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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웅의 아무말이나] 극장 개봉은 이제 관객 손안에 있소이다

[허남웅 영화평론가]

▲영화 '지랄발광 17세'의 스틸 사진
▲영화 '지랄발광 17세'의 스틸 사진

이제는 극장 개봉을 관객이 확정하는 시대다. 뭐, 다 그렇다는 건 아니고 특정 영화 몇 편이 그런 움직임을 주도하고 있다. ‘겟 아웃’이 시발점 역할을 했다. ‘겟 아웃’의 보도자료에 나와 있는 글을 인용해보자. ‘예고편을 접한 국내 관객들은 예측 불허의 전개에 호기심을 드러내면서도 영화가 선사하는 미스터리한 분위기에 놀라움을 자아내기도 했다. 압도적인 몰입감과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예고편은 곧 네티즌들의 국내 개봉을 요청하는 목소리로 이어졌다.” 그 결과, 흑인 주인공이 백인 연인의 집에서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는 ‘겟 아웃’은 국내 개봉은 물론 개봉 19일 만에 200만 관객을 돌파하며 기대 그 이상의 성적을 올렸다.

개봉 예정에 없다가 관객의 요청으로 극장행을 확정 지은 영화는 또 있다. 17세 소녀의 성장통을 그린 하이틴 영화 ‘지랄발광 17세’(개봉 6월 28일)다. 이 영화 역시 보도자료의 인용을 통해 어떻게 거짓말 같은 개봉에 이르게 됐는지를 알아보자. ‘… (중략) 로튼 토마토 신선도 95%를 획득하고 해외 평단들의 찬사가 이어지자 네티즌들과 영화팬들 사이에서 개봉 미정인 작품 중에 가장 보고 싶은 영화로 손꼽히면서 입소문이 퍼지게 된다. 국내 극장 개봉 없이 DVD 발매 예정이었던 ‘지랄발광 17세’의 개봉에 대한 문의가 이어지자 배급사 소니 픽쳐스는 결국 고심 끝에 DVD 발매 하루 전, 전격 극장 개봉을 확정하며 제작해 놓은 DVD를 전량 폐기하고 개봉 준비에 돌입하게 되었다.

‘지랄발광 17세’와 ‘겟 아웃’은 각각 청춘물과 공포물이다. 언제부턴가 한국영화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장르로 관객의 이목을 끌고있다. 워낙 한국의 극장가가 흥행에 검증된 장르와 스타 캐스팅이 돋보이는 블록버스터 위주로 돌아가다 보니 다양성의 갈증에서 비롯된 결과로 보인다. 실제로 ‘지랄발광 17세’와 ‘겟 아웃’이 작품성 보장, 재미는 더더욱 보장임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개봉을 확정한 데에는 한국 극장가의 편식하는 배급 분위기와도 관련이 깊다. 두 영화 다 같이 한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스타가 출연하지 않고 특히 ‘겟 아웃’의 경우, 흑인이 주인공인 영화는 국내에서 흥행이 쉽지 않다는 편견이 작용해 영화팬들의 요청이 아니었다면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나 2차 부가 판권 시장으로 직행할 운명이었다.

극장 개봉을 촉구하는 영화 소비자 운동의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1년 ‘와라나고 운동’이 큰 반향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라이방’과 ‘나비’와 ‘고양이를 부탁해’의 제목 앞글자를 딴 이 운동은 개봉과 함께 흥행 성적이 여의치 않다는 이유로 상영관이 줄어들자 관객들이 자발적으로 다시 보기를 제안하며 연장상영과 재개봉의 형태로 이어졌다. ‘지랄발광 17세’와 ‘겟 아웃’과 달리 와라나고 영화들은 극장 개봉이 전제된 상태였지만, 갈수록 줄어드는 스크린 수에 반발(?)한 관객의 요청으로 상영 일수가 늘어났다는 점에서 소비자 운동의 맥락을 함께한다.

소비자 운동이 일어난 배경은 흥행 지상주의에 따라 속칭 ‘큰 영화’, 즉 빅네임 스타가 출연하고 블록버스터급의 볼거리와 제작비에, 전방위적인 마케팅이 가능한 작품을 우선하는 배급에 대한 반발로 보면 된다. 와라나고 운동이 일어났던 당시는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본격적으로 극장가에 공룡의 위용을 드러내던 시기다. 그저 규모와 이름값에만 함몰되어 상대적으로 저예산에, 볼거리보다 메시지에 집중한 국내 영화가 유독 차별을 당하자 이에 영화 팬들이 좀더 많은 관객이 이 영화와 만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든 게 와라나고 운동이었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지금, 극장가의 배급의 룰은 더욱 다양성에 대한 진입장벽을 어렵게 했다. 여자가 단독 주인공인 영화는 힘들다, 친근한 백인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는 영화는 흥행이 어렵다, 공포물처럼 마니악한 장르가 흥행에 성공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다 등등. 이제는 국적에 상관없이 배급사의 입장에서 돈이 될 것 같지 않은 영화는 극장에서 볼 수 없는 상황에서 관객들은 더이상 수동적인 위치에 머물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알려 극장 개봉을 이루는 것은 물론 흥행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통해 영화 관람 소비자의 권리를 한층 높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질문 하나. 이와 같은 소비자 운동은 블록버스터 위주의 멀티플렉스 배급 정책에 변화를 몰고 올 것인가? 조심스럽게 예측하자면, 와라나고 운동 때보다는 좀 더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상황으로 보인다. 와라나고 운동이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친 것은 재개봉과 연장상영 동안 생각만큼 관객 수가 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경우, 관객의 요청에 따른 극장 개봉으로 흥행에 성공했던 표본의 수가 ‘겟 아웃’ 한 편이라 일반화해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겟 아웃’에 이어 ‘지랄발광 17세’ 역시 해외에서의 평단과 유력 영화 사이트의 호의적인 평가가 동반되어 이뤄지는 개봉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지금보다 입소문의 수단과 범위가 넓지 않아 충성 관객에게만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와라나고 때보다는 좀 더 넓은 층에 어필할 수 있는 환경이기 때문이다.

좀 다른 경우이기는 한데 ‘옥자’는 국내 대형 배급사의 보이콧에 따라 본의 아니게 그동안 관심 밖에 있었던 단관 극장이 주목받는 환경을 (본의 아니게) 조성했다. ‘겟 아웃’ ‘지랄발광 17세’의 극장 개봉 촉구와 ‘옥자’의 단관 극장 위주 개봉은 규모가 크고 유명한 영화에만 유리했던 멀티플렉스 위주의 배급 환경이 얼마나 영화 팬들을 소외시켰는지를 역으로 증명한다. 멀티플렉스의 ‘멀티’에 걸맞게 다양한 영화를 보여달라는 개선의 목소리에 소극적으로 임했던 이들의 배급 정책이 이번 소비자 운동과 ‘옥자’ 사태로 어떤 변화를 맞게 될지 궁금하다. 부디 많은 이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개선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허남웅 영화평론가 edwo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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