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승룡이 연기하는 아버지들은 어딘가 늘 짠하다. 완벽해서가 아니라 부족하고 서툴러서,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 '비광'에서 류승룡이 맡은 중구 역시 그렇다. 화려했던 삶에서 한순간 추락한 그는 벼랑 끝에 선 딸 동주를 어떻게든 지키고 싶어 하지만 마음처럼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아빠는 아니다.
'비광'은 한국 야구의 간판스타 중구(류승룡 분)와 레전드 배우 남미(하지원 분)가 갑자기 나타난 중구의 딸 동주(김시아 분)로 인해 파경을 맞은 뒤, 8년 후 다시 하나의 사건으로 얽히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모두를 충격에 빠트린 사건의 유력 용의자로 동주가 지목되자 중구와 가족들은 벼랑 끝에 몰린 아이를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인다.

중구에게 동주는 오랜 시간 기다려온 딸이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화려했던 삶을 송두리째 흔든 아이였다. 처음엔 낯설고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외면할 수 없는 존재가 됐다.
최근 비즈엔터와 만난 류승룡은 중구를 두고 "지켜주고 싶은데 지켜줄 수 없는 아빠"라고 표현했다. 사랑하는 마음과 책임감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고 감당하는 일에는 늘 서툰 사람이라는 것이다.
'비광'을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는 이지원 감독의 진심이었다. 류승룡은 해외로 떠나는 길에 감독이 직접 쓴 편지를 받았고, 그 편지가 마음을 움직였다고 했다.
"감독님이 왜 영화를 하게 됐는지, 왜 나라는 배우와 같이하고 싶은지를 다섯 장 분량으로 적어주셨어요. 비행기에서 읽는데 석양이 지고 있었어요. 눈물이 났어요. 도착과 동시에 하겠다고 했죠."

가장 어려웠던 장면은 역시 딸을 위해 자신의 자존심까지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류승룡은 이른바 '깍두기를 얼굴에 붓는 장면'을 가장 힘들었던 감정 연기로 꼽았다.
"깍두기 장면이 제일 어려웠던 것 같아요. 자존심 있는 사람이 뭐에 화가 났는지 정확히 아는 거죠. 그런데 결국 깨지고 무릎을 꿇고, 이를 악물면서 동주를 구해달라고 하잖아요. 진짜 깍두기를 머리에 부었는데 고추씨도 들어가고, 얼굴에 물파스를 뿌린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냄새도 오래가고 눈도 정말 매웠어요."
중구의 삶에는 동주만큼이나 남미가 깊게 자리하고 있다. 한때 화려한 톱스타 부부였던 두 사람은 동주의 등장으로 파경을 맞았고, 8년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서로를 마주한다. 류승룡은 두 사람의 관계를 단순히 끝난 사랑으로 보지 않았다. 오랜 시간 쌓인 감정 속에는 그리움과 애증이 함께 남아 있다고 봤다.
하지원과의 호흡은 류승룡에게도 인상적인 경험이었다. 오랜 시간 자신을 관리하며 꾸준히 성장해온 모습, 더위와 거친 환경 속에서도 감정의 밀도를 끝까지 유지하던 프로 의식에 감탄했다고 했다.

"정말 프로구나 싶었어요. 레몬수를 10년 넘게 마시고, 스트레칭도 한 동작을 10분씩 한다고 하더라고요. 단시간에 갑자기 된 게 아니라 정말 꾸준히 해온 거죠. 촬영이 정말 힘들었는데도 정말 프로였어요. 관객분들은 하지원 배우의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요."
딸 동주를 연기한 김시아와의 호흡 역시 특별했다. 촬영을 함께하며 자연스럽게 가까워졌고 지금도 딸처럼 애정을 이어가고 있다.
"함께 한 장면의 대사 중에 '아빠, 나 아니야'라고 하는 부분이 있는데 정말 깜짝 놀랐어요. 정말 딸처럼 지금도 지내요. 제가 먼저 말 걸지 않으면 말도 잘 안 하는데 제가 입만 열면 웃어요."

중구의 또 다른 가족을 연기한 김혜숙에게서는 익숙하면서도 강한 어머니의 얼굴을 발견했다.
"진짜 엄마였어요. 억세지만 밑에 깔려 있는 옛날 어른들의 걱정들이 있잖아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전 며느리에게 뒤돌아보지 말고 멀리 가라고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류승룡은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도 결국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이야기의 힘이라고 믿었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느린 것을 찾게 되는 것 같아요. 발전할수록 CG가 없는 작품을 더 반가워할 수도 있고요. 이야기와 정성, 진심이 농축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