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엔터 정시우 기자]
“목이 마를 때 물을 생각하듯이, 자연스럽게 다가올 그 때를 기다려. 충실히, 성실히, 절실히. 길게.”배우 박원상이 10년 전 박정민에게 해줬다는 이 말은, 아마도 박정민의 혈관에 녹아들어 배우의 삶을 추동하는 이유가 된 듯하다. 지난 해 개봉한 ‘동주’를 통해 박정민을 ‘만년 유망주’ 타이틀에서 해방돼 날개를 달았다. 여러 시상식에서 신인상을 거머쥐었고, 밀려드는 여러 시나리오도 잡았다. 그러나 배우 박정민의 본질은 변함이 없다. 여전히 연기 앞에서 불안하고 고민이 많다는 박정민은 ‘충실히, 성실히, 절실히, 길게’ 흐르는 중이다. ‘동주’에서 과정이 아름다운 송몽규를 연기했던 박정민의 과정 역시 아름답다.
‘아티스트: 다시 태어나다’는 그런 박정민이 ‘동주’ 이후 들고 나온 영화다. 진짜와 가짜의 경계에 있는 예술의 허위의식을 블랙코디미를 빌어 풍자한 영화에서 박정민은, 전도유망한 화가 지젤(류현경)이 요절하자 이를 이용해 부와 명예를 얻으려는 갤러리 대표 재범을 연기했다. 영화는 예술을 꿈꿨으나 상품이 돼 버린 화가를 내세웠지만, 사실 이는 배우에게도 해당되는 일이다. 배우란, 쇼비즈니스 세계에서 자신의 가치를 파는 직업이기도 하니 말이다. 영화가 품은 여러 논쟁들. 사색을 즐기는 박정민과의 대화 주제로 이보다 좋을 게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역시나 박정민은 흥미로운 답변으로 대화를 매만졌다. 박정민이라는 아티스트의 행보를 늘 주목하는 이유다.
Q. ‘아티스트: 다시 태어나다’의 지젤은 예술을 꿈꿨지만, 상품화가 된 경우죠. 배우도 누군가에겐 상품일 수 있습니다.
박정민: 맞아요. 하나의 브랜드죠. 배우 각자의 이름이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게 배우의 의무라고 생각해요. 배우는 대중 앞에 서서 소통해야 하는 사람들이니, 이미지나 브랜드가 어느 정도는 필요하지 않나 싶어요. 그 모습을 끊임없이 변화시켜 나가는 게 또 하나의 의무일 테고요.
Q. 대중들은 배우 박정민에게 어떤 이미지를 품고 있을까요. 당신 스스로가 만들고 싶은 브랜드는 있나요?
박정민: 참 어려운 문제네요. 수학방정식 같이. 모르겠어요. 일단 사람들이 저에게 기대하는 게 무엇인지 잘 모르겠어요. 저 역시 제가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게 좋은지 모르겠고요. 그런데 그건 자연스럽게 붙는 것 같아요. 배우 스스로가 ‘이런 이미지를 만들겠어’라고 하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생기는 경우가 많다고 봐요.
Q 결국 배우는 ‘진짜 본모습’보다, 대중이 ‘보고 싶어 하는 이미지’로 받아들여진다는 의미이기도 한데요.
박정민: 네. 그렇다고 배우가 일부러 ‘나는 원래 노는 사람이에요’ 고백하면서, 스스로의 이미지를 깰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해요. 왜냐하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직업인의 입장에서, 그들이 봐 주시는 게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니까요. 자연인으로서는 다른 모습이겠지만요.
Q, 대중이 바라보는 나와 실제의 나 사이에 괴리가 있으면, 일상생활을 하는데 규제가 생기지 않을까요?
박정민: 불편함은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건 일정부분 감수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배우로서의 본질을 만들어나가는 게 필요하고요
Q. 내 본질은 그게 아닌데 사람들이 내 본질과는 다른 모습의 나를 좋아해주면, 그건 행복일까요?
박정민: 겪어보지 않아서 감히 말씀드리기 조심스러운데요…결국 그게 ‘아티스트: 다시 태어나다’가 던지는 메시지겠죠.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잖아요? 선택은 결국 본인의 몫이죠. 선택에 대한 책임도 본인의 몫이고요. 살다보면 내 소신과 충돌하는 현실적인 상황을 만납니다. 거기에서 어느 정도의 타협을 할 것인가를 우리는 늘 선택하며 살죠. 이번 영화는 미술계 사람들을 다루고 있지만 그건 배우는 물론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입니다.
Q. 배우 박정민은 선택의 기로에서 어땠던 것 같나요. 연기에 있어 타협을 잘 안 하는 스타일인가요?
박정민: 개인적으로는 타협을 잘 안하는 것 같기는 한데요…음, 저는 그래요. 힘들거나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 오면, 제가 좋아했던 선배들이 갔던 길을 돌아봅니다. 그 분들이 제 나이였을 때 어떤 작품을 했는지, 어떤 시행착오를 겪으셨는지 찾아보죠. 조금 아날로그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큰 도움을 받아요. 제가 이 길을 선택한 이유들을 다시금 발견하니까요.
Q. 올해 서른하나죠? 20대 때 박정민은 배우로서 어떤 걸 이뤘다고 생각하나요?
박정민: 20대에는 이룬 게 없습니다. 없기에 20대 때 이루고 싶었던 걸 30대에 이루는 게 꿈입니다. 그런데 결국 못 이루고 40대에 또 이루고 싶어 하겠죠.
Q. ‘동주’가 30대에 나온 첫 영화죠?
박정민: 네. 스물아홉에 찍어서, 서른에 개봉했죠.
Q. 그렇다면 30대의 시작이 나쁘지 않았던 것 같은데요. 영화적으로 호평을 받았고, 개인으로도 상과 사랑을 받았잖아요.
박정민: 저는 잘 모르겠는데 주변 분들이 저를 많이 뿌듯해 해 주세요. 그건 기분이 좋긴 합니다.
Q. 본인은 왜 모를까요.
박정민: ‘동주’를 만난 건 너무 행운입니다. 작품에 대한 만족감도 크죠. 덕분에 상도 받고 일도 이전보다 많아졌어요. 저를 위해 고생한 많은 분들에게 뭔가 보상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아주 좋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제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더라고요. 전, 항상 불안하거든요. 여전히 연기가 고민이고, 그로인해 불안하고, 스트레스도 받아요.
Q. 이런 고민을 나누는 친구들이 있나요?
박정민: 가족들이나 회사 식구들에게는 힘든 이야기를 잘 안 해요. 속상해 하실 테니까. 그나마 하는 사람이 이번에 함께 작업한 (류)현경 누나, ‘오피스’의 배성우 형, ‘파수꾼’을 함께 한 윤성현 감독님과 (이)제훈 씨입니다.
Q. 언급 하신 분들은 뭔가 닮은 듯한 인상을 주는 배우ㆍ감독이네요.(웃음)
박정민: 하하. 네. 그런 것 같아요. 다들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으니까요. 사실 ‘일이 안 풀려서 힘들었어요’라고 말씀드리기 죄송스러운 게 있어요. 저보다 더 많은 시간을 여기에 투자하신 분들이 계시고, 지금도 꿈을 위해 노력하시는 분들이 너무 많잖아요? 그분들 앞에서 쑥스럽죠. 성우 형 앞에서는 특히 더 그래요.
Q. 연기에 있어 만족이 있을까요?
박정민: 없겠죠. 죽을 때까지 없겠죠. 결국 거기에 가까워지려고 노력을 하는 게 배우의 삶이겠죠.
Q. ‘아티스트: 다시 태어나다’를 보면서 예술을 향한 해석에 대한 여러 생각을 했습니다. 열린 해석이 활발한 분야가 바로 예술이죠. 배우 입장에서는 어떻습니까. 출연한 영화 관련 평을 보면서 과도한 의미 분석이라고 느낀 적도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박정민: 일단, 좋은 평을 보면 기분이 좋습니다. 안 좋은 평 앞에서는 시무룩해지고요.(웃음) 그리고 말씀처럼 가끔 제가 의도한 게 아닌데, 의도를 넘어선 평가를 보기도 합니다. 그 평가가 좋을 땐 고민을 하죠. ‘저 말을 취할까 말까’.(웃음) 그러곤 취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제 의도가 아니기에, 저 말을 가져다 쓰면 도둑질이니까요.
Q. 연기라는 예술에 대해서는 어떻게 느끼시나요.
박정민: 어쩔 수 없이 연기는 거짓입니다. 그럼에도 그 거짓을 진실 되게 표현해야 하는 게 배우죠. 진실에 가깝게 가려고 부단히 노력을 해야 하기에 스트레스도 받아요. 이번 작품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이 주제를 놓고 이야기 했어요. ‘어떻게 해야 진짜처럼 보일까!’ 아이러니죠. 거짓을 진실처럼 연기한다는 게 말입니다.
Q. 박정민이 생각하는 예술은 뭔가요.
박정민: 생활 저변에 깔려 있는 게 모두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각자가 모르는 영역이 너무 많잖아요? 그거에 대해서 왈가왈부 할 필요가 없다고 봐요. 그 모습이 아름다우면 그 자체로 예술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술, 예술’ 하니까 살짝 쑥스럽네요.(웃음) 제가 예술을 부르짖는 걸, 오그라들어 해서…
Q. 지젤의 경우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유작 프리미엄이 붙어요.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제임스 딘도 일찍 생을 마감하면서 불멸로 남은 경향이 있습니다.
박정민: 제임스 딘도 그렇고, 히스 레저나 장국영도 그렇고,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 분들이 지금까지 살아있다고 해서 위대한 배우가 아닐까. 그건 아닐 것 같아요. 정말 위대한 배우가 죽어서 안타까운 거지, 죽었으니까 위대한 배우인 건 아니라고 보거든요. 그 분들이 증명해 낸 게 있으니까요. 증명한 게 없었다면, 죽음 후 오래 기억되지 못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사실 제가 그 분들을 정말 좋아해요. 그래서 비호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Q. 작년에 산문집 ‘쓸 만한 인간’을 발간했습니다. 글 쓰는 행위는 어떤가요.
박정민: 글을 쓰는 행위는 계속 할 것 같아요. 그걸 보여드리느냐 마느냐의 문제인데, 지금은 조금 감추고 싶다는 생각이 강합니다. 보여주지 않는 글은, 말 그대로 제 스트레스 해소용이에요. 그건 죽을 때까지 안 보여 드릴 생각입니다. 반면 보여드리는 글은 제가 읽고 싶은 글이에요. 그런데 글에는 아무래도 제 감정 상태가 드러나요. 그걸 대중 분들과 공유한다는 게 일견 실례일 수 있다는 생각을 최근에 부쩍 해요.
Q. 기형도 시인의 경우 사후, 가까운 지인들에 의해 유고 시집이 나왔습니다. 기형도 시인이 내밀하게 가지고 있었던 메모들까지도, 타인들의 판단에 의해 책으로 발간됐죠. 만약 당신의 비밀 글이 누군가에 의해 그런 식으로 발간된다면 어떨 것 같나요.
박정민: 아, 저는 그건 안 될 것 같아요. 비밀 번호를 3중으로 걸어둬야겠군요.(웃음) 왜냐하면 그건 저만의 문제가 아니거든요. 그 글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을 해칠 수 있을 테니 말이에요. 말씀드렸듯이, 공개하지 않은 글은 저의 해소를 위함이기 때문에 누구도 침범하지 않아주셨으면 해요. 그나저나 제가 오늘 너무 이상한 말을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살짝 걱정이 되네요.(웃음) 잘 정리해 주세요.
Q, 하하하. 굉장히 바빠진다고 들었어요.
박정민: 이병헌 선배와 ‘그것만이 내 세상’을 해요. 연상호 감독님이 연출하는 ‘염력’도 예정돼 있고요. 그리고 ‘파수꾼’의 윤성현 감독님과 ‘사냥의 시간’에서 다시 만납니다. 운 좋게 좋은 작품들을 만났어요. 그런데 몇 편을 하느냐보다 중요한 건, 얼마나 잘 하느냐입니다. 그 생각으로 달릴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