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나긴 새벽을 꼬박 지새운 날이 아픈 가슴 치던 날이 그 얼마나 많았소. 홀로이 걷는 걸음이 아닐 것이니. 사립문을 열어두시오. 칼바람이 멎을 것이니.” (드라마 ‘역적’ OST ‘익화리의 봄’ 중)
연산이 명했다. 자신에게 반(反)하는 향주목은 더 이상 조선이 아니요, 그곳의 백성들 또한 자신의 백성들이 아니니 향주목을 토벌하라고. 연산군에게 국가는 왕 자신이었다. 그래서 왕에게 반기를 드는 것은 역적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진짜 국가는 무엇이며 진짜 역적은 누구인가.
MBC 월화드라마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이하 역적)’이 지난 16일 막을 내렸다. 연산(김지석 분)은 광기에 사로잡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고 홍길동(윤균상 분) 패거리는 조선에서 자취를 감췄다. 백성들은 홍길동이 바다 건너 미지의 땅에서 새로운 국가를 건설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지만, 이들은 조선에 남아 소임을 다했다. 백성들이 고통에 처할 때마다 악인들을 응징하면서.
조선시대 정치가이자 학자였던 허균이 쓴 ‘홍길동전’은 적서차별, 탐관오리의 부정부패 등 당대 사회의 부조리함을 꼬집는 소설이다. 이야기에서 홍길동은 비범한 재주를 가진 영웅으로 그려진다. 백성들의 고통은 홍길동의 선의와 기이한 능력으로 말미암아 해소된다.

그러나 드라마 ‘역적’은 홍길동 개인의 재주가 아닌 민초들의 저항을 보여준다. 연산이 향주목 토벌을 명하자 그곳의 백성들은 홍길동 패거리와 함께 관군들에 맞섰다. 전투에 앞서 한 여인네는 ‘익화리의 봄’을 부른다. 노래는 백성들의 입과 입을 거치며 힘을 얻는다. “사립문을 열어라. 칼바람이 멎는다”는 희망의 메시지는 백성들의 목소리로 완성된다.
혹자는 이 장면을 보고 프랑스 혁명을 다룬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떠올리고 혹자는 광주 민주 항쟁을 떠올린다. 지난해 연말 시작된 촛불집회, 그곳에서 불리던 ‘애국가’를 떠올리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하지만 이들이 가리키는 지점은 동일하다. 국가는 곧 국민이라는, 너무도 당연한 이치.
‘역적’이라는 작품의 제목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연산에게 있어 홍길동은 백성을 훔친 도적이자 자신에게 거역하는 역적이다. 그러나 백성들에게는 역적은 나라를 훔친 연산이다. “능상의 무리를 척결하라”던 연산에게 홍길동은 일갈한다. “너의 죄명은 진짜 위(上)가 무엇인지 알아보지 못한 죄, 위를 능멸한 죄, 능상이다.”
결국 ‘역적’은 통치자 위에 백성이 있으며, 백성이 곧 국가임을 역설한다. 국가의 원리를 이 같은 이치로 끌어오는 힘은 비범한 영웅이 아닌 평범한 민초에게서 나온다는 것 또한 중요한 아날로지다. 이것은 작품 안에서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멀게는 항일항쟁부터 민주화 운동, 그리고 온갖 촛불집회까지. 수많은 국가적 위기를 민중의 힘으로 이겨낸 대한민국에서 ‘역적’이 갖는 설득력은 강력하다. 진짜 국가는 무엇인가. 답은 더 이상 갈라질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