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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천우희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변할 수 없고 아무것도 아니게 되죠”

[비즈엔터 정시우 기자]

▲천우희(사진=윤예진 기자 yoooon@)
▲천우희(사진=윤예진 기자 yoooon@)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 시각장애인 미소. 영화 ‘어느 날’은 우리가 그런 여인에게 흔히 지닐법한 어떤 고정관념에 대해 내내 태클을 걸어오는 영화이기도 하다. 많은 비극을 껴안고 있을 것으로 추측되어지는 미소는, 그러나 관객의 예상을 깨고 내내 밝고 쾌활하고 긍정적이다. 사실 고정관념에 대해서라면 미소를 연기한 천우희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배우다. ‘써니’의 불량학생 상미를 연기한 이후 오랜 시간 ‘본드걸’ 이미지와 싸워야 했던 그녀는 ‘한공주’ 이후에는 또 자신을 덧씌운 어둡고 센 이미지와 나름의 경쟁을 해야 했다. 여러 이미지와 그러한 이미지가 만들어 놓은 어떤 고정관념들, 거기에 더해 충무로에서 여성으로 느낀 여러 한계와 난관들…그 속에서 천우희는 많은 날 고민하고 스스로를 바로 잡는 시간을 거친 듯 했다. 고민의 순간들을 통과하며 천우희는 분명 달라져 있었다.

Q. ‘곡성’에 이어 또 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캐릭터네요.
천우희:
그러니까요. 전, 같다는 생각을 못하고 있었어요. 누군가 “또 귀신이다!” 하길래, 뒤늦게야 캐릭터가 연장선상에서 보일 수 있겠구나 깨달았죠.

Q. 천우희도 한 사람에게만 보여 지게 된다면, 누가 봐 줬으면 좋겠어요?
천우희:
제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요. 아…그런데 누굴 선택하지? 어렵네요.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하는 것 같아요.(웃음) 안 되겠어요. 아예 모르는 사람이 좋을 것 같아요.

Q. ‘어느 날’의 가제는 ‘마이엔젤’이었어요. 지금과 달리 달달한 제목이었죠.
천우희:
네. 사실 처음엔 캐릭터에 대한 끌림이 크지 않았어요. 저는 작품을 고를 때 직관을 믿는 편이에요. 그런데 이 작품은 주저하는 게 생기더라고요. ‘왜 그럴까…’ 그 이유가 잘 잡히지 않았어요. 고민하던 찰나에 이윤기 감독님과 (김)남길 오빠를 만나서 확신을 얻었어요. 미소 캐릭터를 내 식으로 만들면 처음에 느꼈던 것보다 조금 더 괜찮은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천우희(사진=윤예진 기자 yoooon@)
▲천우희(사진=윤예진 기자 yoooon@)

Q. 그래서일까요. 이윤기 감독 기존 작품 속 여성 캐릭터들에 비해 미소는 굉장히 밝고 건강한 느낌이 있어요. 이윤기 감독님이 직접 쓴 시나리오가 아니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천우희의 의지도 반영된 결과물이란 생각이 문득 드네요.
천우희:
오, 그 생각까지는 못했는데 그럴 수도 있겠네요. 뭐랄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그려지는 고정된 이미지가 일단 걸렸던 것 같아요. 가제(‘마이엔젤’)도 그랬고, 문어체의 대사 등이 조합돼서 만들어내는 유약한 여성 이미지가 있었거든요. 그걸 다르게 표현하게 싶었던 마음이 있었어요.

Q. ‘곡성’ 개봉을 앞두고 본인의 강한 이미지에 대한 고민을 여러 인터뷰에서 밝힌 것으로 압니다. 그런 고민이 ‘어느 날’에 미친 영향이 있나요? 고민이 여전히 진행 중인지도 궁금하군요.
천우희:
요즘은 최대한 생각을 안 하려고 하고 있어요. 많이 자유로워진 편이죠. ‘곡성’ 때만 해도 고민이 상당했어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미지라는 게, 참 무섭구나, 라는 생각… 저는 괜찮은데 많은 사람들이 제가 연기한 캐릭터를 부담스러워하거나, 멀게 느끼시더라고요. 그걸 벗어날 필요도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런 찰나에 미소라는 캐릭터를 만난 거고요. ‘그래, 나의 새로운 (밝은) 면모도 보여줄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그리고 배우는 선택받는 직업이잖아요? 어떤 계획을 세운다고 해서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느끼고 있기에 조금 더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겠구나, 생각하는 거죠.

Q. 배우가 인지도를 얻고 스타가 되고 싶어 하는 이유는 단순히 인기에 목말라서는 아닐 거예요. 진짜 이유는 스타가 되면 작품 선택의 폭이 넓어지기 때문이 아닐까란 생각을 해요. 그런 점에도 배우 천우희도 이젠 선택 받는 위치에서 선택을 할 수 있는 쪽으로 옮겨왔다고 생각하는데요.
천우희:
선택할 수 있는 기회들이 많아진 건 사실이에요. 너무 감사한 일이죠. 기분 좋고요. 그럼에도 현실적으로 닿는 부분이 더 많다보니 ‘아, 쉽지만은 않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다양한 작품들이 들어오지만 정작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많지 않거든요. 여배우의 기능이라고 해야 할까요? 여배우의 쓰임이 약간 제한적이에요. 그에 대한 어려움을 느끼고 있어요. 고민하죠. ‘그러면 내가 잘 활용될 수 있는 작품을 만날 때까지 기다려야할까?’ 아니면 ‘무언가를 계속 해나가면서 변할 수 있게 해야 할까?’ 늘 그 선택 앞에 있어요.

Q. 이전보다 조금 더 자유로워졌다는 건 어느 쪽에 가까운 건가요.
천우희:
이전에는 스스로에게 냉정한 게 있어서 조금이라도 미흡한 부분이 보여 지거나, 관객들에게 ‘이 작품, 좋아요’라는 이야기가 안 나오면 자학하거나 스트레스를 받곤 했어요. 그러다가 최근에 깨달았어요. 나는 너무 내 생각은 안 하고 작품만 바라봤다는 것을요. 지금은 여러 측면에서 바라보고 나도 조금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깨지고 소모된다 할지라도, 조금 더 과감하게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천우희(사진=윤예진 기자 yoooon@)
▲천우희(사진=윤예진 기자 yoooon@)

Q. 소모가 된다는 것에 대한 설명을 조금 더 듣고 싶어요.
천우희:
그러니까, 저에겐 그 작품을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가장 중요했어요. 관객들의 오감을 만족시킨다든지, 메시지를 준다든지 하는 것들이요. 그게 아니면 ‘나는 안 할 거야’라는 생각이 있었던 거죠. 그런데 지금은 달라요. 좋은 감독이 될 수도 있고, 함께 하는 배우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내 캐릭터가 마음에 들어서 일수도 있고…많은 것들 중 한 가지라도 만족이 되면 시도해 봐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Q. 어떻게 보면 좀 더 유연해진 거네요.
천우희:
네. 열린 부분이 있는 거죠. 다만 이게 과연 순응하는 건지, 내 신념을 가지고 잘 가고 있는 건가에 대한 고민은 따라요. 하…(잠시 한숨) 답은 없는 것 같아요. 역시 어렵네요.(웃음) 확실한 건 제가 계획한 이상향대로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것. 이상향을 마음에서 놓치는 않되, 도전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요.

Q. 여배우로서 한국 시장에 대해 느끼는 어떤 구조적인 문제일 텐데요,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기도 해요.
천우희:
글쎄. 어떤 느낌일까. 그런 건 있어요. 우디 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2011년)였나요? 그 영화에서 보면 과거(1920년대)로 시간 여행을 떠난 주인공에게 그 곳은 황금시대지만, 그 곳에서 만난 여인은 1890년대 파리를 완벽한 황금시대라고 동경하죠. 그것과 비슷한 것 같아요. 남들이 봤을 땐 “지금 너네 되게 좋은 거야”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것과 같지 않을까 싶어요.

Q. 현실은 도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쓰다듬어야 할 존재라는 걸 알려주는 영화죠.
천우희:
네. ‘곡성’ 나홍진 감독님이 그런 이야기를 해 주신 적이 있어요. “아티스트는 시대를 선택할 수 없어. 받아들여야 해!”라고요. 그게 너무 와 닿았어요. 물었죠.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해요?” 그러니까 “뭘, 어떻게 해. 해 나갈 수밖에 없지”라고 하셨어요. 그때 고민이 조금 풀리는 부분이 있었어요. 결국 아무것도 안 하면 변하지 않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전에는 조금 더 좋은 것, 내가 원하는 것, 모든 게 갖춰져 있던 것들을 원했다면, 지금은 아니에요. 어떤 선택이 어떤 나비효과를 가져올지 모르니까 조금 더 유연해 지자, 라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Q. ‘미드나잇 인 파리’처럼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면, 시대와 나라를 불문하고 어디로 가고 싶어요. 천우희가 생각하는 황금시대는 어디인가요.
천우희:
음…뭔가 ‘지금의 한국이 가장 좋아’ 라고 이야기해야 할 것 같은데요?(웃음)

▲천우희(사진=윤예진 기자 yoooon@)
▲천우희(사진=윤예진 기자 yoooon@)

Q. (웃음)할리우드 무성 영화 시대, 어울릴 것 같아요. 고전적인 느낌이 있어요.
천우희:
옛날 사람 같나요?

Q. 클래식이라고 하죠.(웃음)
천우희:
그렇다면 너무 좋죠.(웃음)

Q. ‘아티스트는 시대를 선택할 수 없어’라는 나홍진 감독의 말이 의미심장한데, 우희 씨는 아티스트에 대해 어떻게 느껴요? 어떤 사람이 아티스트일까요.
천우희:
“아티스트야!” 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작품을 바라보는 자세인 것 같아요. 제가 전시회를 자주 보러 가는데 예술을 잘 알아서라기보다, 창작자들이 자기 예술을 대하는 자세를 배울 때가 많아서예요. 끝없이 고민하고 진정성 있게 대해야 한다는 걸 느껴요. 1m의 아주 작은 차이가 아티스트를 만든다고 생각해요. 디테일한 부분까지도 고민하고 시도해 보고, 그게 또 타인과 교감이 됐을 때, 그때 그를 아티스트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Q. 디테일한 부분까지 시도하고 고민했던 작품, 말해 줄 수 있나요.
천우희:
‘한공주’(2013년)죠. 사실 작품 안에서 한 면만으로 쓰여질 때가 있어요. 가령 ‘이 장면에서 이 컷이 좋았는데 왜 안 담겼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내 캐릭터적인 시각이 들어갔으면 좋겠는데 그게 안 담길 때가 더 많은 거죠. 물론 거기에는 합당한 여러 이유가 있지만요. 그러데 한공주’는 달랐어요. 이수진 감독님과 제가 만들어가는 부분이 많았어요. 제가 표현하고 싶은 감정을 1부터 끝까지 원 없이 했던 것 같고요. 지금도 힘들 때 의지가 되고, 위로가 돼 주는 작품이에요. 그래서 가장 큰 애착이 가요,

Q. 영화 ‘신부 수업’(2004)의 깻잎무리2 역할로 데뷔했어요. 이후 ‘한공주’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곡성’으로 칸영화제 진출까지. 단역부터 차곡차곡 걸어 온 느낌입니다.
천우희:
배우로서 그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요. 단역부터 하나하나 올라온 경우가 남자배우는 많아요. 그에 반해 여배우들은 드물죠. 어떤 벽에 부딪혔을 때 그걸 넘어서기가 힘들다는 걸 저는 경험했고요. 그래서 나름의 자부심은 있는데, 다만 그때 조금 더 똑똑했으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은 있어요. 아무 생각 없이 학교 다니다가 ‘야, 너 오디션 봐 볼래?’ 해서 절레절레 다녀왔는데 그게 데뷔작이라는 거예요. 연기에 대한 그 어떤 자각도 없었을 때인데 그게 데뷔연수에 들어가서 올해 제가 13년차가 됐어요.(웃음) 부담스럽죠. 뭔가 13년차의 연기를 보여야 할 것 같은 압박감? 그런 게 있어요.

▲천우희(사진=윤예진 기자 yoooon@)
▲천우희(사진=윤예진 기자 yoooon@)

Q. 스스로가 배우라고 자각한 건 언제인가요.
천우희:
봉준호 감독님의 ‘마더’(2009)를 찍으면서 ‘내가 배우를 평생해도 되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게 제 세 번째 작품이었어요. 저는 단순한 재미로 하는데 현장 사람들은 달랐어요.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떤 의식을 가지고 있었어요. 한 작품을 위해 모든 사람들이 노력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를 느낀 거죠. 이후 연기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어요.

Q. 앞서 이미지 이야기를 했는데 ‘써니’ 이후 본드걸 이미지가 꽤 오래 따라다녔어요. 그런데 ‘한공주’ 이후 그와 정반대의 이미지가 따라다녔죠. 결국 이미지라는 게 고착되기도 쉽지만 반대로 쉽게 잊혀지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해요.
천우희:
맞아요. 그런데 여전히 ‘써니’나 ‘한공주’ 이미지로만 봐 주시는 분들이 상당해요. 그 이미지가 강하니까 다른 모습을 받아들여주지 않더라고요. 어려워요. 대중의 입맛을 다 맞추기란 쉽지 않죠. 이미지라는 게 무섭기도 하지만, 배우이기에 받아들여야 한다고도 생각해요.

사실 그런 생각을 해요. 만약 제가 감독이나 제작자라면 ‘이 배우의 익숙한 모습보다는 지금껏 보지 못한 모습을 꺼내서 쓰고 싶어’ 라는 생각이 들것 같아요. 그래서 비슷한 캐릭터들이 들어오는 걸 보면서 ‘왜 연장선상에 있는 모습을 원하지?’ 라는 의문이 들기도 해요. 저는 제가 잘 쓰였으면 좋겠어요. ‘마음껏 놀아 봐’ 하면 정말 재미있게 놀 자신이 있거든요. 하나의 이미지에 갇혀 있고 싶지 않아요.

Q 천우희가 감독이라면 배우 천우희의 어떤 모습을 꺼내서 쓸래요?
천우희:
저라면요? 하하하. 개인적은 욕심일 수 있는데 ‘병 맛’ 가득한 캐릭터를 해 보고 싶어요. “쟤 뭐야?” 싶은 부분들을 보여드리고 싶거든요. 나영석 PD님 작품도 좋아요. 소소하게 밥 먹고 이야기하고, 그런 일상적인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는 작품. 욕심일까요?(웃음)

정시우 기자 siwoorain@e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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