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엔터 서현진 기자]
배우들이 가진 힘은 다양하다. 그 힘은 작품성에 기여하기도 하고, 관객들의 호응도를 결정짓기도 한다. 김명민이 지닌 힘은 단연 신뢰감이다. 배우에게 가장 요구되는 연기력을 두고 봤을 때, 의심의 여지를 주지 않는 김명민이다. 여기에 안정된 톤과 뛰어난 캐릭터 소화력은 ‘명본좌’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부끄럽지 않게 한다.
“해보지 않은 캐릭터를 하고 싶다”고 밝힌 대로 김명민은 새로운 도전을 기꺼이 즐긴다. 기존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편한 길을 가지 않고 자신의 스펙트럼을 넓힌다.
MBC 드라마 ‘하얀거탑’ 장준혁, ‘베토벤바이러스’ 강마에, 영화 ‘내 사랑 내 곁에’ 백종우, ‘조선명탐정’ 김민 등 그가 출연한 작품 속 캐릭터만 살짝 떠올려도 미세하게, 때론 큰 변화의 폭을 자랑한다.
김명민의 이런 변화에 대한 뚝심은 ‘특별수사 : 사형수의 편지’의 출연을 성사시켰다. 축적된 신뢰감에 ‘날’(날라리)스러움을 더한 그는 절반만 정의로운 필재로 분했다. 또 한 번 캐릭터를 통해 변화를 즐긴 김명민을 만났다.
Q: ‘특별수사’는 영화 ‘검사외전’ ‘베테랑’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 ‘갑질’하는 사회에 대한 경고랄까.
김명민: 사회적인 시류를 염두 한 것은 아니다. 요즘 상황과 잘 맞아떨어졌을 뿐. 약자들이 갑질하는 강자와 대립하는 구도는 흔히 봐왔다. ‘특별수사’는 좀 다른 맥락으로 시작한다. 이 영화는 관계가 중요한 영화다. 속물적인 필재가 갑자기 정의롭게 돌변하는 게 아니다. 의도치 않게 엮인 동현(김향기 분)에게 동질감을 느끼면서 사건에 연루되는 것 뿐, ‘강자와 약자’가 첨예하게 선과 악으로 대립하는 영화들과 차이가 있다.
Q: 그런 면에서 캐릭터간의 관계가 중요한 영화다.
김명민: 어느 하나를 빼놓고는 구성이 안 된다. 단 한명이라도 없다면 유기적인 관계에서 오는 전개를 이어가지 못 했을 거다. 이 얼마나 치밀한 구성인가.
Q: 작품에 들어가기 전 스스로 캐릭터 몰입을 위해 소설화하는 작업을 거친다던데.
김명민: 역할을 맡기 전에 그 캐릭터가 누구와 어떻게 살았는지 생각하고 연구한다. 인물의 짧은 순간을 연기한다고 해도 이전 과정이 필요하다. 대본에 설명된 부분만으로는 한계가 있어서 관객들을 충분히 납득 시킬 수 없다. 허구의 인물이면 비하인드 스토리를 써내려는 게 항상 베이스다. 배우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런 구축이 잘 되면 생략이 많은 시나리오라도 명분을 찾을 수 있다.
Q: 관계가 중요한 영화라 배우들과의 호흡이 더 중요하다. 신구부터 김향기까지 함께하며 세대를 망라한 케미를 보여줬다.
김명민: 난 복 받은 배우다. 그런 배우 분들과 같이 한다는 게 행운이다. 각각에게 받은 분명한 느낌들이 있다. 김영애 선생님은 소녀 같지만 촬영 들어갈 때마다 돌변하는 표독스러움에 소름이 끼쳤다. 또 내 아버지로 나오는 신구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그 누가 이렇게 짧은 역을 힘 있고 존재감 있게 할 수 있었을까 싶다. 김향기는 순수함에서 나오는 진정성이 있다. 성동일은 매 테이크 마다 애드리브를 해서 상대방을 설레게 한다. 코믹부터 정극까지 섭렵하는 배우다.
Q: 영화 ‘조선명탐정’에서는 애드리브와 코미디 연기의 대가인 배우 오달수와 연이어 호흡하고 있다. 성동일과 비교한다면.
김명민: 오달수 형은 의외로 애드리브가 없고 대본 위주로 분위기를 살린다. 반면 성동일 형은 모든게 다 애드리브다. 달수 형은 잔잔하게 호흡을 이어가고, 동일 형은 시종일관 어디로 튈지 모를 스타일이다.
Q: 상대 배우의 애드리브가 계속되면 호흡을 맞출 때 당황스럽지 않나
김명민: 그 정도는 당황하지 않고 받는다. 연륜에서 오는 것들이 있으니(웃음).
Q: 극중 남남(男男)케미도 한몫 했다. 성동일과의 호흡은 익숙한 느낌이고, 김상호와는 신선했다. 박혁권과 붙을 때는 긴장감이 일었고.
김명민: 극 중 한 사람, 한 사람을 상대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난 복 받은 배우라’라고 계속 느끼게 된 게 '특별수사' 배우들과 나는 올핌픽에서 한 팀을 이룬 것과 마찬가지다. 실수를 해도 전혀 누수가 안 되게 곳곳에서 막아줬다. 내가 제일 먼저 캐스팅이 됐는데, 배우들이 차례로 캐스팅 될 때마다 이름을 듣고 쾌재를 불렀다.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았다.
Q: ‘개과천선’에서는 변호사, ‘특별수사’에서는 변호사 어시스턴트다. 캐릭터 변화도 재밌다.
김명민: 어시스턴트이지만 변호사 위에서 군림하는 사무장이다. 내가 깔아놓은 판에 변호사 판수(성동일 분)가 거둘 뿐이다(일동 웃음). 성동일 형이 변호사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내가 누명을 쓰고 조사를 받는 장면에서 ‘아 변호사였나?’ 했다(웃음).
Q: 늘 변호사, 의사 같은 인텔리를 연기하다 조금 이단아적인 잡초 같은 인물을 연기했는데. 어색하지 않았는지.
김명민: 날스럽고 양스러운 역할인데 이걸 나에게 맡긴 이유가 궁금했다. 감독님께서 ‘신뢰가 필요했다’고 하셨다. 날스럽다고 진짜 날스럽게 하면 재미가 없고 단면적인 캐릭터가 될 거라고 판단하셨다. 품격 있고 격조 있는 면이 더해질 수 있길 바라신 것 같다. 그래서 나만의 방식으로 풀었다.
Q: 배우들에게 영화 전체를 분석하고 파악하는 게 요구된다. ‘특별수사’는 어떤 점이 강조된 것 같나.
김명민: 처음 제목은 ‘감옥에서 온 편지’였다. 서사적이고 서정적인 분위기였고 내용도 묵직한 부분이 많았다. 또 부성애에 초점이 상당히 강조 돼 있었다. 그래서 ‘무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들어진 영화를 보니 사회적인 시류를 타는 쪽으로 왔다. 덕분에 좀 가벼워졌고 강자에 대립하는 약자의 통쾌한 한판승으로 메시지가 더 부각된 것 같다.
Q: 김명민의 코믹 연기는 어색함이 없다.
김명민: 코믹한 연기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안 웃기는 것 같다. 상황은 코믹해도 연기자는 진지해야한다. 똑같은 연기 선상에 있다고 여겨야한다. 드라마 장르는 나눌 수 있어도 연기 장르를 나누기는 힘들다. 접근은 진지한데 역할에 맞게 하는 게 중요하다.
Q: ‘특별수사’에서는 코믹 뿐 아니라, 액션에, 드라마까지 온갖 연기 톤을 다 보여줬다.
김명민: 액션이 많아 불만족스러웠지. 감독님이 처음에 ‘우리는 드라마가 중요시된다’고 했는데 실상 들어가 보니 액션을 더 공들이고, 오래도 찍었다(웃음). 시나리오보다 액션 분량이 많았고 몸으로 체험한 것은 더욱 셌다.
Q: 촬영 중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면
김명민: 아름답고 훈훈한 것도 많지만 죽을 뻔 한 촬영들이 먼저 떠오른다. 목 졸리는 신이 있었는데 정말 고생을 많이 했지. '숨 막혀 죽을 것 같은데 감독님이 왜 컷을 안 하지?'란 생각을 했을 정도로. 촬영 오케이를 받고 감독님께 조용히 면담을 신청했다(웃음). 컷을 안 한 이유를 물으니까 감독님이 '몰입해서 그랬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또 한 번의 감독님과의 면담이 있었다. 몽둥이로 신나게 두들겨 맞는 장면에서였다. 등이 불이 날 정도로 맞았다.
Q: 함께 촬영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현장 스태프들을 잘 챙기고, 먼저 다가가는 것 같더라.
김명민: 난 현장 스태프들 이름을 다 외우지 않으면 몸에 가시가 돋는다. ‘어이’, ‘저기’라고 못 부른다. 이름을 딱 불러줘야 한다. 그래서 늘 막내들 이름부터 외우고 시작한다. 그리고 촬영 한 시간 전에는 미리 도착한다. 누구는 내게 ‘제발 일찍 오지 말라’는 소리까지 하더라(웃음). 20%정도를 미리 준비해간다면 나머지는 현장에서 챙긴다. 스태프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날 찍을 촬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이 중요하다. 분위기를 익혀가는 그 시간은 내게 정말 값진 시간이다.
Q: 충무로는 40대 남자 배우 중심이다. 이런 분위기가 얼마나 지속될 것 같은지.
김명민: 좀 더 오래갈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제작되고 기획되는 시나리오가 남자 위주다. 그런 기회를 발판으로 주름잡은 배우들이 계속 올라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