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엔터 이주희 기자]
민규동 감독은 ‘간신’ ‘내 아내의 모든 것’ 등 감각적인 미장센을 만드는 대표적인 감독이다, 하지만 신작 ‘허스토리’는 그의 전작을 전혀 떠올릴 수 없을 만큼 결이 다른 작품이다. 전작에선 신 하나하나에 영화적 장식을 세심하게 새겨놓았다면, 이번엔 감독의 색깔을 강조하기보다는 오로지 상황 자체를 현실적으로 담아내는데 신경 썼다. 어떠한 필터링 없이 관객이 진실을 그대로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 영화는 감독의 자의식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감독의 스타일이 영화를 해치지 않게 숨어 있어야 했다. 소재가 어렵기도 했고 촬영 기간이 짧기도 했다. 2달 안에 촬영을 모두 끝내야 해서 무모한 기술적인 실험에 집착하는 과오를 범하지 않으려고 했다.”
코미디였던 ‘내 아내의 모든 것’, 사극이었던 ‘간신’, 장르의 색깔이 진한 작품들은 깊이 있는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관객 스스로 영화에 빠져들게 된다. 하지만 드라마라는 장르는 특정한 장치가 없기 때문에 매 신마다 각기 가지고 있는 밀도로 승부를 봐야 한다. 게다가 ‘허스토리’는 1992년부터 1998년까지 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를 오가며 진행된 관부 재판을 모티프로한 작품으로 여전히 우리에게 현재인 역사를 다루고 있기에 예민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드라마 장르를 한다는 것은 무기 없이 맨몸으로 전투에 나서는 것처럼 막막하다. 위안부 이야기는 아는 내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 관객의 편견을 넘어서야 하는데, 실존인물이 있기 때문에 지나친 극화를 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자체에 매력이 있어야 하지 않나. 이러한 점들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처음 민규동 감독이 위안부 소재를 다루려고 했던 것은 약 10년 전 일이다. 3년 전에 다시 프로젝트를 떠올렸고, 일본군 시점 혹은 살아 돌아온 사람의 시점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보기도 하다가 관부재판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발견하면서 ‘허스토리’가 탄생하게 됐다.
“일단 재판을 진행시킨 원고 단장(극중 문정숙, 김희애 분)을 보면, 60세가 넘어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사람이다. 주변 사람들이 무모한 행보라고 비판을 했지만 긴 시간 동안, 지금까지 계속 이 재판에 대해 알리고 살아가고 있다. 평범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치유해주기 위해 노력했고, 와중에 그 또한 많은 도움을 받았던 이야기다. 그의 삶이 너무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영화로 만들어야겠구나’ 마음먹었다.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이 위안부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데, 그 미안함 때문에 이런 소재의 영화는 보고 싶지 않아 하기도 한다. 하지만 ‘허스토리’는 그 미안함을 덜어주는 영화가 될 것이다.”
‘허스토리’는 과거 이야기를 재연하지 않고 법정 신으로만 이야기를 구성한다. 실제 영화는 지루할 틈이 없지만, 기획 단계만 놓고 생각해 보면 지루한 전개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우려가 있을 법하다. 민규동 감독 역시 플래쉬백으로 과거를 포함한 시나리오를 써보기도 했지만, 오히려 현실을 회피하는 것으로 느껴져 ‘현재’에만 초점을 맞추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허스토리’는 오직 증언에 힘이 실려야 하는 법정 드라마로 그려졌다.
“당시를 생각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위안부 할머니들을 품어주지 못했다. 오히려 숨어 지내게 만들었다. 그들이 용기를 냈을 때도 비난 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처럼 현실의 삶을 보여주는 게 시선의 확장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남아있는 것은 증언밖에 없기 때문에 증언의 싸움인데, 증인인 할머니들이 재판의 두려움과 기억의 혼동으로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이런 입체적인 시선이 할머니들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들이 증언하는 순간의 손 떨림과 젖은 눈과 핏대 선 목울대를 주목해야지, 그들의 과거였던 10대의 이미지를 그리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허스토리’는 2년 전 ‘귀향’, 지난해 ‘아이 캔 스피크’과 더불어 위안부 소재를 담은 의미 있는 영화다. ‘귀향’이 당시 전쟁 속 이미지를 강렬하게 전달해줬고, ‘아이 캔 스피크’가 우리 일상 속 존재하는 할머니들을 바라봤다면, ‘허스토리’는 하나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위안부에 대한 다양한 시선을 부여한다.
“‘허스토리’에는 여러 할머니들이 등장한다. 특정 할머니의 사연에 집중하고 공감하는 방식이 대중적일 수도 있겠지만, 다양한 사연을 가진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하나의 전체를 이룰 때 고정된 위안부의 이미지가 깨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그동안 정신대 할머니에 대해서는 다뤄지지 않았다. 위안부, 정신대 등 단어가 혼선되어서 사용되지 않나. 여기에 위안소 주인도 등장하는데, 이 할머니는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피해자라는 점이다. 당시 피해자들은 현재 하나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다. 편견을 깨뜨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면, 이 영화는 다시 위안부 영화가 만들어져야 할 이유로 설득될 것이다. 최근 위안부 관련 영화가 많이 나왔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다.”
여러 형태로 피해를 입었던 위안부ㆍ정신대 할머니들, 그리고 원고단장의 기생관광 건과 그로 인한 반성, 재일교포 변호사가 변론을 나서게 된 것까지, ‘허스토리’의 민규동 감독은 하나의 영화에 여러 가지 이야기 축을 덧대 하고 싶은 말을 오롯이 관객에게 전달한다. 특히나 충무로에서 쉽지 않은 여성의 이야기를 꾸준히 다루고 있는 민규동 감독이기에 그가 다음엔 어떤 작품으로 관객의 마음을 찾을지 기대를 하게 만든다.
“여자 주인공, 그것도 나이가 많은 배우들이 나오는 영화는 흥행에 대한 우려가 있는 게 사실이다. 게다가 위안부 소재는 힘든 이야기일거라고 생각해서 많은 예산으로 만들어지긴 어렵다. 다행히 우리는 선의의 투자가 있어서 만들 수 있었다. 내가 영화를 만드는 이유는 나를 바꿔주기 때문이다. 이전의 나를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만드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대를 행복하다고 느끼는 않는 것 같다. 불행하게 만드는 관습과 폭력의 장애물들 앞에서 힘겹게 허들을 넘고 있는 사람들을 응원하고 싶은 생각이 늘 있다. 그래서 소수자나 약자들, 묻혀버린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도 내가 언제 일관된 화두를 형성할지 궁금하다.(웃음) 연출 데뷔 20년째인데 아직도 하나의 고유한 스타일을 만들기보다 계속 새로운 영역 찾아서 실험중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