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꼬꼬무'에서 안두희를 뒤쫓았던 곽태영 등 '추적자'들이 백범 김구 암살 배경에 경무대가 있다는 것을 밝히는 듯 했지만 끝내 진실을 밝히지 못했다고 전했다.
20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에 관해 이야기했다.
육군 포병 소위였던 안두희는 사건 직후 현장에 출동한 헌병대에 체포됐지만, 그 후 이상한 일들이 연이어 벌어지기 시작했다. 사건 소식을 듣고 달려온 서울지검장이 헌병에 의해 출입을 저지당했고, 이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의심받던 포병사령관 장은산, 서북청년단 부단장 김성주 등이 기이한 죽음을 맞이했다.
사건 발생 2년 후 더욱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암살범 안두희가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날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추적자들이 나섰다. 가장 먼저 그를 찾은 사람은 독립운동가 후손 곽태영이었다. 그는 김구의 묘소를 찾아 10년 안에 시해범을 응징하고 배후를 밝히겠다고 다짐했다.
곽태영은 강원도 양구에서 군납 양말공장을 운영하던 안두희를 찾았다. 곽태영은 곧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에 연행됐고, 안두희는 긴급히 서울 성모병원으로 옮겨져 두 차례나 뇌수술을 받았다.
곽태영은 안두희를 두들겨 팬 상해죄로 1966년 7월 30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선고를 받은 뒤 풀려났다. 안두희는 이름도 신분도 숨기고 또 다시 잠적했다.
곽태영에 이어 수십 년 동안 무려 열 명 이상의 추적자가 바통을 넘겨받듯 안두희의 뒤를 쫓았다. 숨으면 찾아내고 도망가면 추적하며 그들이 안두희에게 요구한 것은 단 하나, 암살의 배후를 밝히라는 것이다. 마침내 입을 연 안두희는 경무대에서 이를 지시했다고 했다. 하지만 안두희는 바로 진술을 뒤집었고 끝내 배후를 밝히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1996년 안두희가 죽어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버스기사 박기서 씨가 정의봉을 들고 그를 찾아갔고 결국 안두희는 그의 정의봉에 맞아 숨졌다. 성당에서 고해성사 후 경찰에 출두한 박기서 씨는 "정의는 살아있다"라고 당당하게 외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