하세요!(웃음) 가슴이 엄청 아프네.
Q. 박태하에겐 이상엽이란 배우를 만난 게 큰 행운이겠어요. 이렇게까지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다니.
이상엽: 제가 박태하에게 고맙죠. 부끄러운 얘기지만 이렇게 깊이 들어간 것도, 헤어 나오지 못해 힘든 것도 처음이에요. 인터뷰하기 전, 메이크업을 하고 촬영 준비를 하면서도 기계적으로 태하의 영상을 찾아보고 있더라고요. 몇 년 후에도 박태하란 이름을 마주하면 왈칵할 것 같아요.
Q. 배우 이상엽에게도 박태하가 분명한 터닝포인트를 마련해줬겠죠?
이상엽: 그럼요. 앞으로 지금만큼 배역에 들어갈 수 있을 거고 저 또한 더 들어가려고 노력할 거예요. 다만 빠져나오는 방법을 잘 찾아야겠죠. 이런 고민, 사실 처음 해봐요. 태하가 죽었기 때문에 더 못 빠져나올 수도 있어요. 가끔 숨이 막혀요. 내가 관 안에 있는 것처럼.
Q. 배역에 빠지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알게 됐잖아요. 그 고통을 알면서도 자신을 배역에 내던질 준비가 된 건가요?
이상엽: 힘들지만 희열이 있어요. 연기를 하면서 남들은 예상하지 못한 대목에서 혼자 눈물이 터지기도 하고, 혼자 흐뭇하게 바라보는 장면도 생기고요.
Q. 이렇게 인터뷰를 하는 과정이 빠져나오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하겠네요.
이상엽: 네, 맞아요. 기자님이 질문을 어떻게 하시던 나 하고 싶은 얘기, 태하 얘기 쏟아내면서 스스로를 정리해가는 것 같아요. 어제보다는 조금 나아진 거예요. 어제는… 죽을 것 같았어요.(웃음)
Q. 인터뷰가 끝나면 마음 정리를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이상엽: 많은 사람들을 만나려고 해요. 요즘엔 저의 연기 인생 시작을 함께 해줬던 사람들을 만나려고 해요. 김석훈 선배, 장혁 선배, 연기 선생님…. 많은 얘기를 나누지 않아도 같이 앉아서 술잔을 기울이다 보면 ‘이게 이상엽이구나, 나는 사람들을 만나서 치유해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이상엽의 사람 만나기는 계속 됩니다. 하하하.
이상엽: 차기작을 생각하는 게 잘 안 돼요. 그렇지 않아도 많이들 물어봐요. “이제 뭐 할 거야?” 혹은 단막극이 예정돼 있으니까 “그 작품 어때?” 머릿속으로는 알아요. 이 작품이 어떤 작품인지, 또 끝나면 내가 무슨 작품을 하고 싶은지. 그런데 그게 입 밖으로 안 나가요. 난 아직 그러면 안 될 것 같고…. 딱 오늘까지만 하려고요. 오늘까지만 힘들 거야.
Q. 박태하한테 가장 중요한 게 친구들이었다면, 이상엽에게 가장 중요한 건 연기인가요?
이상엽: 네! 연기가 정말 좋아요. 연기 때문에 기분이 좋고, 들뜨기고 하고, 미친 사람이 되기도 하고, 인생을 배우기도 하고. 정말 좋아요. 더 재밌어진 것 같아요.
Q. 아, 벌써 인터뷰를 마칠 시간이네요.
이상엽: 아우, 좋은 얘기를 하나도 못했네.(웃음) 저 행복해요! 으하하. 마음 한편이 아프다는 걸 처음 느꼈어요.
Q. 하지만 그 아픔을 없애고 싶은 건 아니죠?
이상엽: 네, 그럼요. 어떻게 보면 제가 이 가슴 아픔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아요. 이제 헤어나야죠. 연기를 좀 더 재밌게 하는 방법을 배웠어요. 그동안 참 좋았어요. 태하에게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