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엔터 서현진 기자]
배우 손예진은 아름답다. 그의 화사한 미소와 진지한 눈빛이 고스란히 스크린에 담긴다. 청순의 아이콘이자 국민첫사랑의 시기를 화려하게 보낸 뒤에도 여전히 ‘예쁨’의 대명사다. 영화 ‘연애소설’(2002), ‘클래식’(2003), ‘내 머릿속의 지우개’(2004) 등을 통해 청순의 굴레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던 손예진은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변했다.
그는 청순함에서 오는 연약한 느낌을 지우고 영화 ‘작업의 정석’(2005) ‘아내가 결혼했다’(2008) ‘백야행’(2009) ‘해적’(2014)까지 다양한 캐릭터로 연기 도전을 감행했다. 관객들 역시 자연스럽게 달라진 손예진에 스며들었고, 여러 장르를 소화하는 충무로 흥행퀸으로 거듭났다. 작품을 통해 청순에만 국한되지 않는 매력을 확장시킨 손예진이다.
그런 그가 이번엔 영화 ‘비밀은 없다’로 강인한 모성애를 연기했다. 딸의 실종 후 충격적인 진실을 맞닥뜨리게 되는 정치인의 아내 연홍 역에 몰입하며 극한의 감정을 선보였다. 딸을 찾기 위한 모성애는 광기를 넘나든다. ‘비밀은 없다’를 통해 이미지의 아름다움이 아닌, 연기하는 배우의 아름다움을 확인시킨 손예진을 만났다.
데뷔한지 시간이 꽤 흘렀다.
손예진 어느 순간 선배가 됐다. 연기적인 기술도 늘고 현장에서 여유로워졌다. 예전에는 내 연기에만 급급해서 스태프들이 누가 있었는지, 뭘 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시야가 좁았다. 이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와서 참 좋다.
주로 어떤 게 눈에 들어오나.
손예진 연기하는 나, 함께 일하는 사람들. 모든 것들이 편해지고 성숙해진 지점이 있다. 몰라서 두려운 게 있었고, 연기를 즐기기보단 예민했다. 잘하기 위한 욕심이 날 예민하게 만들었다. 사실 영화 한 편을 몇 개월을 찍으면서 감정을 유지하는 게 힘들었다. 신인 때는 경험이 없으니 감정을 계속 잡고 있다. 주구장창 그 감정만 붙잡고 있는데, 오히려 촬영에 들어가면 감정을 너무 소비해 눈물이 안 난다. 지금은 한 장면을 찍고 스태프들과 농담을 주고받고 작품과 상관없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 에너지를 조절하는 법을 알게 된 것 같다.
그때랑 비교해서 더 잘 해내야한다는 강박도 들겠다.
손예진 연기를 잘 표현하고 싶었는데,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에 힘들었지 결과나 대중의 판단이 중요하지 않았다. 이젠 ‘관객들이 더 많이 사랑해줘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운 좋게도 영화가 크게 외면당한 적이 없어서 이번에도 그 만큼은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다. 큰 욕심보다 손익분기점은 넘기면 좋겠다. 우리 작품에 투자해준 사람들과 관객들에게 실망감을 주고 싶지 않다. 그런 점에서 (주연)배우로서 책임감을 느낀다.
흥행에 대한 부담감이 생길 수밖에 없겠다.
손예진 맞다. 그런데 솔직히 안전한 게 뭔지 모르겠다. 아무리 베테랑 배우라도 어떤 작품이 흥행할지 예측하는 건 어렵다. 그래서 난 영화가 크든 작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작품을 선택 한다.
이번 영화는 어떤 이야기라 좋았나.
손예진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특별하다고 느꼈다. 어떻게 보면 소재는 그동안 봐온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의 이야기를 되게 다르게 표현한다. 캐릭터도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에 나의 새로운 모습을 관객들에게 보여드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야기가 나를 궁금하게 했다. 이 영화처럼 이야기를 많이 담고 있는 캐릭터가 좋다. 배우들은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 김주혁 씨는 계속 감정을 숨겨야 해서 힘들었을 거다. 반면 나는 연홍을 통해 감정을 분출했고, 표현하고 싶은 것들을 모두 연기했다.
기존의 모성애와 다른 색다른 느낌이 있다.
손예진 연홍은 기존 ‘엄마’ 이미지와 많이 다르다. 그는 직접 사건에 뛰어들어서 집착하는 모습이 히스테리 적이기도 하고. 어디로 튈지 모른다. 대체적으로 아이를 잃은 엄마는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일반적인 느낌을 가져가지만, 연홍이 분노를 표현하는 방식은 다르다.
아이가 실종됐는데, 연홍의 의상과 헤어는 감정과 상반되게 단정하다. 기존 엄마와 다른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의도된 장치인지.
손예진 그렇다. 연홍은 오히려 큰 사건을 겪고 더 단정하게 차려입는다. 아무래도 감독님이 기존 엄마들과는 다른 지점을 보여주고 싶어 한 것 같다. 감독님을 비롯해 스태프들과 의상, 헤어메이크업에 대해서 회의를 많이 했다. 연홍이 불안할 때 더 화려한 의상을 입거나 빨간 립스틱을 바르는 등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연홍의 심리상태에 따른 외형적인 모습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이경미 감독님께서 추상적으로 연기 디렉션을 했는데 당신이 찰떡하게 알아들었다며 감사함을 표했다.
손예진 감독님이 그걸 아는군요(웃음). 감독님만의 세계가 확실한 사람이다. 그래서 이런 영화가 가능했다. 이경미 감독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특별함이 영화의 매력을 살리는 지점이다. 하지만 그걸 이해하고 흡수해서 연기하기 어려웠다. 그 접점을 맞춰가는 게 어려웠는데, 내가 감독님이 원하는 ‘연홍화’ 되가는 걸 알았고, 만족스러워하는 감독님을 느꼈다.
영화에서 당신의 굵은 목소리가 종종 나온다. 톤도 변화를 준 건지.
손예진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는데 너무 흥분하다보니 남자 목소리가 나왔다.
집착에 대한 영화다. 집착한 경험이 있나.
손예진 나는 내가 열심히 사는지 몰랐다. 주변 사람들이 ‘너처럼 열심히 사는 사람 못 봤다’고 한다. 뭘 하나를 하면 되게 열심히 한다. 열심히 먹고 열심히 쉬고, 운동하고, 모든 것에 완벽해야하는 게 있다. 오히려 대강 대강하고 낙천적인 사람들이 부러웠다. 그래도 지금은 많이 낙천적으로 변한 상태다. 하지만 아직도 연기에는 집착한다.
집착의 결과물인지, 에너지의 완급조절과 눈빛 연기가 대단했다.
손예진 내가 살면서 그런 표정으로 누군가를 본 적이 없다. 참을 수 없는 분노를 경험한 적도 없다. 그 상황에 몰입하고 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내가 쌓아온 악이 점점 생긴다. 연기도 악에 받쳐 토해내면 할수록 감정들이 형성된다. 내가 연기했지만, 스틸 사진과 모니터를 보면서 연홍의 눈이 굉장히 낯설었다. 그동안 내 삶에서 쌓여둔 감정이 영화에서 정말 딱 떨어지게 표현됐을 수 있다. 아마 20대에 이 연기를 하라고 했으면 그런 눈빛이 나오지 않았을 것 같다.
그래도 여전히 멜로에 대한 갈증이 있지 않나.
손예진 최근에는 멜로를 거의 못했다. 예전에 했던 작품들이 여전히 사랑을 받고 있어서 아직까지 많은 분들이 멜로 이미지를 떠올린다. 사랑 이야기는 배우들이 항상 꿈꾸는 지점이고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이야기다. 배우들은 그래서 절절한 사랑이야기를 꿈꾼다. 한 번도 내 멜로적 이미지를 싫어한 적은 없다. 나이가 들어도 멜로 이미지는 항상 가지고 가고 싶다.
“청순하다” “예쁘다”라는 말 듣는 게 이젠 좀 지겨울 것 같은데
손예진 설마요. 절대 그렇지 않다. 단지, 이제 점점 쑥스러울 뿐이다.
혹시 할리우드 진출에 대한 욕심이 있나
손예진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서.(웃음) 도전하는 건 배우로서 좋은 것 같다. 아직까지 한국에서 더 보여줄게 많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기회를 위해 노력이 필요한데, 준비가 덜 된 것 같다.