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엔터 정시우 기자]
블랙리스트(Blacklist).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경계를 요하는 사람들의 목록’이다. 그렇다면 ‘경계를 요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흔히들 ‘위험한 사람’ ‘문제가 있는 사람’ ‘불순분자’라고 여겨졌다. 적어도 ‘문화계 블랙리스트’ 논란이 대한민국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기 전까지는 그렇다고 생각되어졌다.
최근 촛불집회 무대에 선 이승환을 이렇게 말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에도 오르지 못한, 그래서 마냥 창피한, 그래서 요즘 더욱 분발하고 있는 가수입니다”. 극단 그린피그 윤한솔 대표는 “박근혜 정부에서 줄 수 있는 최고 훈장”이라는 말로 블랙리스트를 정의했다.
안도현 시인은 “내 이름이 없으면 어떡하나, 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블랙리스트 명단을 살펴보았다. 참 다행이다”라고 했고, 변정주 연극연출가는 “누락된 이들이 지금이라도 넣어줄 수 없냐고 무척 아쉬워했다”는 말로 현 상황을 대변했다.
그렇다. 블랙리스트는, 우리 시대에 재정의 돼야 할지도 모를 단어다.
흥미롭게도 할리우드에도 블랙리스트가 지닌 명제가 흔들린 역사가 있다. 지난해 개봉했던 영화 ‘트럼보’는 블랙리스트를 정면에 다뤄 아카데미 시상식에 노미네이트 된 작품이다.
‘트럼보’는 공산주의자로 낙인 찍혀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는 처지에 놓이자 가명으로 작품 활동을 이어간 할리우드의 전설적인 작가 달튼 트럼보의 이야기를 그린다. 그 유명한 오드리 헵번 주연의 ‘로마의 휴일’(1953),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스파르타쿠스’(1960) 스티브 맥퀸의 ‘빠삐용’(1973)을 쓴 작가가 바로 이 트럼보다.
그러나 트롬보는 ‘로마의 휴일’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수상할 때, TV를 통해 자신이 이름을 빌려준 이안 멕켈란 헌터가 대신 수상하는 모습을 숨죽여 봐야 했고, 죽고 난 17년 후에야 상을 되찾아 올 수 있었다.
트럼보의 슬픈 사연 뒤에는 “나는 공산주의가 싫어요”를 외쳤던 ‘매카시즘’ 광풍이 있다. 2차 세계대전 종식 후 미국은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반미활동 조사위원회(HUAC)’가 민주적 가치를 오염시키는 공산주의자를 색출하겠다고 나선 것도 바로 이때다.
시대의 검은 그림자는 할리우드도 피해가지 않았다. 반공주의자들의 표적이 된 배우·작가·제작자들이 청문회에 소환됐다. 여기에는 로버트 테일러-게리 쿠퍼 등 유명한 배우들과 워너브러더스의 사장 잭 워너, MGM의 사장 루이스 B 메이어, 이후 대통령이 되는 로널드 레이건까지 많은 문화예술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중 한 명이었던 트럼보는 의회 모독죄로 감옥에 수감됐는데, 1년간의 복역 후 출소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현대판 마녀사냥이었다. 그러니까, 사상검증. 노선이 다르다는 이유로 국가는 트럼보의 작품 활동을 금지했다. 밥줄이 끊긴 트럼보의 선택은 결국 익명 뒤에 숨어 글을 쓰는 것이었다. 트럼보에게 필명은 그러니까, ‘먹고사니즘’을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고 ‘표현의 자유’ 탄압에 대한 나름의 항변이었던 셈이다.
1950년대 미국 정부가 영화인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였던 흑역사, 일명 할리우드 블랙리스트는 일화는 정치적 신념을 이유로 각종 검열이 자행되는 오늘날의 한국사회와 너무나 닮아 있다. 현대판 ‘매카시 광풍(狂風)’이라 할 만한 ‘문화계 블랙리스트’ 논란. 박근혜 정부를 통과하며, 트럼보가 그랬듯 많은 문화예술인들은 ‘먹고사니즘의 문제’와도 싸워야 했다.
노무현 시민 학교에서 강좌를 했다는 이유로, 정부 입맛에 맞지 않은 영화/연극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배우자가 진보 신문에 논설을 기고했다는 이유로, 시국선언을 했다는 이유로, 제주 해군 기지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얼토당토 않은 무수히 많은 이유로 많은 문화인들이 정부 지원에서 배재되거나, 직장에서 해고당하거나, 채용에서 불이익을 봤다. 이 무슨 시대를 역행하는 코미디일까.
오늘날 할리우드에는 또 하나의 ‘블랙 리스트’(Black list)가 있다. ‘블랙 리스트’가 ‘아직 영화화되지 않은 시나리오들 중 할리우드 제작자들 사이에서 호평을 받은 작품을 지칭’하는 중의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매 해 숨겨져 있는 훌륭한 시나리오들을 발굴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이 리스트를 거쳐 간 이름도 엄청나다. ‘슬럼독 밀리어네어’ ‘킹스 스피치’ ‘소셜 네트워크’ ‘주노’, 그리고 박찬욱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던 ‘스토커’ 역시 ‘블랙 리스트’라는 이름으로 할리우드에서 주목을 받은바 있다.
그러니까, 언제고 한국에서도 ‘블랙리스트’라는 단어는 다각도에서 쓰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의미 재정의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이들은, 아마도, 블랙리스트의 몸통으로 지목되는 김기춘 조윤선일 것이다. 이 방면에 소질이 있다는 걸 진즉에 파악했다면, 정치가가 아닌 문학도가 되셨을까들.
트럼보가 쓰고, 커크 더글라스가 주연을 맡은 1960년대 작 ‘스파르타쿠스’에서 노예들은 자신의 친구를 보호하기 위해 한 사람씩 일어서며 “내가 스파르타쿠스다!”를 외친다. 노예가 아닌, 인간으로 택한 죽음. 트럼보는 이 대사를 쓰며 어떤 심정이었을까.
더불어 지금 이 땅에서 “나는 블랙리스트다”라고 외치는 문화 예술인들은 지금 어떤 심정일까. 이 나라 표현의 자유는 어디로 가고 있으며 그 어디쯤에 잠들어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