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엔터 이주희 기자]
역사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를 하는 과정 속에서 발전해 왔다. 약자가 강자에게 도전한 덕분에 현재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인종ㆍ계급ㆍ성별, 구체적으로 백인과 흑인, 주인과 노예, 남성과 여성이 그러한 길을 걷고 있다. 최근 방송되고 있는 JTBC 월화드라마 ‘미스함무라비(Miss Hammurabi)’, 그리고 영화 ‘허스토리(Her Story)’는 약자의 계란 던지기라는 점에서 같은 이야기다.
‘미스함무라비’는 박차오름(고아라 분), 임바른(김명수 분), 한세상(성동일 분)까지 서로 다른 세 명의 재판부가 펼치는 법정 드라마로, 직장 성희롱ㆍ만취 상태의 준강간ㆍ가정폭력 등 실제 사회에서 여성들이 겪는 일뿐만 아니라 법원 내 전관예우ㆍ청탁 문제ㆍ과도한 업무 지시 등 상급자의 잘못된 행동을 비판한다. 제목은 극중 기존의 판사들과 다른 박차오름을 향해 네티즌들이 붙인 별명으로, 박차오름은 이를 성차별적 호칭이라며 싫어한다. 작가인 문유석 판사는 “기존 사회에 도전하는 젊은 여성에 대한 시선조차 여전히 '미스'라는 틀에 갇혀 있는 아이러니를 그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극에서는 직장 내 인턴을 성희롱한 부장에 대한 내용이 한 에피소드로 등장한다. 성희롱 부장은 법원에서 유죄를 선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회사에 재입사했지만, 피해자와 증인이었던 인물은 구조조정을 핑계로 해고당한다. “뻔뻔한 가해자는 그렇게 감싸고돌더니 힘들게 용기 낸 피해자한테는 바로 보복이냐”며 분노하는 박차오름에게 회사 측은 오히려 “증인이 선정적인 옷차림으로 출근하고 근무 태도가 좋지 않았다”며 해고 이유를 통보한다.
4회에서는 오로지 성공만을 위해 달리는 성공충(차순배 분) 판사가 자신의 출세를 위해 임바른의 아이디어를 가로채 발표를 하고, 배석판사들에게 과도한 업무를 지시하는 일이 그려졌다. 결국 좌배석인 홍은지(차수연 분) 판사가 유산을 하고, 이에 박차오름은 판사들의 인권을 위해 성공충의 징계를 추진하려 한다. 이런 박차오름을 보며 부장 판사들은 “신임 판사라면 열정적인 모습이 있어야지”라고 하다가도 “도가 지나치다”며 비난한다. 8회에서 역시 박차오름이 감성우(전진기 분) 판사의 청탁사실을 알려 검찰조사를 받게 되자 법조인들은 박차오름에게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침소봉대 한다” “그게 그렇게 잘못이냐” “정의의 사도 나셨네”라고 비판한다.
이들처럼 우리 사회는 잘못된 것을 비판하는 사람을 불편해 한다. 바른 길을 만들어 가는 사람을 폭력적으로 막아서고, 설령 기존 질서가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그것이 전통인냥 없애면 안 될 것으로 본다. 도와주는 사람은 지치고, 반대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결국 앞으로 전진 하지 못한다.
영화 ‘허스토리’는 위안부ㆍ정신대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에게 최초로 그들의 범죄 사실을 인정받았던 관부재판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남성들의 사관인 '히스토리'가 아니라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로 직접 써내려간 역사 이야기 ‘허스토리’를 통해, 집단의 고통으로 환원될 수 없는 개별 여성들의 생생한 아픔을 다루고 싶었다”라는 민규동 감독이 설명한 제목의 의미가 인상적이다.
특히 ‘허스토리’가 특별한 이유는 위안부 피해자를 ‘순결한 처녀성을 훼손당했다’로 표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민규동 감독은 우리가 떠올리는 위안부 ‘소녀’ 이미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민규동 감독은 “민족주의적인 담론으로 보면 위안부는 ‘순결한 처녀가 강자의 폭압에 짓밟혔다’라는 워딩으로 민족의 공분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실제 위안부ㆍ정신대로는 10대 소녀뿐만 아니라 유부녀, 기생 등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끌려갔었다. 피해자가 착취를 당했다는 본질은 다르지 않지만 처녀가 더렵혀졌다는 것은 가부장제 남성적 사고방식으로, 이점이 가장 큰 상실인 것처럼 느끼게 한다. 오히려 그게 살아 돌아온 사람에게 수치심을 줬다. 처녀가 아니면 중년여성은 피해자가 아닌가. 순결이라는 전제를 앞세워야만 피해를 입은 것일까. 그건 핵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대중이 이런 것들을 알고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건 본인들의 비뚤어진 세계관을 들켜서 움찔하는 거다. 그 지점에서 제대로 된 시선을 가져야 한다”라며 영화에 다양한 형태의 피해자가 등장하는 이유를 밝혔다.
1992년, 위안부ㆍ정신대 피해자들이 처음으로 얼굴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반세기나 지난 일을 이제야 들추는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 ‘더럽다’ ‘돈 벌고 싶어서 떼쓰는 것 아니냐’ 등 대놓고 불쾌감을 표현한다. 전화를 걸어 욕을 한다. 이들을 도와주는 사람보다는 방해하는 사람이 더 많다. 이를 예상했듯이 피해자들은 증언하기 전 “세상 천지에 내가 여기(신고센터)에 왔는지 모르게 해줘야 합니더. 확실하지에?”라고 묻는다.
기시감이 드는 장면이다. ‘미스함무라비’의 상황은 물론, 최근의 미투 운동(#MeToo)과 많이 닮아 있다. ‘허스토리’에서 위안부 피해자를 연기한 문숙은 “한 번 강간을 당한 사람도 자신이 당했다고 털어놓기 어렵다. 요즘 일어나고 있는 미투 운동이 있는데, 우리가 연기한 분들이 오리지널 미투 운동을 한 분들”이라며 “이 할머니들이 앞으로 나왔다는 것에 찬사를 보낸다. 일본사람이 이들에게 욕하는 것을 제외하더라도 주위 사람의 욕까지 먹어야 하는 건 정말 가슴 떨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대한민국 여성을 대표해서 큰소리로 외쳐줬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우리는 잊지 않겠다. 계속해서 소리를 내고 계속해서 열심히 살겠다”라고 이야기 한 바 있다.
페미니즘 논란도 마찬가지다. 최근 여러 ‘걸’그룹들이 페미니스트 ‘의혹’을 받으며 ‘낙인’ 찍혔다. 사람들이 극단적인 의견을 수용하고 반발했고, ‘페미니즘은 나쁘다’라는 프레임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페미니즘이란 성 차별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시각 때문에 여성이 억압받는 현실에 저항하는 여성해방 이데올로기를 말하는 것으로, ‘미스함무라비’의 박차오름, ‘허스토리’의 문정숙과 위안부 할머니들이 대표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을 자신의 손으로 잘못된 일을 풀어나가고 싶어 하는 ‘휴머니즘’을 가진 인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여전히 ‘페미니즘=남혐’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에게 ‘허스토리’는 그녀들만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 우리들의 이야기임을 일깨운다. 여성영화나 위안부 소재의 영화를 보며 “‘이런’ 소재는 안 본다. 요즘 사회 흐름에 편승한 영화”라고 조롱하는 네티즌들이 있는 가운데, 민규동 감독에게 이런 시선을 가진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지에 대해 물었다.
민규동 감독은 "성장통의 시기인 것 같다. 과거 페미니즘이란 단어를 쓰면 그 단어가 뭔지 몰라서 ‘욕했지?’라고 묻는 경우도 있었다. ‘F’로 시작하는 모르는 단어라 욕이라고 본능적으로 생각한 거다. 사실 여자들이 인간으로 취급하기 받은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인류 역사상 급변하는 근현대사 안에 정상적으로 올라오고 있는데, 기존 기득권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 사실이 너무 두려운 거다. 이 논쟁이 무섭기도 하지만 소모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치고받는 성장이 필요한 것 같다. 나중에는 모두 알게 될 것“이라며 ”다만 페미니즘 이론이 오기 전에 이미 세상엔 페미니스트가 존재했다. 이것은 ‘허스토리’를 보면서 남자든 여자든 문정숙이란 사람을 응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에서 나타날 것이다. 그렇게 이해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 언어의 정치학 속에서 본질이 흐려지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민규동 감독은 영화를 하는 이유를 밝혔다. “내가 영화를 만드는 건 나를 바꿔주기 때문이다. 지금 살고 잇는 이 시대를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지 않다. 불행하게 만드는 관습과 폭력의 장애물들 앞에서 힘겹게 허들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응원하고 싶은 생각이 늘 있다. 그래서 소수자나 약자들, 묻혀버린 사람들에게 더 관심이 많이 있다. 상대적으로 여성들이 역사 속 기록될 자리를 갖지 못했었고, 그래서 인지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