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엔터 정시우 기자]
1994년 ‘젊은 남자’로 스크린에 데뷔한 이정재는, 이듬해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고현정을 지켜주는 보디가드 백재희로 분해 데일 듯 뜨거운 인기를 얻었다. 사랑하는 여인을 한 발짝 뒤에서 묵묵히 지켜내는 남자, 그 여자가 사랑하는 연인까지도 기꺼이 감내해내는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긴 남녀가 한 둘이 아니다. 하지만 전국민적으로 사랑받는 캐릭터를 만났다는 것은, 해당 배우 입장에서는 자신을 옭아매는 거대한 이미지와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정재는 꽤 오랜 시간 백재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새로운 장르에 도전했고, 캐릭터 바꾸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런 이정재에게 ‘관상’과 ‘신세계’가 있었던 2013년은 기념비적인 해였을 것이다. 단순히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다. 두 작품에서 이정재는 전면에서 한 발 물러나 있다. 비중보다 캐릭터를 살피고, 부분보다 전체를 본다는 인상이 강했다. 덕분에 비중은 작아졌지만, 극중 장악력은 오히려 강렬해졌다. 이정재는 여전히 날마다 새로워지길 희망한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그런 이정재의 도전의 일환일 것이다.
Q. ‘인천상륙작전’ 원래 제목이 ‘작전명 엑스레이’였다고 들었다. 그러고 보니, 영화 내용상 톰 크루즈 주연의 ‘작전명 발키리’가 떠오르기도 한다.
이정재: 영화가 처음 공개됐을 때, 제목을 그냥 ‘작전명 엑스레이’로 갔어야 했나 싶었다. 맥아더의 업적을 이야기하는 영화가 아닌데, 리암 니슨이라는 엄청난 캐스팅이 붙다보니까 사람들이 이 영화에 대해 오해를 한 것 같더라. 초반 홍보에서 조금 꼬인 게 아닌가 싶다. 인터뷰 하면서, ‘인천상륙작전’은 첩보영화라고 열심히 강조하는 중이다.
Q. 시나리오 수정 과정에서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했다고.
이정재: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역사적인 사건을 다룬 작품인 만큼, 너무 영화적으로 포장되는 것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지금 나온 완성본은 초고 시나리오와 차이가 크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이 감정적으로 애국에 호소하는 영화가 아니길 바랐다. 영화적 재미를 위해 역사를 잘못 건드리면, 그 의미가 퇴색되기 쉬우니까. 욕도 먹을 수 있고. 그래서 여러 차례 시나리오 수정을 요구하면서 수위를 조절해 나갔다.
Q. ‘인천상륙작전’ 장학수(이정재)는 ‘암살’의 친일파 염석진(이정재)과 대척점에 있는 캐릭터다. 무엇이 그들의 운명을 가른 것 같나.
이정재: 믿음과 신념인 것 같다. 염석진도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이다. 그러다가 일본군에게 잡혀 고문을 당하면서 흔들린다. ‘과연 조선이 해방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결국 신념마저도 버리게 되는데, 어떻게 보면 굉장히 약한 사람이다. 그런데 당시 조선인의 대다수는 약하지 않았을까 싶다. 일부의 사람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독립운동을 하신 건데, 염석진이라는 인물은 내면이 약하니까 변절을 한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문에서 염석진이라는 인물에 다가갔다. 장학수는 반대다. 젊은 시절 장학수에게 공산주의라는 사상은 달콤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계급을 버리고 모두가 평등하게 살아보자,는 게 얼마나 달콤했겠나. 그렇게 공산주의에 매료돼서 공부를 하다가, 어느 순간 이게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이념을 바꾼다. 아마 장학수의 진짜 신념은 거기에서부터 생긴 게 아닌가 싶다.
Q. 두 인물 모두 ‘어떤 사건’을 계기로 신념이 바뀐 경우다. 배우 이정재는 어떤가. 기존의 연기관과 지금의 연기관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은데, 거기에도 어떤 계기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이정재: 의도해서 바뀐 것 보다는, 나이를 먹다보니….(일동웃음) 그리고 내가 어렸을 때에는 염석진-장학수 같은 역할이 들어오지 않았다. 어릴 때는 쉽게 맡을 수 있는 캐릭터들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런 인물은, 인생을 좀 경험해 본 배우가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 테니까.
Q. 하긴 당신은 또 ‘젊은 남자’의 표상이었으니.(일동웃음)
이정재: 하하하. 이제 나이를 먹다보니, 그런 캐릭터들이 하나 둘 들어오는 것 같다. 데뷔 초반엔 하이틴 배우의 행보를 걸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부터 도시적인 남자 역할이 많이 들어왔다. 지금은 다양한 캐릭터를 만나는 중이고. 많은 배우들이 그렇겠지만 나 역시 전작과는 반대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은 욕심이 있다. ‘도둑들’에서 발랄함을 연기했다면, ‘신세계’에서는 굉장히 미니멀한 연기를 보여줬다. ‘관상’에서 표출하는 스타일로 갔고, 이후 ‘빅매치’에서 발랄함을 입었다가, ‘암살’에서 악당을 선보인 후, 한중합작영화 ‘역전의 날’에서는 무거움을 벗고 편한 톤의 연기했다. ‘인천상륙작전’에서는 신념 있는 인간을 맡았고. 새로운 톤을 찾는 과정이 힘들긴 하지만, 변신을 하는 게 재미있다.
Q. 사실 당신은 이미지 변신에 대한 고민을 꾸준히 해 온 배우다. ‘모래시계’로 인기를 얻은 후, ‘정사’ ‘태양은 없다’ ‘이재수의 난’ ‘기방난동사건’ ‘순애보’ 등 다양한 장르에 도전했다. 연기 스펙트럼을 넓히려는 행보가 인상적이었다.
이정재: 그게 내 DNA인 것 같다. 다른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은 욕심이 크다. 다른 장르에 대한 궁금증도 있고.
Q. 스스로가 도전정신이 강하다고 생각하나.
이정재: 없지 않다. ‘망할지언정, 해 보고 망하자’는 주의다.
Q. ‘관상’과 ‘신세계’가 있었던 2013년은 당신에게 중요한 전환점이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흥행에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다. 두 작품에서 당신은 전면에서 한 발 물러나 있다. 비중보다 캐릭터를 살피고, 부분보다 전체를 본다는 인상이 강했다. 비중은 작아졌지만, 영화가 끝난 후 남는 여운은 오히려 짙었다.
이정재: 자꾸 나이 얘기를 해서 그런데, (주연과 조연을)왔다 갔다 해야 하는 나이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그 무렵에 했다. 조금 이른 감이 있다는 생각도 했지만 ‘에이, 어차피 올 거 빨리 가자’ 하는 심정이 있었다. 당시 그런 마음이 왜 더 들었냐면, ‘관상’ 시나리오를 보는데 3분의 1일이 넘어가도 내 캐릭터가 안 나오는 거다. ‘내가 시나리오를 잘 못 받았나?’라는 생각까지 했다.(웃음) ‘이렇게까지 늦게 등장하면 완벽한 조연인데…’라는 의문을 가지고 시나리오를 쭉 읽어 내려갔는데, 출연 분량과 상관없이 캐릭터가 너무 매력적이었다.
Q. 결과적으로 ‘신의 한 수’가 된 선택이었다.(웃음)
이정재: 맞다. 흥행이 잘 됐고, 캐릭터적으로도 좋은 평가를 많이 받았다. ‘조연도 나쁜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강하게 했다. 이제 그럴 나이다.(웃음)
Q. 당신 행보의 또 하나의 특징은 멀티캐스팅 영화다. ‘신세계’ ‘도둑들’ 그리고 지금 촬영 중인 ‘신과 함께’ 모두 멀티 캐스팅 영화들인데.
이정재: 좋다. 일단 흥행 부담이 적어서 좋다.(웃음) 그리고 멀티캐스팅 자체가 미들급 이상이 되는 배우들이 나오다 보니, 호흡이 잘 맞는다. 모두 프로들이지 않나. 전체 그림에서 본인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다. 누구는 저음, 누구는 중음, 누구는 고음…각자의 음을 딱 내 주니까, 화음이 좋을 수밖에 없다.
Q. 헤어스타일이 좀 달라진 것 같은데, ‘신과 함께’ 때문인가.
이정재: 이건 영화 ‘대립군’을 위한 헤어스타일이다. 극중 역할에 맡게 기르는 중이다. ‘신과 함께’에서는 완전 분장이다. 내가 연기할 염라대왕에 아마 놀랄 거다. 김용화 감독이 무시무시하고 근엄한 염라대왕을 만들었다가, 지금은 아주 코믹적인 요소를 넣었다. 즐겁게 촬영 중이다.
Q. 최근 배우 정우성과 ‘아티스트컴퍼니’라는 회사를 차렸다. 후배 양성이 목적이라고 들었는데, 어떤 후배들을 찾고 있나.
이정재: 재능이 뛰어난 배우보다 근성과 성격이 좋은 배우를 찾고 있다. 연기자 생활은 본인이 일에 대한 애착도만 높으면 오래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려면 성격이 좋아야 한다. 배우는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상대배우와 호흡도 맞춰야 하고, 스태프들과 자그마한 약속도 해야 한다. 그런 약속들을 잘 지키려면, 기본적으로 성품이 좋아야 한다고 믿는다.
Q. 상대의 성품을 어떻게 알아보나. 당신 앞에서 후배들은 모두 좋은 사람인 것처럼 행동 할텐데.(웃음)
이정재: 그래서 두 개의 눈(정우성-이정재)으로 찾아보려고 하는 거다. 나 혼자 알아보기 힘드니까.(웃음)
Q. 정우성과 비슷한 시기에 데뷔했다. 그리고 정반대의 이미지로 각각의 분야에서 인기를 끈 경우다.
이정재: 맞다. 내가 모던 쪽이라면, 정우성 씨는 반항 쪽이었다.(웃음)
Q. 갑자기 궁금해진다. ‘이정재 분위기’와 ‘정우성 분위기’의 후배가 있다면, 어디에 끌리나.
이정재: 아무래도 내가 지니지 못한 반향적인 기질에 끌린다. 우리 정(우성) 대표님은 어떠실지 모르겠지만. 아, 회사에서의 내 직함은 이사다. 정우성 씨가 사장님. 월급 안 주는 사장님이지. 정우성 씨가 후배를 돕기 위해 차린 제작사 ‘더블유팩토리’와 ‘아티스트컴퍼니’는 별개의 회사다.
Q. 감독 정우성과 배우 정우성과 사장 정우성과 제작자 정우성은 다른가?
이정재: 내가 ‘더블유팩토리’ 영화를 안 해 봐서, 제작자 정우성을 아주 잘 알지는 못한다. 다만 ‘나를 잊지 말아요’(더블유팩터리 작품) 촬영장을 한 번 가보긴 했다. 가서 보니까 정우성 씨는 스태프들을 알뜰살뜰 챙기는 제작자더라. 신인감독인데도 불구하고 감독의 의견을 굉장히 존중해주려는 자세가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괜히 감독이 부담을 느낄까봐 말 한 마디를 해도 순화해서 하고, 돌려서 하고, 남 통해서 전달하고.(일동 웃음) 나라면 감독에게 직접적으로 이야기 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하긴 나도 조심하긴 할 것 같다. 선배 감독이라면 편하게 말할 텐데, 후배들은 오히려 조심하게 된다. (장난스럽게)안 놀아줄까봐.
Q. 많은 후배들이 당신을 롤모델로 생각한다. 후배들에게 조언은 해 주나.
이정재: 최승현-이민호 씨와 가깝게 지낸다. 그 친구들이 나보다 월등히 잘 하니까 일적으로 조언해 줄 건 별로 없다. 다만 인생을 조금 더 산 선배로서 감성적인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곤 한다. “그런 거에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라” 아저씨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거다. 그런데 사실, 조언을 해도 어린 나이에는 잘 모를 거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Q. 나이가 들어야 아는 것들이 있지.
이정재: 맞다.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리면, 그런 아쉬움이 있다. 그때 나를 알았던 형들이, 안 먹히는 이야기임에도 내게 조언이나 충고를 해 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 너무 이른 나이에 데뷔를 했고, 이른 나이에 많은 사랑을 받았고, 또 그래서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는 시간들이 있었다. 그때 ‘길잡이가 돼 준 선배 한 명쯤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든다. 그런 생각이 있다 보니, 내 이야기가 그 친구들 귀에 안 들어갈 걸 알면서도 조언을 하곤 한다.
Q. 과거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20대에는 나를 만드는 작업에 열중할 거고, 30대에는 배우로서 잘 익어가고 싶다”고. 그러면서 “잘 관리한 40대 남자가 제일 멋있어 보인다”는 말을 했다. 어떤가. 잘 관리한 40대를 보내고 있는 것 같은데.
이정재: 40대까지는 좋은 것 같다.(웃음) 체력만 떨어지지 않는다면 50대도 멋있을 것 같긴 하다. 안성기 선배를 봐라. 얼마 전에 영화 ‘사냥’을 보면서 “와~” 감탄했다. 영화에서 안성기 선배님이 너무 멋지더라. 사실, 안성기 선배님은 오래 전부터 내 롤모델이었다. ‘젊은 남자’ 찍을 때도 “어떤 배우 가 되고 싶으냐”는 질문을 받으면 안성기 선배를 이야기 하곤 했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연기도 연기지만, 선배의 성품을 닮고 싶다. 후배들에게 귀감이 돼 주는 선배가 있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