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엔터 이주희 기자]
한 편의 영화에는 감독ㆍ배우부터 시작해 수많은 스태프들의 각오가 담겨 있다. 자신이 만든 것에 대한 책임이 들어 있는 것. 그중 배우는 영화의 얼굴로써 무게를 대표적으로 짊어지게 된다.
영화 ‘생일’(감독 이종언)은 어떤 배우더라도 선택하기 쉽지 않은 작품이었다. 모두가 좋은 시나리오라고 인정했고 덕분에 상업영화로 키워 제작되기까지 했지만, 세월호라는 소재가 주는 무거움이 있고,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라는 점에서 의도치 않은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위험을 감수하고 작품의 얼굴이 된 건 배우 전도연. 물론 전도연에게도 이 영화를 시작하는 건 어려웠다. 캐스팅 제안을 처음 받았을 당시 전도연은 “엄두가 안 난다”며 이 작품을 고사했었다. 세월호에 대한 부담감은 물론이거니와, 이미 영화 ‘밀양’(2007, 감독 이창동)에서 한 차례 아이를 잃은 엄마 역할을 하면서 “앞으로 아이 잃은 엄마 역할은 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도연은 거절하고 나서도 계속 감독님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이종언 감독님은 ‘밀양’ 연출부 때부터 알고 지내던 분인데, 제가 생각하는 순남에 대해 궁금해 하셨어요. 제작사 대표님하고도 계속 이야기를 나눴고요. 표면적으로 작품을 거절했지만 마음을 놓고 있진 않았던 것 같아요. 정말 하지 않으려고 했다면 고사한 작품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제작진들과 이야기를 하진 않았겠죠.”
결국 전도연이 ‘생일’에 출연했다는 건, 시나리오가 배우를 설득했고, 배우 역시 관객을 설득할 수 있는 자신이 있다는 뜻일 터. “용기가 났던 것은 ‘생일’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들의 이야기를 덤덤하게 잘 그려냈기 때문이에요. 사람 자체에 대한 이야기라서 선택을 했던 것 같아요.”
극중 다른 유가족과 달리 전도연이 맡은 순남은 자식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현실에 일정한 거리를 둔다. 현실과 환상을 구분 없이 살아가는 순남의 모습을 전도연은 어떻게 보았을까.
“의도한 건 아니지만 순남을 보면서 ‘유령 같아요’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영혼 없이 떠도는 인물처럼 느껴졌죠. 저는 순남을 한 발자국 떨어져서 보려고 했어요. 그게 감독님이 영화를 만드는 방식이었고 순남 역시 ‘생일’ 속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했죠. 모두가 영화 속 소재를 잘 알고 있고, 아이를 잃은 엄마의 마음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출발하잖아요. 저 역시 시나리오 볼 때부터 오열했지만, 연기할 때는 순남의 마음을 앞서 갈까봐 걱정했어요. 전도연이라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인지, 순남으로서 느끼는 감정인지 확인하려 했어요.”
굳게 마음을 먹고 촬영에 들어갔지만, 피하고 싶었던 순간은 있었다. ‘생일’은 가슴 아픈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덤덤하게 이야기를 풀어 가는데, 사실 이들의 감정은 모두 억눌려 있는 것뿐이다. 꾹꾹 눌러 담겨 있던 감정은 환상으로조차 등장하지 않는 아들 수호(윤찬영 분)에 의해 폭발되고 만다.
“수호의 옷을 안고 혼자서 오열하는 신을 찍을 땐 도망가고 싶었어요. 대본에 ‘순남이 아파트가 떠내려가도록 운다’고 명확하게 나와 있는데, 겁이 났어요. 어떻게 울어야지 아파트가 떠내려가는지, 그런 순남의 마음은 어떨지, 너무 무서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결국 아무 생각하지 말고 그때 느끼는 감정만큼만 하자는 마음으로 연기를 했죠.”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대사 한 마디가 어려웠던” 신도 있었다. 순남의 남편 정일(설경구 분)은 ‘그날’ 이후 3년 만에 귀국해 아내의 주변을 서성거리지만, 순남은 남편과의 재회를 미룬다. 그리고 드디어 재회하는 순간, 순남은 남편에게 오랫동안 준비해왔던 이혼 서류를 내민다.
“‘많이 생각한 거야’, 남편과 관계를 정리하는 이혼서류를 내밀면서 하는 말인데 이 대사 하는 게 힘들더라고요. 아무것도 아닌 대사 같지만, 순남이 남편을 밀어내는 부담감이 굉장히 많이 담긴 신이었어요.”
서류를 준비해놨으면서도 재회를 미루는 모순된 감정. 이처럼 극중 일관되지 않는 순남의 태도는 실제 유가족의 복잡한 심정을 나타내는 것 같아 관객의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순남의 입장에선 (남편과의 재회를) 최대한 미루고 싶었지 않았을까요? 수호를 떠나보내지 못하면서 주변 인물들을 다 정리했을 것 같아요. 단절된 삶을 선택하면서 그것들 중에 이혼서류가 있었을 텐데, 또 미루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 같아요. 수호의 생일 모임을 하지 않겠다고 외면하는 것처럼, 남편과의 현실도 미루면서 피할 수 있을 만큼 피하고 싶지 않았을까 싶어요.”
분명 ‘생일’은 극영화이지만, ‘진심’이란 말이 이토록 필요한 영화도 없을 것이다. 전도연은 순남과 순남을 연기하는 자신을 따로 보려고 했지만, 순남의 모습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제가 순남을 연기하는데 이 여자의 삶이 너무 고통스럽다고 생각했어요. 덩달아 딸 예솔(김보민 분)이까지 ‘어떻게 매일매일 살아가지?’라는 생각이 들었고, 특히 수호의 환상을 보고 웃는 신에선 순남이 너무너무 불쌍해서 울었죠. 제가 연기를 하면서 운 게 아니라 순남의 모습이 마음이 아파서 눈물이 났어요. 마지막 생일 모임에서도 순남이 우는데, 처음부터 눈물을 흘리는 신은 아니었거든요. 그때는 사실 제가 순남이었을 수도 있고, 순남이 저였을 수도 있어요. 수호의 성장 과정이 쭉 보여지는 신인데 정말 엄마로서 감정을 느꼈어요. 어떻게 자식을 키워내는지 저도 잘 아니까 너무너무 눈물이 나더라고요. 꾹꾹 참아도 터져 나왔던 것 같아요.”
앞서 전도연은 작품을 선택할 때 ‘진짜’에 집착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영화 ‘생일’이 관객의 감정을 억지로 유도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건, 전도연의 이런 연기관 때문일 것이다.
“제가 어떻게 연기할 것인지 연기 방식을 택하는 건데, 사실 슬픔이든 기쁨이든 우리가 생각한 정형화된 감정이 있잖아요. 아이 잃은 엄마는 이렇게, 프로포즈 받을 때 여자의 표정은 이렇게. 남들이 바라는 연기가 있고 제가 느낀 게 다를 때, 예전엔 남들이 바라는 것을 조금 더 생각했다면, 이제는 남들이 ‘저럴 수 있을까?’ 싶더라도 제가 느끼는 걸 생각해요. 뭐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말할 순 없지만 제가 느껴서 하는 건 남들과 달라도 맞지 않을까 싶어요.”
자신이 ‘진짜’를 연기하면 진심이 전해질 거라고 생각하는 전도연, 감정은 보편적인 것이기에 통할 수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전도연은 이번 영화를 통해 ‘보통’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삶의 의미를 되찾길 바란다고 전했다.
“원래 시사회에 친구들 초대 안 하는데, 이번 영화는 보통 사람들이 보면 좋을 것 같아서 큰 마음 먹고 초대를 했어요. 애 셋 키우는 친구가 부랴 부랴 퇴근해서 시사회를 보러 왔는데 ‘그동안 매일매일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집에 가면 내 아이가 있고 남편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고 말하더라고요. 우리 영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건 것 같았어요. 하루하루 힘들지만 감사함으로 살자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영화 같아요. 저 역시 특별한 걸 바라고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해질까 생각해왔지만, 행복이라는 게 제가 뚜렷이 뭘 한다고 주어지진 않잖아요. 다들 제가 여배우로서 화려한 삶을 살 거라고 생각하지만 일상에선 무수리예요.(웃음) 아이 간식 챙겨서 학교 보내고 보통의 일상을 보내는데, 하지만 투정하면 벌 받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이가 아프지 않고 가족 모두 건강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에 감사하자라는 생각을 하려고 해요. 오늘 하루도 무사히 보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