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엔터 김예슬 기자]
‘메리 대구 공방전’(2007)은 방영 당시 화제작도 아니었고, 시청률 또한 저조했다. 하지만, 안방극장에 묘하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황메리 역으로 출연한 배우 이하나는 이 작품을 통해 독보적인 캐릭터를 구축했다.그래서일까. 기자는 이하나가 왠지 모르게 밝고 경쾌하며 흥이 많을 것 같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하나는 달랐다. 그만이 가진 조용한 울림과 고유한 세계가 있었다. 생각보다도 더 차분했다. 기자가 주문한 음료가 잘못 나오자 선뜻 “그럼 제가 그거 마실게요”라며 선심을 베풀기도 했다. 오해는 말길, 기자는 그냥 주는 대로 마셨다. 이하나의 마음씨에 생각지도 못한 감명을 받으며.
그래서였다. 이하나와의 인터뷰는 ‘예상외(外)’라는 표현으로 설명됐다. 시종일관 ‘보이스’를 떠나보내기 아쉽다고 말한 이하나는 언론매체와의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 인터뷰에서도 ‘보이스’에 대한 추억을 반추하며 그리움을 숨기지 않았다. “저 강권주입니다. 딱 들으면 알아요”라며 너스레를 떨던 이하나는 매 질문에 고민하고 또 고뇌하며, 열과 성을 다해 답했다. 그렇게, 의외의 모습이 매력적이었던 이하나를 만났다.
Q. 끝난지도 어느새 꽤 시간이 지났네요. ‘보이스’, 어땠나요.
이하나: 이제 끝나는 게 갑자기 실감나려 해요. 이제 혼자 즐기는 시간이 올 것 같아요. 빨리 ‘보이스’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일부러 인터뷰 일정도 빠르게 옮겼어요.
Q. 원래 작품을 끝내면 그 여운이 오래 가는 편인가요?
이하나: 잔상이 캐릭터만 생각나는 그런 것보다 그 주변 사람들로 남아요. 전 원래 주변에서 힘들게 하거나 촬영장을 갈 때 마음이 불편하거나 하면 악몽도 꾸거든요. 촬영에 늦는 꿈, 촬영장에 잘못 간 꿈… 그런데 이번 현장에서는 악몽을 안 꿨어요. 대사 때문에 초반엔 좀 어려운 부분도 있었는데, 사람들의 정이 제게 좋은 잔상으로 남았어요. 원래 제가 잘 지치는 편이고, 아니다 싶으면 포기도 빠르거든요. 그런데 ‘보이스’는 어떤 힘인 건지, 끝까지 절 지치지 않게 했어요.
Q. 사실 장르물은 ‘모 아니면 도’라는 분위기죠. 선택한 이유는 뭐였어요?
이하나: 잘 될 거라는 감이 왔어요. 구성 자체가 좋아해주실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거든요.
Q. 어떤 면에서?
이하나: 112 신고센터라는 설정이 흥미로웠어요. 거기서 사연을 가진 두 주인공이 대립관계로 처음 만나잖아요. 벽을 허물고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궁금했어요. 작가님이 워낙 무궁무진한 에피소드를 생각하셨는데, 그 중에서도 좋은 에피소드를 쓰신 것 같아요. 결말도 작가님께서 최선을 위해 계속 고민하고 수정한 걸로 알고 있어요. 마지막 회도 방송 3분 전에 전달된 걸로 아는데, 작가님도 감독님도 고민과 노력을 끝까지 하신 것 같아요.
Q. 그러고 보니, ‘보이스’에 출연한 배우들이 감독님을 극찬하는 것 같던데.
이하나: 감독님이 정말 비상하세요. 마음의 소리도 전혀 없으시고 몸동작도 자연인 같이 거침이 없으시고. 외적인 모습이 워낙 카리스마가 넘치시는데도 재밌는 농담을 하시면서 아이디어를 던지시거든요. 정말 감독님은 감독님이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염려했던 장면들, 다들 ‘어떻게, 찍을 수 있긴 할까’하는 그런 것들도 감독님은 그냥 뚝딱 찍으시더라고요.
Q. 그런 감독님이 사실적인 묘사에 공을 들였으니 그런 화면과 소품, 설정이 완성됐나 봐요.
이하나: 맞아요. 후반부에 판타지아 에피소드에서 시체를 발견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당연히 마네킹인줄 알았거든요. 비닐로 싸놓은 콘셉트였는데 보니까 숨소리도 나고 움직이더라고요. 깜짝 놀라서 촬영 마치자마자 뜯어드렸어요.
Q. 촬영환경이 살벌한 만큼 트라우마가 있을 법도 한데, 어땠어요?
이하나: 트라우마도 그렇고 일의 농도도, 정말 진했어요. 그래서 휴식과 스트레스 해소가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었죠. 다음 작품이 정해지기 전까지는 뭐든 간에 데드라인이 있는 일을 찾아서 해보려 해요.
Q. 독특하네요. 왜 꼭 데드라인이 있어야 할까요?
이하나: 촬영장에서 정해진 시간동안 앞뒤 상황 보지 않고 몰두해야 했던 건 그날 끝내야만 한다는, 한정된 시간이 정해져있기 때문이었어요. 초인적인 힘이 나온다고나 할까요? 저희가 이렇게 치열하게 할 수 있었던 게 데드라인 덕분이었던 것 같거든요. 일의 농도가 진하니 휴식도 개운하고,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예전에 음악감독 이병우 씨가 음악에 가장 큰 영감을 주는 게 사랑이나 추억이 아닌 ‘데드라인’이라 해서 그게 참 의외였는데 이젠 그 의미를 알겠어요. 기자님도 아마 아실 것 같은데.
Q. 그럼요. 흔히들 글은 마감이 써준다고 하죠(웃음).
이하나: 맞아요. 딱 그거예요!(웃음)
Q. 이전까지 ‘배우 이하나’에게 사랑스러운, 로맨틱한 이미지가 강했다면 ‘보이스’로 그 스펙트럼이 넓어진 것 같아요.
이하나: 그런 의미에서 ‘보이스’는 제가 참 의미가 큰 작품이에요. 감사한 마음이 크죠. 사람도 얻은 것 같고, 연기를 더 공부하고 싶은 마음도 얻게 됐고요. 제겐 현장이 학교 같았거든요. 저는 학창시절에 못 누린 아쉬움이 있어선지 그때의 꿈을 자주 꾸는 편인데, ‘보이스’ 현장에 있는 동안에는 학교 꿈을 꾼 적이 없었어요. 감독님이 선생님 같고, 촬영시간이 밤 12시를 넘어가면 야자시간(야간 자율학습) 같고(웃음). 각자 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 거잖아요. 교실 안에서는 그런 순간들이 로망이지 않았을까요? 저는, 그런 구조가 너무 좋았어요. 다만 그 시간이 정해져있다는 건 아쉬웠죠.
Q. 그래서 종방연에서 배우들이 그렇게 시즌2를 말했다던데(웃음).
이하나: 종방연은 정말 행복한 비명들이 가득했어요. 감사하게도 저희 배우들을 불러주시는 곳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좋은 말씀들을 듣느라 행복한 비명을 질렀고, 시즌2 이야기도 물론 나눴어요. 사실, 저희 감독님과 현장 스태프 분들의 노하우라면 ‘보이스’ 시즌2가 아니어도 뭐든 다 잘 만들어주실 것 같아요.
Q. 김재욱 씨와는 어떤 교류가 없었나요? 짧은 접점에도 많은 분들이 이하나-김재욱의 투 샷에 많은 관심을 보였어요.
이하나: 말씀을 많이는 못 나눴지만, 코미디 작품을 같이 한 번 해보면 재밌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보니까 김재욱 씨가 저와는 좀 반대더라고요. 저는 백수나 비정규직이 익숙하거든요. ‘연애시대’ 유지호도 그랬고 ‘메리 대구 공방전’ 황메리도, 단벌신사의 이미지가 강했죠. 그런데 김재욱 씨는 부유하고 직업도 확실한 상류층 역할 제의를 많이 받나 봐요. 그래서 자기는 코미디 연기도 굉장히 하고 싶다고, 다음에 기회가 되면 호흡을 맞춰 보자고 하더라고요.
Q. 그렇게만 된다면 김재욱 씨에게 조언을 많이 해줄 수도 있겠어요.
이하나: 에이, 아니에요. 저는 이번에 배우로서 김재욱 씨에게 정말 많이 배웠거든요. 그런 말씀은 잘 못 드리겠어요. 김재욱 씨가 로맨틱 코미디보다는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코미디를 해보고 싶어 하던데, 언젠가는 인연이 되겠죠?(웃음)
Q. ‘보이스’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이 있어요. 뛰어난 청력도 있지만 윗선의 부조리에 맞서는 투철한 직업의식도 보였었죠. “경찰은 원래 나쁜 놈 잡으라고 있는 거 아니냐”는 멘트가 정말 뭉클했어요.
이하나: 저도 그 장면을 정말 좋아했어요. 심지어 그 장면을 마친 뒤에는 대기실에서 펑펑 울었죠. 제가 그 부분이 너무 좋아서 정말 열심히 준비했거든요. 하지만 여건 상 준비를 많이 못 하고 찍었는데 몸이 안 따라주니 정말 울고 싶더라고요. 하지만 다시 찍을 시간은 없고… 아쉬워서 울었던 기억이 나요.
Q. 그래도 그 장면은 참 좋았어요. 경찰청장으로 나왔던 조영진 씨와는 어떤 교감을 나눈 부분이 있었나요?
이하나: 제가 사람 대 사람으로서 청장님과 정이 많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많은 조언도 구하곤 했어요. 한 번은, 감독님이 제 대사가 너무 빠르다고 지적을 하셨어요. 센터 직원은 안심을 시켜줘야 하기 때문에 말이 빠르면 안 되거든요. 그런데 느리게 말 하는 게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청장님께 어떻게 하면 대사를 느리게 할 수 있을지 여쭤봤어요. 그랬더니 몇 분 뒤에 슬며시 오셔서는 “권주. 생각을 느리게 하면 되지 않을까?” 하셨어요. 당시에는 그게 어떤 말씀일지 곱씹어봤어야 했는데, 보니까 정말 생각을 느리게 하면 말이 느려지더라고요. 그렇게 단순한 이치이면서도 찾기 어려운 부분을 잘 짚어주셔서 제가 많이 여쭤보고 그랬어요. 청장님을 정말 좋아했죠.
Q. 방금 한 말도 그렇고, 강권주 캐릭터는 확실히 어려워요. 캐릭터 접근을 위해 준비도 많이 했을 것 같은데.
이하나: 감독님께서 영화 ‘시카리오’를 추천해주셔서 정말 좋았어요. 권주 캐릭터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음악도 추천해주셨죠. HBO 드라마 ‘트루 디텍티브’ OST인데요, 차가운 고요함과 쓸쓸함, 초저녁 느낌이 많이 나요. 이걸 처음 들었을 때가 겨울이었는데, 차가운 계절이 주는 설렘이 참, 와 닿더라고요.
Q. 실제로 강권주 같은 청력을 갖는다면 어떨 것 같아요? 아니면 다른 능력을 갖고 싶다던가.
이하나: 전 권주 같은 능력도 갖고 싶고, 사람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어요. 사람 마음을 가장 알기가 어렵잖아요. 제가 원할 때 그런 마음들을 듣고 싶어요.
Q. 극 중 그런 대사가 있었죠. ‘처음엔 이게 저주 같다고 생각했는데’라는 말처럼 원망할 수도 있을 텐데.
이하나: 저는, 저를 배려해주느라 어떤 걸 감수해주실 때 그런 부분들을 귀신같이 알아내서 제가 배려를 해드리고 싶어요. 마음을 역으로 미리 알고 그렇게 하고 싶거든요. 저희 현장에도 수줍은 분들이 많아서 배려를 정말 많이 받았어요. 감독님도 마음이 약하셨거든요.
Q. 대화하면 할수록 김홍선 감독에 대한 애정이 듬뿍 느껴지는 것 같아요.
이하나: 정말 열정적이셨으니까요. 모든 장면을 분량보다 넘치게 찍고, 거기서 좋은 것들을 추려내는 작업을 끝까지 놓지 않으셨어요. 물론, 보시는 분들이 마지막 회에서 의아한 부분이나 아쉬운 부분이 보였을 수도 있어요. 시간 압박 때문에 어쩔 수 없었으니까요. 감독님뿐만 아니라 스태프 분들도 각자의 파트에서 시간과 많이 싸우셨죠. 모든 분들이 최선을 다하셨다는 걸 느낀 현장이었어요.
Q. 함께 호흡을 가장 많이 맞췄던 장혁 씨 이야기도 빼놓을 수가 없죠.
이하나: 맞아요. 장혁 오빠는 대본이 하나라면 열까지 준비하는 분이세요. 대사뿐만 아니라 액션도요. 제가 오빠와 처음으로 재회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서로 눈을 피하지 않고 대립해야 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도리어 불안하고 오빠 눈빛이 너무 강해서 시선을 피하려 했어요. 그런데 오빠가 시선 피하지 말고 다시 하라고 했죠.
Q. 디테일을 잡아주는 편이었군요.
이하나: 그 장면 말고도 제가 “잠시 후에 다시 얘기하시죠”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었어요. 무사히 오케이를 받았었는데, 오빠가 다음 컷에서는 본인을 1, 2초만 더 응시하고 가라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놓칠 수 있는 부분들을 잡아주셨어요. 대인배라고 할까요? 본인 것만 생각하는 분이 아니시거든요. 감사하다고 하면 “아니야. 네가 잘해야 나도 살아서 그런 거야”라며 수더분하게, 사람 좋은 미소를 날려주시는 분이었어요. 핫팩이 떨어지면 항상 챙겨주셨고요. 여배우 잘 챙겨주시기로 유명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정말이었어요(웃음). 정말 감사하죠.
Q. 여러 가지로 우여곡절이 많았던, 쉽지만은 않은 작품이 끝났잖아요. 그럼 악상도 많이 떠올랐을 것 같아요.
이하나: 음, 뭐랄까. 조용히 편안하게 있을 곳만 있다면 1박 2일 정도는 기타만 있어도 거기서 안 나올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정도로 촬영 내내 영감이 많이 쌓였어요. 조만간 기타와 한 판 해보려고요(웃음).
Q. 그렇다면, 언제쯤 우리가 그걸 들어볼 수 있을까요?(웃음)
이하나: 그러게요. 예전에는 결과물로 나오지 않아도 좋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결과물로 만들고 싶어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그 결과물을 들려주고 싶거든요.
Q. 음악을 사랑하는 배우 이하나의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해요.
이하나: ‘보이스’를 통해 연기에 대한 숙제도, 애정도 얻게 됐어요. 사람도 얻게 됐고요. 제가 빚진 마음이 드는 부분까지도 고맙고 감사해요. 해야 할 일이 주어진 것 같거든요. 그래서 저는, 재정비 시간을 가지며 좋은 모습을 보여드릴 생각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