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엔터 정시우 기자]
20년 전 ‘비트’ 민의 등장과 함께 정우성은 반항의 아이콘이자 청춘의 표상으로 시간 안에 박제됐다. 민은 한강 교각 아래에서 영원히 잠들었지만, 정우성은 스크린 밖으로 걸어 나와 민이 못다 한 청춘을 살아갔다. 불멸의 육신으로 봉인된 민의 분신이 그에게 감지되기 때문일까. 시간이 흘렀지만 정우성에게선 여전히 청춘의 냄새가 난다.‘아수라’에서 정우성이 온몸으로 껴안은 한도경은 그래서 더 기묘하다. 20대 청춘을 대변했던 민=정우성의 몸을 빌어 40대 중년 소시민의 대표성을 연기하는 한도경=정우성을 바라보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권력과 권력 사이에 끼어버린 남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밀정이 돼야 했던 남자, 톡 치면 부서져 버릴 것 같은 남자…한도경에게 삶이란 마치 희망고문과 같아서, 발버둥 칠수록 나락으로 떨어지는 지옥이다. 그러니까 ‘아수라’의 한도경은 ‘비트’의 민이 살아있다면 어땠을까란 물음에 대한 가장 비극적인 회답일 것이다. 이것은 대한민국에서 20-30대를 통과한 ‘비트세대’에게 보내는 지독한 은유로도 읽힌다.
‘아수라’ 속으로 걸어들어 간 정우성을 만났다. 그 어떤 순간에 정지화면 버튼을 눌러도 그것이 곧 그림이 되는 정우성은 ‘아름답다’라는 형용사가 여성들의 전유물이 아님을 일깨우는 피사체다. 시간은 그에게 ‘여유’라는 선물도 안겼다. 이 남자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외모 찬양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받아치며 오히려 편안하게 즐긴다. 잘생긴 외모가 연기의 장애물이라 발언하는 식상함이 없어 오히려 매력적이다. 정우성은 정우성이다.
Q. 한도경은, ‘비트’의 청춘 민이 살아남아 40대가 됐으면 어땠을까라는 상상에 대한 가장 비극적인 대답 같습니다.
정우성: 김성수 감독님과 오랜만에 작업하면서 ‘비트’를 의식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이 작품을 보는 많은 분들이 한도경의 모습에서 민이를 봤다고 하시더라고요. 영화라는 세계 밖에서, 정우성의 세월의 흐름을 목격자로서 관찰해 주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Q. 많은 인터뷰에서 “나는 민을 죽이지 않았다”라고 하셨어요. 민의 미래가 희망적이길 바라는 마음이 담긴 발언이었을 텐데요.
정우성: 저는 민을 정말 잘 키우고 싶었어요.(웃음) 정말이요. 여유 있게 잘 나이 먹고, 행복하길 바랐죠. 어떻게 보면 ‘개인 정우성’ 안에 민을 담아서 이끌어 온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개인 정우성이 민을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한도경이라는 새로운 캐릭터로 안남이라는 도시에 뛰어들어서 모험을 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하고요.
Q. 20대 청춘의 아이콘이, 40대 중년 소시민의 대표성을 연기했다는 것도 의미심장한 지점이 있는 것 같아요.
정우성: 그런 점이 있을 것에요. 작품을 하면서 끊임없이 한도경다운 걸 찾으려고 했습니다. 한도경스러움을요.
Q. 당신이 정의한 한도경스러움은 뭔가요.
정우성: 찌든, 스트레스요. 삶에 찌든 40대 중년 남성의 스트레스를 보여주고 싶었죠.
Q. ‘아수라’는 악인(惡人)들의 전투장입니다. 누가 더 악인인가를 두고 내기를 벌이는 무간지옥 같죠.
정우성: 영화 속, 안남이라는 가장의 공간은 악이 자연스럽게 행해지는 세계입니다. 한도경은 환경이 생산해 낸 악인인 셈이죠. 폭력이 난무하는 안남은 또 다른 악인을 계속해서 생산해 낼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악에 물들어가는 후배 형사 선모(주지훈)은 한도경의 과거인 거고, 이미 악인인 시장 박성배(황정민)는 한도경의 미래라고 볼 수 있죠. 한도경을 그 중간에 끼어 있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Q. 시나리오도 보지 않고 ‘아수라’ 합류를 결정하신 걸로 압니다. 시나리오가 어떻건 물러날 여지가 없었을 텐데요, 뒤늦게 보고 어떠셨나요.
정우성: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이게 뭐지?’ 싶었습니다. 범죄느와르라면 약간 멋 부릴만한 시퀀스들이 있어야 하는데, 그럴 여지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관객이 연민을 느낄만한 인물도 없고요. 그런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어놓으셨으니 ‘이게, 뭐지?’ 싶었던 거죠. 그래도 제가 워낙 존경하는 감독님이기에 분명 이 안에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동시에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 내가 관습적인 형태의 시나리오를 기대하고 있었나? 멋들어진 캐릭터를 감독님과 하고 싶었나?’ 싶어지더라고요. 감독님과의 작업을 돌아보면 늘 새로운 것들을 시도했고, 그랬기 때문에 그 시대에 아이콘이 된 거고, 그 시대의 시그니처 장면이 나온 거고, 청춘물이 나올 수 있었는데 말이죠. 그래서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내가 놓친 게 있는지 다시 보자’ 했죠.
Q. 완성본을 보고 나서는 어떠셨나요.
정우성: 뿌듯했어요. 우리가 잘 해 냈구나 싶었죠. 그래서 감독님께 더 감사드려요. 어떻게 보면 제가 인정하는 감독님이지 다른 배우들이 인정하는 감독님은 아닐 수 있잖아요. 다들 감독님의 옛 명성이나 추억 때문에 참여를 결심할 수는 있지만, 과정 속에서 실망하면 힘들어 질 수밖에 없거든요. 그런데 모든 배우가 감독님 작업방식에 큰 애정을 갖게 되고, 인정하고, 지지하고, 완성본에 대해 ‘역시 틀리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감독님께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감사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서 너무나 다행이고 뿌듯했어요.
Q. 김성수 감독님과는 ‘비트’를 시작으로 네 작품을 함께 했습니다. 옆에서 지켜 본 감독님은 많이 변한 것 같나요?
정우성: 아니요. 전혀 변하지 않으셨어요. 어떻게 이렇게 한결같은 에너지와 뚝심을 가지고 계신지, 늘 놀랍습니다.
Q. 누군가와 영화적인 인생을 함께 간다는 건, 의미 있는 일입니다.
정우성: 너무 소중한 일이죠. 감독님은 배우 정우성에게 영화 작업의 재미와 영화인으로서의 시각 등을 가르쳐 주신 분입니다. 늘 함께 하고 싶죠.
Q. “나에겐 꿈이 없었다…”라는 ‘비트’ 민의 오프닝 내레이션은 “인간들이 싫어요…”라는 ‘아수라’ 한도경의 오프닝 내레이션과 묘한 대구를 이루는 느낌이 들어요. 두 작품 외에도 ‘태양은 없다’ ‘유령’ ‘똥개’ ‘데이지’ ‘나를 잊지 말아요’에는 모두 당신의 내레이션이 들어가죠.
정우성: 맞아요. 캐릭터 면에서 내레이션은 유리할 수 있어요.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얘기를 건네는 화자의 입장이 될 수 있으니까요. ‘아수라’의 경우 감독님이 내레이션이 특히나 신경을 쓰셨어요. “모든 기력을 소진한 한도경이 푹 꺼진 의자에 앉아 누군가에게 힘없이 고백하듯 했으면 좋겠다”고 상당히 구체적으로 디렉팅을 주셨죠.
Q. 폭력 수위가 강하다는 게, 많은 이들의 의견입니다. 실제로 한도경은 끓는점을 향해 쉬지 않고 달립니다. 연기하는 입장에서 체력적으로 힘들지 않았나요?
정우성: 한도경을 연기하며 심리적인 피로도가 워낙 컸어요. 지독하고 처절한 감정의 밑바닥까지 갔기 때문에, 그런 물리적 형태의 가해는 전혀 힘들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Q. 그럼에도 유리컵 씹는 장면을 연기할 때는 나름 생각이 많으셨을 것 같아요.(웃음)
정우성: 그게 우리 때의 뒷골목 정서인데, 그런 행위를 하는 남자들이 있었어요. ‘으악 죽인다’라고 하는데 상대에게 내가 얼마나 강한 수컷인지를 과시하는 행태죠. 뒷골목 정서를 모르는 분들에겐 상당히 충격적인 장면이었을 거예요.
Q. 말했듯이, 수컷들 사이에는 본능적으로 미묘한 경쟁이 있죠. 그런데 당신은 남녀불문 선망의 대상이에요. 연예인들의 연예인이죠. 많은 남성들이 정우성에 대해서는 경쟁의 대상보다는 우상으로 여기는 시선이 큰 것 같습니다. 그런 시선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느끼시나요.
정우성: (웃음) 의식을 안 하는 게 좋은 것 같아요. 배우로서의 자세와 가치관을 그에 걸 맞는 행동으로 증명하는 게 중요하고요. 그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Q. 그에 걸 맞는 행동이라.
정우성: 그러니까, 이런 거죠. 제가 만약 남들의 시선을 계속 의식했다면 흥행할 만한 작품, 안전한 작품에만 집중했을 겁니다. 저는 그러고 싶지는 않아요. 새로운 시도와 도전을 계속 하고 싶어요. 그게 작업에 임하는 제 가치관을 보여주는 방식이라 믿어요. 나이먹지 않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고요.
Q. 말한 대로 ‘아수라’ 속 인물들은 환경에 의해 잡아먹힌 악인들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겐 본성이라는 게 있잖아요? 본성이 환경을 이길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정우성: 저는 본성이 환경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자아확립이 중요하죠. 자아를 포기한다면 환경에 먹힐 테니까요. 세상 안에 내가 있지만,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나로 인해서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잖아요? 그 세계를 지키려면 스스로를 잘 돌봐야 하는 것 같아요
Q. 당신은 어린 나이에 연예계에 데뷔했고, 많은 이들의 시선 속에서 살아왔죠. 연예계라는 곳이 사실, 무언가에 휘둘리기 쉬운 비즈니스 세계잖아요. 자아확립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위기의 순간도 있지 않았을까요.
정우성: 위기감을 느낀 시기는 분명 있었죠. 관계에서 어긋남이 생겼을 때, 믿고 손을 맞잡았던 사람이 나를 흔들 때. 그럴 때마다 저를 믿고 다졌던 것 같아요.
Q. 정우성이 정우성에게 지니는 가장 큰 믿음은 뭔가요?
정우성: 제가 워낙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났어요. 어린 시절 철거촌에서 살았는데, 그 철거촌에서 가장 마지막에 이사 나온 집안의 아이였죠. 가난 때문에 또래 친구들보다 빨리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어요. 그런 환경에서 아버지나 내 삶에 대한 원망보다는,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스스로 내 것을 만들어야 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물론 내 것을 만드는 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세상이 어린 아이에게 가하는 불합리한 것들이 많았으니까요. 그래서 더 정당성을 찾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남에게 더 떳떳해 보이고 싶었고, 신세 지는 것을 기피했죠. 그렇게 나라는 아이를 만들고 성장시켜 나갔던 것 같아요.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얻어지는 것의 감사함이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됐어요. 얻은 걸 잃는 것에 대해서도 원래 내 것이 아니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죠. 원래 내 것이라는 건 없으니까. 잠시 나에게 왔다가 가는 것일 뿐. 모든 것들이, 다.
Q. 세상 모든 것들이 원래 내 것이 아니었음에도, 잃기 싫은 게 있다면요?
정우성: 명분. 그리고 자아. 내일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는 게 인생이에요. 어떤 상황이 와도 적응하고 버티고 싶어요. 그 과정에서 무언가와 타협을 해야 한다 할지라도, 명분만큼은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Q. 멋진 생각이군요.
정우성: 모든 것이 결국 각자의 몫이라 생각합니다. 나로 인해 생긴 결과는 남의 탓이 아닌 거잖아요. 선택에는 어떤 기대와 욕심이 있었을 텐데, 그게 충족이 안 되니까 화가 나고 원망도 하게 되죠. 원망의 대상을 자기에게 돌리기 무서우니까 밖에서 찾으려 하는데, 그러다 보면 스스로 다쳐요. 오히려 ‘이건 내 잘못이야’ 딱 인정하는 순간 상처가 아닌 극복이 된다고 생각해요. 내가 더 강한 나로 성장하는 거죠. 어린 시절의 영향 때문인지, 그런 생각들을 꾸준히 했던 것 같아요.
Q. 식상한 질문이겠지만, 미남으로 살아가는 기분은 어떤가요?
정우성: 식상하지 않아요!(일동웃음) 좋아요, 제 얼굴이.
Q. 외모 발언들에 대해 오히려 편안하게 즐기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그게 매력이기도 하고요. 잘생긴 외모를 장애물이라 발언하는 식상함이 없어서 좋아요.(웃음)
장우성: 나다운 걸 찾는 게 더 중요한 게임 같아요. 아빠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제 외모가 주는 이미지 때문인지 생활감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셨나 봐요. 그런데 외부의 시선은 제가 억지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나다운 표현법을 찾아서 생활감을 담아 보여드리는 게 맞다고 봐요. 일상적 감성과의 연결고리를 찾으려 노력하고 있어요.
Q. 정두홍 무술감독님도 그렇고, ‘아수라’ 무술을 지도한 허명행 무술감독님도 그렇고 “우리나라 최고 액션배우는 누구인가요?”라고 물으면 다들 정우성이라고 지체 없이 꼽더군요.
정우성: 부상에 대한 두려움을 안 갖고 덤비니까 그런 말씀을 해 주시는 것 같아요. 물론 무모하게 ‘난 다쳐도 상관없어!’ 이런 건 아닙니다. 다치며 현장에 큰 피해를 주는 꼴이니까요.
Q. 당신의 영화를 본 적 없는 외국인에게 액션 신을 하나 보여준다면, 어떤 ‘영화’를 추천하겠어요?
정우성: 너무 많아서 어떻게 하나를…(일동웃음) 그래도 하나를 꼽아야 한다면, ‘무사’요. 사막 촬영신이 있었는데, 다들 어려울 거라고 얘기했어요. 액션 난이도도 높았기에, 연습을 더 죽도록 했죠. 3개월 동안 쉬지 않고 연습을 했던 것 같아요. 가혹하게 저를 몰아붙여야 현장에서 빠르게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렇게 준비해서 촬영에 돌입했는데, 많은 외국 사람들이 저를 보고 그랬어요. “이 사람은 진짜 무술 하는 사람인가요?”
Q. 터닝 포인트라 여겨지는 작품은 아무래도.
정우성: ‘비트’죠. ‘비트’가 제 배우 인생을 비틀어놨습니다.(웃음) 그리고 ‘아수라’가 또 한 번의 터닝 포인트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Q. ‘감시자들’ 이전까지 행보가 다소 주춤한 느낌이 있었는데, ‘감시자들’을 기점으로 발걸음이 상당히 빠른 느낌입니다.
정우성: 그때는 글로벌 프로젝트에 대한 여러 논의들이 있었고, 기다리고 있었고, 준비하고 있었어요. 결국 메이드가 안 되면서 의도하지 않은 공백들이 조금 있었죠. 배우로서 대중과 생긴 거리감을 좁히고 싶은 생각에 ‘감시자들’을 시작으로 작품 활동을 활발하게 했어요. 그러면서 감독 데뷔도 늦어지게 됐죠. 대중과의 거리감을 좁히는 게 배우로서의 본분이라 생각했거든요.
Q. 배우가 아닌, 감독 혹은 제작자로 이루고 싶은 건 뭔가요?
정우성: 좋은 선배가 되고 싶어요. 자극을 끊임없이 줄 수 있는. 어떻게 보면 욕심인 거죠.
Q. 그런 정우성 곁에는 좋은 선배가 있었나요?
정우성: 많을 필요는 없습니다. 한 명의 좋은 선배만 있어도 행복한 거죠. 김성수 감독님은 제게 정말 그런 분이세요. 배우로서도 이번에 생겼어요. (황)정민이 형. 어제 형에게도 이야기 했죠. 한 작품 만났다-헤어지는 이곳에서 후배를 이끌어주는 선배를 찾기 힘든데, 형은 그런 사람 같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