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엔터 이주희 기자]
박해일이 ‘상류사회’에 참여한 이유는 세 가지였다. 먼저 대본에서부터 느껴지는 이야기의 빠른 속도감, 그 절정을 향해 혼자만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아내 역인 수애와 함께 한다는 것, 마지막으로 장태준 캐릭터가 가진 욕심과 양심 사이에서 파도 타는 듯한 느낌의 역할을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영화 ‘상류사회’는 각자의 욕망으로 얼룩진 부부가 아름답고도 추악한 상류사회로 들어가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주인공 장태준은 경제학 교수였다가 보수당의 촉망받는 정치 신인으로 떠오르는 인물. 박해일은 장태준 역을 맡아 평범한 얼굴부터 욕망에 빠지는 모습까지 다양한 캐릭터를 그린다. 능력 많고 자기 나름대로의 소신 있는 교수이지만 아내와 있을 때는 지질하기 그지없고, 국회의원이 될 기회를 얻자 헛바람이 들기 시작한다. 박해일은 “제대로 놀아봤다”는 표현으로 장태준을 연기했던 순간들을 기억했다.
“나라는 사람이 장태준이 갖고 있는 여러 환경에 이렇게 빠져봤다가 저렇게 빠졌다가 한 거다. 노는 물이 달라지면 휘둘리기도 하고 자유분방한 감정들을 표현할 수 있었다.”
120분 안에서 여러 상황에 맞닥뜨리는 캐릭터의 다채로움을 보여주기 위해 박해일은 헤어ㆍ의상부터 말투까지 세심하게 조율했다.
“헤어스타일도 바꾸고, 안경을 써보기도 했다. 의상도 교수일 때는 자유분방하게 입었다가 정치인이 되면서 옥죄는 느낌으로 바꿨다. 사실 상황 자체가 세팅이 되어 있고 공간이 변하다 보니까 내가 의도적으로 바꾸려고 하지 않아도 다르게 느껴지는 것 같다. 실제 YTN 사옥에서 ‘TV토론’ 하는 모습을 찍었는데 사회자와 상대편이 실제 각각 앵커와 교수였다. 주변에 있을 것 같은 인물이라 더 재미있었다. 없는 인물을 만들려고 했으면 스트레스 받았을 거다.”
많은 영화 속 주인공들이 관객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감정이입을 하게 만드는 대상이라면, ‘상류사회’의 장태준은 블랙코미디 장르로서 철저하게 관객에게 조롱당한다. ‘모던보이’ ‘덕혜옹주’ ‘남한산성’에서처럼 누구보다 단정한 얼굴을 하기도 하지만, ‘연애의 목적’에서의 지질한 모습, ‘은교’의 늙은 시인, ‘짐승의 끝’ ‘살인자의 추억’의 소름끼치는 악역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자랑하는 그가 이러한 연기를 하면서 어떠한 감정을 느꼈을까.
“조롱당하는 구체적인 신을 꼽자면 요트 장면일 것이다. 국회의사당이 앞에 보이고 김강우에게 협박당하고 수모를 받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김강우가 회칼로 생선을 써는데 정말 깔끔하게 연기해줬다. 그 연기를 받는데 조롱당하는 느낌이 명확하게 났다. 이런 신을 찍을 때는 상대 배우가 중요하다. 반응이 딱딱 나올 수 있지 않나. 새롭게 배우를 만나는 기분이 좋고, 연기를 할수록 이런 만족감을 찾아가는 재미가 있다. 그러다 보면 또 새로운 캐릭터의 감정을 쫓게 되는 것 같다.”
다만 ‘상류사회’는 표현 수위가 강한 탓에 공개된 후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수애ㆍ이진욱, 윤제문 등 여러 배우들이 베드신을 소화한 가운데, 박해일 역시 자신을 보좌하는 직원 은지 역으로 출연한 배우 김규선과의 베드신을 연기했다.
“요새 19금(禁) 영화가 많이 없다. ‘상류사회’는 과감한 면을 선택한 것 같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우리 신 자체도 중요하고, 은지(김규선 분) 캐릭터에게도 중요한 장면이기도 하다. 은지가 장태준을 유혹하는 장치이면서 두 사람 모두 콘트롤이 안 되는 상황을 그린다. 태준 시점에서 보면 초반과 달라진 입장을 나타낸 거다. 그러한 부분에서 관객이 괴리감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명분 있는 베드신인 만큼 촬영 전 준비 때부터 대화를 많이 나눴던 걸로 알고 있다. 여배우들과도 의논을 많이 했고, 이견 없이 만들어졌다. 어떻게 보이는지 관객에게 이야기를 많이 듣고 싶다.”
매 영화마다 과감한 도전을 시도하는 박해일. ‘상류사회’ 속 아내 오수연이 장태준에게 “때는 기다리는 게 아니라 만들어야 한다”라는 대사가 떠오르는 부분이다. 박해일에게 평소 삶의 태도에 대해 물었다. 그는 “사실 나는 능동적으로 적극적인 사람은 아니다. 어느 정도 기다리면서 기회를 보다가 계속 기회가 안 오면 그때서야 움직이는 스타일인 것 같다”라고 웃으면서도 “하지만 사람은 살다보면 모른다. 적어도 뒷걸음질 치지는 말자는 주의다. 되돌아보는 건 좋지만 반 발짝이라도 앞서가는 게 좋지 않나. 앞으로도 그러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